모두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왜곡을 하지 않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확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영토 확장"이며, 위대한 업적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영토확장에 연류되어서 고구려 군대에게 자신의 고향을 뺏긴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업적이며 영토확장인가?! 자신의 고향을 뻇긴 사람들에게 광개토대왕은 침략자일 뿐이다. 


너무나 먼 과거의 일인가?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행동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하며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 전쟁이었으며, 한국은 그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도운 또 다른 침략자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침략행위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일제의 전통을 이은 일본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베트남에 얼마나 사과를 했는가?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가?


우리 입장에서의 고구려 영토 확장은 타인에게는 침략일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타인에게는 침략자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일제 침략 행위를 긍정하는 발언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헌법에도 명문화시켰듯이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한국인은 침략 전쟁을 원하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일제 침략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우리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뉴스토마토에 의하면, 2013년 7월 24일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국정조사 법무부 기관보고에서 새누리당 소속 특위위원들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오히려 국정조사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국정원의 행위가 정당할 뿐만이 아니라 권장해야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새누리당 특위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무비판적으로 (종북세력) 인터넷 글이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건강한 대한민국 사회를 좀먹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 어린 학생들과 국가관 역사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제대로 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국정원이 심리전 활동을 해야 한다”며 “(종북세력이) 국정원 직원임을 눈치 모르게, 공무원이 댓글 단다는 생각을 못하게 교묘하게 댓글을 다는 것을 장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기관이나 공무원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굳이 역사나 법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개입을 금지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권장하는 것은 단순히 상식을 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헌법조차 무시하는 발언이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기본적인 상식을 굳이 이야기하고 있어야 한되는 것이 한심하다. 공무원의 정치참여 관련 법률과 역사에 대해서 모아보려고 한다.


* 관련 법률 *


1.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대한민국 헌법 1장 총강 제 7조 :

①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헌법



2. 국가공무원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국가공무원법 제7장 복무 제 65조(정치 운동의 금지)

① 공무원은 정당이나 그 밖의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
② 공무원은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기 위한 다음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1. 투표를 하거나 하지 아니하도록 권유 운동을 하는 것
   2. 서명 운동을 기도(企圖)·주재(主宰)하거나 권유하는 것
   3. 문서나 도서를 공공시설 등에 게시하거나 게시하게 하는 것
   4. 기부금을 모집 또는 모집하게 하거나, 공공자금을 이용 또는 이용하게 하는 것
   5. 타인에게 정당이나 그 밖의 정치단체에 가입하게 하거나 가입하지 아니하도록 권유 운동을 하는 것
③ 공무원은 다른 공무원에게 제1항과 제2항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거나, 정치적 행위에 대한 보상 또는 보복으로서 이익 또는 불이익을 약속하여서는 아니 된다.
④ 제3항 외에 정치적 행위의 금지에 관한 한계는 국회규칙, 대법원규칙, 헌법재판소규칙, 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2008.3.28]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국가공무원법



3. 국정원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국가정보원법 제 9조(정치 관여 금지)

① 원장·차장과 그 밖의 직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제1항에서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 또는 가입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
   2. 그 직위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
   3.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위하여 기부금 모집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 또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공기관의 자금을 이용하거나 이용하게 하는 행위
   4. 특정 정당이나 특정인의 선거운동을 하거나 선거 관련 대책회의에 관여하는 행위
   5. 소속 직원이나 다른 공무원에 대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거나 그 행위와 관련한 보상 또는 보복으로서 이익 또는 불이익을 주거나 이를 약속 또는 고지(告知)하는 행위
[전문개정 2011.11.22]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국가정보원법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는 미국, 영국, 일본, 호주에서도 개인의 직무와 관련하여 중립적이고 공정한 직무수행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정치표현은 엄격히 제한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60년대 3.15 부정선거의 결과 공무원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이 탄생하였기 사실상 공무원의 시민권자로서의 자유를 일정정도 침해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 관련 역사 *


1. 한국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한국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무원을 동원하여 금품으로 표를 매수하거나 선거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정부는 공무원을 통하여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경창에 지시하여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감시독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내무부 소속의 장차관급 공무원들까지 동원이 되었다. 



2. 63년, 71년 박정희 부정선거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대선투표는 단지 2번을 시행하게 된다. 그런데 2번 모두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동원된 부정선거였다. 71년의 대선은 직접 당사자 김종필씨의 증언도 있었기에 이미 확정되었다. 63년의 경우는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하여 경찰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지만 아직 확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3. 한국 총풍사건

총풍 사건(銃風事件)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측에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당시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안기부 권영해 안기부장등에게 베이징에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 박충을 만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휴전선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출처: 위키-총풍사건)



4.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2004년 11월~12월 사이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정치적 시민저항운동이다. 개혁을 앞세운 야당 지도자가 10년 장기 집권 대통령을 실정을 뒤에 업고 출구조사에서 11%로 앞선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정작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집권여당의 지도자가 3% 앞선 것으로 결선투표결과를 발표하였고, 시민들은 투쟁에 나서서 우크라이나 최고 재판소가 부정선거를 인정하게 한 사건이다.



그 외에도 널리고 널렸지만 대통령 선거에 관한 사항만 뽑아보았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불법부정선거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그 만큼 불법부정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경각심도 높아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서 장난질을 치다가는 시민들의 혁명을 마주하게 된다. 유일한 성공사례?!가 박정희 사건이다보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것일까? 하지만 역사는 진실을 사랑한다.


조선은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고구려는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당연히 한국의 역사인데 "왜?"라고 묻느냐고 화를 내시는 몇몇 분들이 보이는 군요. 그런데 화내시는 분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현대 역사학의 입장에서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인 이유는 엄청나게 간단합니다. 현재 한국이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가장 큰 명문으로 문화적 공통성을 가장 크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는 현재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지리적인 배경적 명분도 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역사학에서 기초적인 논리와 근거가 보장되는 한 개개인의 "역사관"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고요? 극단적인 예시를 최근 일본의 아베총리가 해주었습니다. "침략의 정의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하여서 한국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한 관련 국가 국민들의 분노게이지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치를 떠나서 순수하게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아베총리의 발언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역사는 "A국이 B국을 공격하였다."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격"이라는 단어 대신에 침략, 테러, 포위, 협박, 제압, 압박을 사용할 경우의 각각의 의미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될까요? 학술적인 맹렬한 토론과 증거제시보다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보다 의지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공격"을 한 것이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저희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영토 확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시대의 고구려 주변국들의 입장에서는 침략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각주:1].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역사의 소유와 계승은 인문학의 한계상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개개인이 모여서 만든 단체, 사회, 국가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렇기에 고구려나 한국의 역사를 현재 한국에 모여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한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 중국에 모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중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이 존중 받으려면 상대방의 생각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역사를 뻇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시면 훨씬 더 넓은 역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나의 역사이다."라고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제 모든 인류의 역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1. 본 내용은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의 입장에서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학계 내부에서도 비판이 강합니다. 다만 정치-외교적인 사항으로 인하여 단어가 변하는 것 뿐입니다. 후... [본문으로]





어떤 때에는 손해가 곧 행복이다.


과거 돈 있는 사람들의 생일연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것은 곽자의(郭子儀)의 이야기이다. 곽자의는 당(唐)황제들도 언제나 그를 공손히 대접하였다. 그는 관직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수 많은 자손들이 오랜 시간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

군주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데 곽자의같은 수십만 대군을 이끈 무장이 황제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이런 행복을 누렸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자의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비록 곽자의가 일개 무장에 불과하지만 황제접대학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곽자의는 자주 자신의 부하의 승진을 황제에게 신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했다. 곽자의의 아들들은 "곽가가 없었으면 황제의 성이 달랐을 것인데! 어찌 곽가의 체면을 이리도 무시하는가!!!"라며 화를 내었다.

그러나 곽자의만은 오히려 너무나 기뻐하였다. 황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장에 의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무장의 반란이 걱정이 된다면 그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곽가의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가 곽가의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는 권력은 어마어마하지만, 용기가 없는 졸장부이다. 비록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주위에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능력이 있는 모든 신하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렇기에 곽자의가 자신의 추천이 통과되지 못할 것을 몰랐을까? 오히려 무리한 추천을 통하여 황제가 위엄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다.


당(唐)대의 대장군 혼감(渾瑊)도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가 칭찬 일색이면 두려워하였고, 비평이 많으면 기뻐했다고 한다. 황제가 의심하고 말고는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어떨 때는 손해가 곧 행복인 것이다.


욕을 한다는 것은 당신을 어렵게 보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몇 마디의 지적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상사가 당신에게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마땅히 지적해야 될 곳도 넘어가 버린다면 당신은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진(陳)나라의 개국공신인 후안도(侯安都)는 체면을 위해서 억지로 황궁에서 가족연회를 열었다. 당시 황제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행동하였지만 기회를 잡아서 후안도를 죽여버렸다.


당현종(唐玄宗)의 심복인 대장군 왕모중(王毛仲) 역시 자신의 공로와 황제의 총신을 믿고서 어떠한 손해도 원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둘째 마누라가 아들을 낳자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관직을 달라고 하였다. 황제가 5품관직을 내려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 아들인데 3품관직정도는 받아야되지 않는가?!"라고 계속 졸랐다. 그리고 어떤 아부꾼 신하는 황제가 아직 윤허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3품관복을 벗어서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황제도 "그 아이에게는 3품관리의 의복이 어울리는구나"라면서 결국 허락을 한다.


결국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그 뒤로 몇 달만에 왕씨가문은 몰락하고 왕모중 역시 자살을 강요당한다. 왕모중은 모반을 꿈꾸지도 않았고, 충성이 변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끝을 맞이하였다.



당신이 설령 대신이고 대장군일지라도 천하에서 가장 체면을 필요로 하는 황제의 체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자신의 체면은 어떻게 하냐고? 체면을 지키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이글루스쪽에서는 최근 다시 한번 "환빠대전"이 발생한듯 하다. 솔직히 과거에는 이 블로그에서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위 "환빠"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학도로서의 사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역사학도로서의 부담감.
차라리 본인이 역사전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관련 글을 써내려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은 공개적으로 역사전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영역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비교적 많이 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증거자료들을 레포트 작성하듯이 일일이 찾아서 나열해야한다. 물론 관련 논문이나 저작을 비롯한 학계의 흐름도 나열해주어야 한다.

만약 본인의 전공분야라면 비교적 쉽게?!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최소 수십편에 이르는 관련 논문과 저작을 읽어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부담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럼 본인의 전공만 쓰면 되지 않냐고? 그쪽이야 말로 민감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점이기에 부담스럽다. 본인의 전공은 북방민족사이며, 한중간의 민감한 사안인 고구려나 발해도 다룬다. 본인은 지도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며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 보며, 고구려사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인들의 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짱깨로 매도되기 쉽상이다. 이런 부담감에 석사졸업논문도 중국인들에게도 생소한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라는 주제를 채택했다.


2) 환빠들의 사료적 문제.
흔히 "환빠"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료"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역사 연구에서 사료는 기본이다. 그 뼈대이다. 그 정수이다. 그런데 "환빠"라는 사람들은 이 사료부터가 엉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료 반박은 어렵다고 그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쉽다면 쉬운 부분이다. 물론 대부분의 환빠들의 헛소리는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고문 소양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고문을 모른다는 것은 마치 더하기와 빼기를 못하면서 수학을 하겠다는 것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최근에는 수 많은 현대 한국어 번역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접근성을 높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역사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연구자가 고문의 원문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병신이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한자가 나오고, 해석이 나오면 그냥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환빠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료를 비판을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환빠들이 "식민사관에 의해서 해석한 결과"라고 하면 그것을 믿어 버린다.  식민사관조차도 그나마 사료라는 기초라도 있었다. 환빠들은 고문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소설을 전개하거나, 고문을 언급하더라도 원래 고문을 마음대로 변조한다.

원문 : "갑은 을나라를 침략하였다"
환빠식1 : "갑은 을나라에게 침공당하였다"
환빠식2 : "갑은 을나라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체 어떤 "학문"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허용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백날 설명해도 기본적으로 고문을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결코 일반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무지를 이용해 먹는 환빠들의 문제이다.


3) 환빠들의 논리적 문제.
환빠의 논리는 언제나 결국 "한국 만세!"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식민사학에 세뇌당한 병신들"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어서 반박을 해주지만, 솔직히 이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시절을 정점으로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민족"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선전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학적 증거도 없는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당당하게 중고등학교 "국사"강의에 사용되고 있다. 아니 역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져서 "국사"라면 "대한민국사"를 공부해야지 그 이전을 공부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다.

역사학의 방법론은 이제는 세계 공통이다. 기본적으로 사료를 보고, 사료를 비판하고, 사료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없이 마냥 무조건 "식민사관"이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하다 못해서 본인 스스로 "탈민족주의자" 혹은 "인간사관"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식민사관"이라고 근거 없이 매도하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간략하게 말하면, 과거에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싶다는 역사학도로서의 열정과 의무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니 맘대로 사세요~"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에휴...싸워서 머하랴. 사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박정희식 우민정치의 희생량인걸.....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어떻게 보면 아직 정열이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해드립니다. 환빠에 대한 비꼼이 좀 더 많아 지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신석시 시대 요하일대에는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리고 지금 중국과 한국에서는 각자 요하문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설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중국의 주장만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주장만 있다. 대중에 정보를 전달해야되는 신문에서는 민족감점만 일으키고 논리와 증거에 대해서는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1) 요하문명(홍산문화)은 무엇인가?
1980년대 랴오닝(遼寧)성 요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요하일대에는 기원전 7천년에 이미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존재하였고, 기원전 3500~3000년쯤(홍산문화 후기)에는 이미 초기 국가형태가 갖추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2) 중국학계의 의견은?
중국학계는 발굴 초기에는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동이족이나 예-맥족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발굴 후반기로 갈수록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토템과 발굴유물이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와 연관을 시키려는 학자(레이광젼 雷广臻)들이 나타났다. 특히 곡옥에 대해서 용으로서의 상징성을 이야기하면서 중화의 시초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아직 논쟁이 진행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전설상의 인물일 뿐이며, 중국의 형성에서 결코 황하문명뿐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융합하여서 만들어졌다는 의견이 강한 만큼 해당 의견은 제대로 된 학설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각주:1].

중화제일용이라고 말하는 곡옥. 근데 용이려나...



3) 한국학계의 의견은?
한국학계에서는 요하문명에 대해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소수의 곡옥이나 관련 유물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홍산문화가 한반도문화의 원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선문대 이형구 교수(고고학)는 중국의 ‘요하문명론’에 대응해 ‘발해문명론’까지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곡옥이나 대응 유물은 매우 소수이며, 요하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연결점이 없어서 확실한 증거로 사용되지는 못한다. 하다 못해서 동이족과 고조선의 연결지점은 고사하고, 고조선이 어느 정도의 정치체계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요하기원설은 근거가 매우 약한 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각주:2].

무엇으로 보이는가? 용? 돼지?



4) 요하문명은 한국과 중국 모두의 것이다.
요하문명은 분명 신석기시대에 요하지역에서 발전했던 문명으로 보인다. 그럼 그렇게 발전한 문명이 현재의 중국대륙과 한반도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은 당연하다고 본다. 오히려 "요하문명이 중국대륙에만 영향을 주었고, 중국대륙만이 그 영향을 이어 받았다!"라고 하거나 "요하문명은 한반도에만 영향을 주었고, 한반도만이 그 영향을 이어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로 느껴진다. 마치 프랑스가 "로마의 영향은 프랑스만 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요하문명이 한반도와 중국대륙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기에 요하는 현재 한국과 중국 역사 모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대체 무엇을 뺏고 말고 한단 말인가[각주:3]?

  1. 중국사학계는 다민족주의로 간다고 말을 하면서도 허구의 인물인 황제까지 끌어들여서 무리한 한족중심설로 가려는 일부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스스로가 기본적인 논조라고 말하고 있는 다민족주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일뿐만이 아니라, 역사학과 고고학의 방법론에서도 어긋나는 행동이다. 하상주시대에도 다양한 "집단"들이 혼재하며 살아갔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계속 들어나고 있는 만큼 허구의 황제의 토템까지 도입을 하는 무리수보다는 황제의 토템 자체가 다양한 집단들의 토템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그러한 다양한 집단 중에 요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2. 한국사학계의 웃긴 점은 우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한국에 융화되었고, 한국이 영향을 준 것에서는 찬란히 남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기마문명이니 요하문명이니 하면서 한반도가 영향을 받았고 우리안에 융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대로 일본에 전해진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융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무시하며,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남들은 역사조작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우리 모두가 고조선의 유물이 비파형동검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런데 이에 대한 증거는 층위나 지리적 위치가 "그.럴.것.같.다."라는 추측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교과서에 명시해놓았다. 이런 것이 역사조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본문으로]
  3. 같은 논리로 동이나 고구려도 누구만의 것이 아니다. 동이자체가 통합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젠 너무나 명확해 보이며, 동이의 범위를 보면 한반도와 중국대륙 모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이는 무조건 그냥 한국인의 조상이고, 절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이건 대체 먼 논리인가? [본문으로]
2014년부터 현재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역사(한국사, 세계사)가 필수과정에서 제외된다. 이에 서울대는 "대학생이라면 우리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된다"며 한국사를 이수한 응시자에게 가산점을 주기로 하였다.

나름 역사를 좋아하여 석사과정까지 했던 "미친놈"으로서는 현재와 같은 고등학교 역사교육은 필요가 없으며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재 고등학교 역사시간은 재미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암기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태정태세문단세"니 "한국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형성이 되어왔는지를 공부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1950년에 일어난 사실을 외우는 것이 아닌 한국전쟁이 발생한 원인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현재 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은 역사교육이 단순한 암기훈련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까? 일부 역사교사들은 분명히 타성적으로 암기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의식있는 역사교사들은 암기가 아닌 "역사"을 알려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암기를 시킬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인 "수능시험"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당장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평생 도움이 될 역사교육이 아닌 어쩔 수 없이 알맹이 없는 "상식"만을 세뇌시키는 지금의 역사교육은 심각한 독이라고까지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역사교육을 시킬것이면 차라리 "엉터리 고증에 허황되기까지한 스토리"인 역사드라마가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제대로 고증된 역사드라마나 더 만드는 것이 한국의 미래 역사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연도나 사람이름이 아닌 "삶"을 배우기 위함이다.


* ......재미있는 "역사" 교육....젠장..................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원장을 고려인이라고 말한다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본인 처음에는 또 한국에 관련된 루머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방송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주원장 고려인설이 뭔지 한 번 보자. 처음부터 결론을 내자면 "어이없음" 이다.

* 본 내용은 아쉽게도 "조선기문朝鮮紀聞"직접 보지 못하고 쓴 글이다[각주:1].





3월 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은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중심의 문화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거름뱅이에서 시작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이를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전기는 주원장이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또한 중국인으로 적고 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 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

또 주원장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고 주원장의 심복인 주유도 고려인이어서 각별히 신임했다는 주장까지 더해져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또 다른 학자는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가능성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출처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논란, 韓中 역사학자 대립 논쟁


1) 대체 어디를 봐서 학자들의 공방이지?
조선기문朝鮮紀聞은 잘해봐야 2차사료이다. 1885년 일본인 鈴木信仁에 의하여 쓰여진 조선의 일들을 모아놓은 책[각주:2]이다. 주원장전朱元璋传는 2차사료조차 어림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吴晗[각주:3]에 의하여 1948년에 쓰여진 책이다. 이건 연구서라로 해야된다.

대체 어떤 "미친" 학자들이 2차사료도 안되는 것을 기본으로 공방을 펼친다는 것인가?[각주:4] 솔직히 이 부분부터가 벌써 어이없음이다. 역사학 관련 사람들은 본인이 위에서 적은 조선기문과 주원장전의 간략내용만 보아도 어이없어 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의 아버지가  钟离로 이동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钟离는 현재 중국 안후이펑양安徽凤阳이다[각주:5]. 그리고 명사는 1739년에 완성되었다. 정식사료인 명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명사보다도 100년이상 늦게 기록되었던 전설을 믿을 것인가? [각주:6]


2) 설화는 가치있는 사료이지만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설화의 가치는 상당히 뛰어나다. 오히려 정사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설화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설화만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 학자는 없다.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많은 시간동안 온갖 변형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뽑아내어서 "간접 증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직접 증거로 사용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딱이다.

조선기문은 무려 일본인이 1885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미 주원장과 상당한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자신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서 적혀진 내용이기에 그 정확성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잘해봐야 2차사료일 뿐인 것이다. 그 외에 출처를 아직도 모르겠는 "민간설화집" 역시 동일하다.

논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이가 없다. 논란이 되려면 1차사료정도는 있어야되는 것 아닌가?


3) 설사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래 원하는대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보자. 그럼 주원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개같은 한반도"을 떠나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중국"으로 간 것이 된다. 이 점은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한국인" "한국인" "한국인"만을 말하다보니 이런 조그마한 것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조상이 당신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분명히 이야기를 하겠다.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역사에 기대지마라. 설령 조상이 아무리 위대했어도 지금 현재 빌어먹는 거지꼴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를 냉철하게 살피고 미래로 향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묻겠다.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중국정령하자?!
정신 차려라. 이 내용 덕분에 중국에서의 반한정서가 왕창 상승하였다.


추가 : 혹시 주변에 중국인에게 말하고 싶은데 중국어가 안되는 경우 아래를 참고하셔요.

我身为在中国学古代史的的韩国人,向中国朋友道歉。

朱元璋为韩国人是由于不可靠的史料(朝鲜纪文)来推测的垃圾理论,是韩国的一部分极端民族主义者和国家主义者引起的一场大误 会,我已经通过博客向韩国朋友解释了,并且韩国历史学界不会依靠这些不可靠的史料来推定历史事实。再说这些都是一部分人造成的祸,世界上任何地方都存在着一些疯子,希望不要通过疯子来判断一个民族或者一个国家。

只是借这个机会向大家提醒一件事。民族主义和国家主义总是内涵着这些问题,而且这个问题不仅仅在韩国,中国跟日本也确实是存 在着。比如说,意大利面是中国发明或者把历代边疆的各个民族政权统统被列为地方政权等等的事情。

我希望大家尽量理性的摆脱这些民族主义和国家主义的束缚,不要老是纠缠着过去,要重视现实和未来。历史经验可以值得学习,只 是不要忘记学习历史经验的的目的。

  1. 직접 구해서 볼 수 있었으면 더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으로]
  2. 제목; 朝鮮紀聞 바로가기 (새창). 저자; 鈴木信仁 編. 발행일; 1885. 발행기관; 愛善社.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본문으로]
  3. 심히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이 책을 연구서 수준도 안되게 보는 사람도 많다. 吴晗은 나중에 심히 유명해진다.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海瑞罢官》이라는 명작을 내놓는다. [본문으로]
  4. 조금 과장하긴 했고, 본인이 1차사료를 통한 공방을 구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그래도 어이없어!!! [본문으로]
  5. 《明史》第一卷 本纪第一 太祖一 太祖开天行道肇纪立极大圣至神仁文义武俊德成功高皇帝,讳元璋,字国瑞,姓硃 氏。先世家沛,徙句容,再徙泗州。父世珍,始徙濠州之 钟离 。生四子,太祖其季也。 [본문으로]
  6. 위의 것만 적어놓으니 혼동하시는 분이 있어서... [본문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면 솔직히 제가 생각하는 베스트글과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베스트글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전 별 생각도 없이 갈겨쓴 것인데 사람들을 끌어모을때가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고민하여서 쓴 글인데 아무 반응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2009년 베스트 10은 제 스스로의 노력이 많이 들어간 글을 위주로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역사전공이다보니 정작 역사관련 글을 쓸 때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역사전공이라는 놈이 역사관련 글을 쓰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요?[각주:1] 결과적으로 역사관련이 5개로 반을 차지하는군요. 재미있는 것은 8월 말부터 9월까지 글이 좀 모여있습니다.

* 순서는 날자순으로 배열하였습니다.


2009/01/27 [중국유학/바로 북경대] - [막말북대] 북대 학생회 탄생비화 - 선사시대
현재는 역사학자와 기자로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 모두가 역사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경대학교 한국학생회의 탄생에 대해서 쓴 이 시리즈는 나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습관대로 모아둔 과거의 자료를 뒤적거리면서 추억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써내려 갔습니다.

2009/03/29 [중얼중얼/꿍시렁꿍시렁] - 고구려가 왜 한국사입니까?
덧글이 압권임. 왠만한 글 10개 이상 적을 수 있는 분량의 덧글~~
글 자체는 적당히 머리 푸는 용으로 까대려고 쓴 것이라서 쓰레기 수준에 가까움.

2009/04/04 [중국이야기/논쟁 In 중국] - 재중동포(조선족)가 뒷통수를 친다고?
인식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 함부로 집단을 싸잡아서 비판하지 말라.

2009/06/03 [중국이야기/쪈더 중국] - 천안문 사건은 추억일 뿐이다
천안문 사건은 현재의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경제우선...

2009/07/30 [중얼중얼/한국이야기] - 직권상정+대리투표+재투표+의안미접수 연타콤보
....미디어법아...미디어법아...후

2009/08/23 [중얼중얼/한국이야기] - 공자는 한국인인가?
공자의 핏줄 자체가 이어졌냐 아니냐보다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받았냐가 중요하지 않나?

2009/08/30 [역사-歷史/역사잡담] - 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북방유적은 분명히 미스테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흉노라고 단정?

2009/09/06 [역사-歷史/역사잡담] -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
아골타가 신라의 후예라고? 미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2009/09/30 [역사-歷史/역사잡담] -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있었다?
만리장성 논란에 대해서 나름 종합적으로 정리한 글

2009/12/16 [중국이야기/중국 이슈] - 2009년 중국의 영웅은?
영웅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영웅을 없애려 노력해야된다.


여러분은 어떤 글이 올해의 베스트 10인가요? 어떤 글이 열심히 쓰여졌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여 슬펐나요? 그리고 제 블로그를 자주 오시는 분들은 올해 어떤 글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1. 실제로 전 말도 안되는 실수 많이 합니다. 훗-_ [본문으로]
북경대학교의 역사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최대한 간단하게 흥미진진한 야사를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근현대사가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름은 한국외래어표기법에 의거하여 1949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을 모두 한국어한자독음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어발음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 나름 잘 써서 올렸는데, 티스토리가 Ddos 공격을 받다니..이 글은 이렇게 묻히겠구나~~~!!!


1)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시절

1898년 청나라 광서제는 한참 무술변법운동(戊戌变法)이라는 개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처럼 왕조는 유지하면서 근대국가로 변화하겠다는 몸무림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사항의 하나로 나름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인 경사대학당을 7월4일 설립하게 된다. 그런 무술변법운동은 100일도 되지 않아 9월에 서태후의 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러자 경사대학교가 공중분해될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리고 1900년 8월 3일 서태후는 폐교을 시켜 버린다.

원래 자금성 동쪽, 왕푸징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잠시간의 개혁을 경험한 중국내 여론의 압력으로 1902년 다시 경사대학교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고, 12월 17일 드디어 입학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당시의 신지식인 엄복(严复)교장선생님이 등장한다. 하지만 비록 신지식인인 엄복이 교장이 되었지만, 경사대학당은 어디까지나 서당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학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다.

사실 북경대학교 마크에는 1989년 개교를 했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1902년에나 실질적으로 개교를 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게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1989년이니 3년정도의 애교는 귀엽게 봐주시길.....^^;;


2) 북사탄(北沙滩) 북경대학

사람들은 현재의 북경대학교로 관광을 온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북경대는 어디까지나 1952년 이후에 옮겨온 곳이며, 그 이전에는 연경대학부지였다. 그리고 이 당시 북경대학교 부지는 지금의 자금성의 오른쪽, 왕푸징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북사탄이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한자를 아시는 분은 눈치 채셨을텐데 원래 모래밭이었던 곳에 북경대학교를 만든 것이다. 이 곳은 현재 북사탄 북경대학교 혹은 북경대학 홍루(붉은 건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예전 북경대학교 건물이다. 여행으로 자주 가는 왕푸징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다.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각설하고! 1911년 국민당정부가 핵심이 된 중화민국이 생겨난다. 그리고 1912년 5월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교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 1916년 12월 드디어 북경대학교의 영원한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리며, 현재 북경대학교의 정신적인 토대를 세운 채원배(蔡元培)교장선생님이 오신다.

채원배교장선생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학술은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学术自由,兼容并包[각주:1])"라는 정말 옳은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어낸다. 이 말을 충실히 현실에 재현을 한 당시 북경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고홍명 선생님.

아직까지도 그 힘을 보유하고 있던 유학자들과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노쉰(鲁迅)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이대조(李大钊)가 같은 학교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홍명(辜鸿铭)이라는 분도 압권이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화교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피로 서양인같은 높은 코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전통옷을 입고서 학교를 노닐었던 것이다[각주:2].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모택동(毛泽东)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조수[각주:3]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이제 놀라지도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때만 해도 가장 강력한 힘은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전통의 힘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파가 급속하게 성장을 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제 막 유입된 요즘말로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러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그 어떠한 학설이든 스스로의 논리가 성립을 한다면 받아주며, 외부의 압박에서 보호를 했던 것이다. 채원배 선생님이 현재까지 북대의 영원한 교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이다.

북경대학교는 이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어 간다. 그러나 1931년 일본제국의 중화민국 공략이 본격화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차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어가면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반대시위등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35년에는 129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또 전설이 세워진다. 서남연합대학의 전설이....


3)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1937년 소위 77사변이라고 불리우는 일제침략행위가 발생을 하고, 북경대학교와 청화대학교 그리고 남개대학교(南开大学)[각주:4]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챵샤(长沙)에서 서로 연합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라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전설의


북경대학교의 불타는 정열과 청화대학교의 얼음같은 엄격함, 남개대학교의 끊임없는 노력정신이 뭉치게 된 것이다. 대충 생각을 해봐도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계속 되는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서 수 많은 원사[각주:5]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1946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솨서 10월에 다시 북경대학교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 때 호적(胡适)교장선생님이 교장이 된다. 그리고 몇몇 잔잔한 개혁이 있었다. -0-;;


4) 하이디엔취(海淀区) 북경대학(현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호적교장선생님은 미국에 잠시 있다가 타이완(중화민국)으로 갔다. 그리고 1951년 6월 마인초(马寅初)가 교장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1952년 대대적인 중국의 대학개편작업이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북경대학교(공과는 청화대로) + 연경대학교(문과,이과,법과) + 청화대학교(문과,이과,법과)을 하게 된다. 북경대와 청화대는 무엇이 다른가? - 바로 북경대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북경대는 문과대학이 아니라 문과와 이과 대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때까지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연경(燕京大学)가 있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반도체를 개발하는 등의 화려한 모습을 잠시 보이나

삼각지(三角地)에 문화대혁명의 포스터(大海报)가 붙은 것은 중요한 암흑기의 시작이었다...2007년에는 이 삼각지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또다른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 마인초교장선생님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해임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기가 도래한다. 이 부부은 진정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문화대혁명의 구호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앞장서서 나섰다. 그리고 1978년 이전까지 학생이 교수를 공격하고 몰아내는 등의 온갖 난리가 벌어졌다. 그래서 현재도 196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졸업한 사람들 중 현재 북경대 교수가 된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공백기를 가져왔다. 이 시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아.무.것.도. 없.다.


5) 개혁개방의 시기
1979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1979년 학번들은 북경대와서 그 자유로움을 순식간에 회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79학번부터 82학번 사이에 현재 북경대교수진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당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현재의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81년 중국 여자 배드민턴팀이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북경대학생들을 뭉치자! 중화를 진흥시키자(团结起来,振兴中华)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에서 중화를 진흥시키자(振兴中华)는 현재도 북경대학교 구호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퍼래이드를 하다가 갑자기 펼친 이 플랜카드는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 천안문 퍼레이드에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등소평짱[각주:6] 안녕하십니까?!(小平您好)라고 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같은 장소에서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민주화를 희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는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자, 동시에 아픔을 알려주는 일이다. 현재 북경대학교의 교수 중에서는 이 시기 천안문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당시의 정신을 계속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당시의 아픔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정말 짦게 한다고 했는데, 쓰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그런데 여기서도 하지 않고 넘겨버린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는가?-_-;; 그리고 직업병 발동 안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저것 확실하게 하게 위해서 자료를 찾다니....ㅠㅠ  다음 편부터는 인물이나 건물의 이야기로 최대한 짦게 짦게 가이드처럼 가련다. 이렇게는-_-;; 너무 길어;;;;

  1. 《史记·司马相如列传》:“故驰骛乎兼容并包,而勤思乎参天贰地。” [본문으로]
  2. 지금 이런 분이 있어서 신기하게 볼 터인데...그 당시에;;; [본문으로]
  3. ...그러니까 사서도 아니고 거의 이름만 있는 알바같은 수준;;; [본문으로]
  4.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개대학교는 천진에 있는 대학으로서 지금도 중국대학순위 10위권에 들어가는 학교이다. 이 당시 군벌에 의한 대학교가 천진에 세워졌다. 그것이 바로 남개대학의 전신이다. [본문으로]
  5. 원사는 중국의 제도로 국가급의 학자에게 수여를 하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요즘은 원사를 마구 주어서 격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리 떨어져도 원사다라고 할까? [본문으로]
  6. 노무현 전대통령을 보고 "노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본문으로]
胡新生《乡饮酒礼与食犬风俗 - 《仪礼》酒会用牲制度的地域特征和文化渊源》《文史哲》2009年第5期。

후신셩(胡新生)은 현재 산동대학교 역사문화학원교수로 계시는 나름 유명하신 학자분. 그런데 이런 민속학이나 인류학적인 논문을 쓰실 줄이야…^^:::

내용 요약 : <의례-향음주례>와 관련 사료에서 나오는 개고기를 먹는 연회는 춘추전국시대를 포함한 주나라의 예가 아니며, 산동지역에서 행해졌던 상나라의 예를 이어받은 특수한 예법이다.

1-  향음주례의 처음에만 딱딱한 예법이 있을 뿐, 뒤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것은 향음주례가 예법으로 다듬어지기 전의 원형을 나타내준다.

2-  주나라의 6대 희생품은 중요도순으로 말, 소, 양, 돼지, 개, 닭이고, 사계급이 먹었던 것이 개였던 만큼 그리 중요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의례에는 개고기를 중요시한다.

3-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만 두 가지 장례풍속이 함께 있으며, 사료적으로 은나라의 후손이 노나라로 흘러들어왔다고 볼 수 있고, 주나라의 보편적인 희생품과는 다르며, 의례가 노나라를 본거지로 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집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향례에서 개고기가 예로까지 승격된 것은 노나라 및 인근지역의 특수한 모습이다.


솔직히 전공하고 그리 상관없는데 심심풀이로 읽은 글이라서 특별히 문제를 찾아가면서 읽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 않은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직접 찾아서 보시기를….재미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학도로서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살짝 고민;;)



제 4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아들(2)
(지난회는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1) -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수나라의 양식은 얼마나 풍부했었던 것일까? 천하를 50~60년동안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수나라가 38년만에 망했으니, 당나라는 날로 20년분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이러한 수나라의 부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나라도 수나라만큼 국고가 넘쳐흐르지 않았다(古今称国计之富者莫如隋)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도 수나라 정부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수나라와 맞짱을 뜨지 못한다. 수나라야 말로 막강 돈지랄을 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3. 운하를 뚫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뚫었다. 용제거(永济渠), 통제거(通济渠), 한구(邗沟), 강남하(江南河)로 분리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탁군(涿郡)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도달한다. 참고로 미치도록 길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파나마 운하의 38배이고, 스위스운하의 20배에 달한다. 현존하는 최대길이의 운하를 수나라때 포크레인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 현대의 기술로도 한반도에 운하를 뚫는 것은 환경파괴는 둘째 치고 돈을 몇 조씩 넣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에는 어떠하였을까?



4. 도로 재정비....
이쯤 되면 우리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떠오른다. 진나라도 만리장성 만들고[각주:1], 길을 새로 설비하면서 사람들을 부려먹다가 2대만에 망했었다. 수나라 역시 딸랑 2대만에 망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수양제를 욕만 해서는 안된다.


수양제는 분명히 폭군이지만, 멍청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 나쁘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무지막지 부려먹었던 운하공사를 보자. 대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은 지금이야 관광자원이 되어서 이민족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곳이며, 중화민족의 상징이니 머니 하고 있지만, 역대 대대로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돈과 인력은 무지막지 투자를 해놓고 정작 방어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타크레프트로 비유를 하면, 열심히 벙커를 지었지만, 정작 미사일터렛을 만들지 않아서 다크템플러가 은신해서 유유히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대운하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대부분의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래서 강을 이용하면 동서간의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남북간의 교류이다. 열심히 말을 타고 다각다각다각 갈 수밖에 없다. 머? 그냥 말타고 교류하면 안되냐고?

말을 타거나 짐마차를 끌고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은 매우 적다. 당신은 어디 이사갈 때 맨 몸으로 터덜터덜 가는가? 가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을 챙겨서 가야되는데, 육지로 이것들을 옮기려면 죽어나간다. 그런데 배로는 매우 쉽다. 특히 당시에 핵심적인 세금이었던 양식인 "쌀"은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배를 통해서 운반하지 않으면 죽어난다. 못 믿겠으면 쌀 한가마를 지고 100KM만 가봐라[각주:2].


문제는 수양제가 돈지랄을 너무 했다는 것이다. 10권짜리 장편 소설을 쓴다고 보자. 그럼 자료수집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이런저런 구상과 수정에 몇 달은 충분히 걸린다. 그런데 이런 장편소설을 일주일만에 써내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1억을 준다고 해도 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수양제가 딱 이꼬라지 였다.

수양제는 제위를 하고 나서 고구려을 3번 원정해서 대패하고, 수도를 옮기고, 법령을 강화하는 등등등 온갖 일들을 다 벌리고 다닌다. 문화사업이라던지 풍류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멍청한 상관이 아니고,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3차례의 고구려 공격을 보자.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정권이다[각주:3]. 지금 북한의 북부에 있었다. 이녀석은 700년동안이나 계속 반항하였는데, 처음 300년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있었고, 그 다음 300년은 평양(平壤)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됐고, 어찌되었든 한국인은 머든 뻇는다.[각주:4]

수양제의 3차 고구려 공격에 100여만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딸랑 2700명만이 돌아왔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한 전략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상대한 전략이었다. 하늘은 드럽게 많고, 땅은 넓은데 다 귀찮고 그냥 튀어!!!! 땅을 뻇으려면 뻇어라~~ 나는 튀련다의 정신으로 겨울까지 계속 후퇴만 한다. 승리의 기분도 처음뿐이지. 몇 달 동안 계속 걷기만 하고, 점점 겨울을 다가와서 추워지는데, 고향에 놔두고온 설미는 보고 싶고......근데 왜 이리 졸리지.....

이렇게 알아서 얼어 죽어주는 거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제 쫒아가면서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열받은 수양제이지만 나름 황제가 아니었던가? 육군만으로 안되면 수군까지 동원해주지! 그래서 쌈 싸먹겠다의 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에 동원된 백성들의 분노로 의한 봉기가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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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그냥 내가 처음부터 쓸까...-_- 이미 원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아무리 의역이라지만...이래도 되는걸까나;;;; 뼈대야 그대로 가고 있다만....



  1. 정확하게는 만리장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밟아 버린 나라들의 장성(연나라, 조나라등)과 자신의 장성을 이어서 만든 것이 만리장성이다. 한마디로 새로 만든게 아니라 좀 대규모의 보수공사라는 거... [본문으로]
  2. 한반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초등학생도 알 이 상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대운하 필요 없다. 그냥 바다을 통해도 전국 어디든지 간다. 그런데 굳이 대운하 삽질을 하시겠다는 그 분은....후.... [본문으로]
  3. 본인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문 그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본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라. 본인도 지방정권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아두라고 그대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4. 다시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_-;;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은 중국을 분석하고자 하는 분들은 유심해서 볼 부분이다. [본문으로]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기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똥을 싸고, 어떤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어떻게 싸움박질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문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이라는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신을 가진 이념과 한자라는 문자가 전래된 덕분에 일찍부터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사료는 믿기가 힘들다. 왜곡과 과장은 기본이고 삭제도 심심하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남자들이 허풍을 치는 것 중에 한때 10대 1로 싸웠냐느니. 100대 1로 싸웠냐느니. 내가 툭 치니까 옥수수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가 생각나시는가? 아니면 군대에서 북한에 넘어갔다 왔냐느니, 태권V가 국회의사당이 열리며 출동한다느니 하는 이러한 헛소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처절하게 깨지고 돌아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허벌나게 쪽팔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깨지고 돌아왔다."라고는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1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와 같이 서술해 버리는거다. 참~~~ 쉽죠?~~잉~

삭제도 비일비재하다. 당신이 피임을 잘못 해서 임신을 해버렸다. 혹은 임신을 시켜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정말 친한 주위의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물론 속도위반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수도 있다.) 물론 먼 훗날에 자서전에 한 줄 정도 언급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평생동안 마음 속 깊이 묻어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했다고 하자. 모두가 알다 싶이 나중에 신라만이 살아남아서 신라 사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게 된다. 김부식이 볼 때 위의 사실은 무지막지 쪽팔리다. 해결방법은? 그냥 해당 사실을 삼국사기에 쓰지 않으면 된다. 참~~~ 쉽죠?~~잉~

이렇게 문제가 많은 역사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료와의 교차분석과 고고학 및 다양한 학과의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역사자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A라는 나라가 있었고, B라는 나라가 있었다 정도는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분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사료조차 쓰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소설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이미 근대에 작성되었다고 "확정"된 환단고기를 기반으로 온갖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이다. 본인 얼마 전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이병화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을 다운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대체 어떤 고대사 역사논문에 역사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그의 말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증거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 써 놓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야되나? 그냥 자신의 말이 진리다라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사료는 분명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사료조차 쓰지 않는 사이비들아.
................그만해라. 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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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본인의 주변이 역사학도들이다보니 공자가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없다. 그런데...본인과 친하지는 않지만, 알기는 아는 한 사람이 이런 바보였다. 더 문제는 그 사람의 선배가 선진사(공자가 살던 시대) 전공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은 대체 멀까?

덧2 : 여전히 논문주제발표 준비중.....핵심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욕심에 나를 맡기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료를 읽다가 제일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만약 이것이 자주 나오지 않는다면, 본인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븅신~ 화가 난다고 병이 되서 죽냐? 물론 화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자존심 만빵의 인간들.
자존심을 무지막지 가지고 있어서, 그 자존심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화병을 일으키는 경우.
쉽게 말해서 진짜로 화병때문에 죽은 경우.

2) 다른 죽음의 이유가 있는데, 필법으로 화병이라고 하는 경우.
이 경우라면 조금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혹시 어떤 필법에서는 화병이 어떤 다른 상황을 상징하는지 아시는가? 본인도 모르겠다. 끙..

...이것도 잘 쓰면 논문 되겠는걸?;;
........최근 자신이 바보같음에 미치고 환장하는 바보였습니다. -_-


+ 홧병이 아니고, 화병이란다. 왜냐하면 火病이라는 한자음에서 온 것이라서, 아래쪽에 홧이라고 붙이지 않고, 그냥 화병이다. 우리는 짜장면이라고 말하는데, 자장면으로 표준철자법이 규정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해도 무방할듯 하다.
역사학은 학문이다. 학문은 순수해야된다. 하지만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순수한 학문으로만 남는 것은 그리 쉽지않다. 그리고 최근 한국 사학계의 어떤 상처가 터져나왔다.

서동요라고 기억하시는가? 백제의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하려고 노래를 퍼트렸다는 이야기이다. 서동은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된다. 이런 내용들은 삼국유사에 기록이 되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서동요가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 발굴된 [역사-歷史/史料] - 백제 무왕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및 해석 에 따르면, 본래 선화공주가 만들어졌다고 말해지는 미륵사지가 실제로는 무왕(武王)의 정비인 사택(沙宅)씨의 발원으로 시작되었다고 완벽하게 부정이 된다. 그럼 이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어떻게 반응을 하였을까?

최대한 선화공주와 끝까지 연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냐고? 돈이다.
서동요제라는 지방축제는 물론이고, 관련 논문이나 서적 및 유물집들의 출판이 사실상 연기나 취소되었고,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좁고 좁은 한국쪽 정보망으로도 몇 개나 이런 사태가 포착이 되니, 실질적으로는 상당히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미륵사지는 여러 사람이 만들었다는 논리(분리건출설)로, 서탑은 사택씨가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곳은 선화공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하거나.... 물론 그들의 말이 아주 말이 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삼국유사와 실제 백제인들의 유물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을 믿어야될 것이냐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실지 궁금할 뿐이다.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는 해당 시대 사람이 쓴 글이다. 그것을 1차 사료라고 한다. 물론 1차 사료도 그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이는 여기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최근 불교사상사 전공인 동국대 김상현(金相鉉.62) 교수가 사학계에 찌질대지 말라고 강력하게 비판을 하였다. 개인적으로 김상현 교수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본인 이 이야기를 쓸까 말까 하다가 모자란 지식으로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아직 한국의 사학계의 희망이 있구나라는 생각에서였다.

돈? 중요하다. 현실?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실히 고민해보아야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추가 : 설화라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설화는 역사사실과는 다른 그만의 가치가 있다. 설화가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이 가치가 없다는 것과 같다. 단! 해당 일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어디까지나 설화이라는 것이다.

서동요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상당한 예술적 문학적 가치가 있다. 어떤 학자분이 말씀하신 : "그래도 선화공주를 버리기는 아깝다"라는 것은 설화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동이며, 역사학의 기본정신조차 위반하는 행동인 것이다.



한 중 일의 해양인식과 해금 - 4점
이문기 외 지음/동북아역사재단


일단 해당 책은 작가들 스스로도 책머리를 통하여서 말하였지만, 상당히 실망스럽다는 말을 우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한국학계에서 아직 해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연구성과 역시 거의 없다고 막말을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황폐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시각에서 보면, 북방으로 "요동"과 남방으로 "동아시아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교류와 교역이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 북방의 "요동"은 한족의 중국과 몽골-만주 그리고 한반도등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공간이었다. 한편 남방의 "동아시아해"에서는 중국-일본-유구-동남아시아 제국과 한국이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16세기 이후에는 포르투칼-스페인 등 유럽 각국이 참여하면서 세계사적으로 비중이 높은 교류의 공간이 되었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새삼스럽게 북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도 집중되고 있지만,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인 "동아시아해"에 대한 사회적-학문적 관심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하짐나 북방의 요동과 남방의 동아시해, 즉 대륙과 해양에서 전개된 교류의 역사를 정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전체상을 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한중일의 해양인식과 해금 P9~10


몇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에 대해서 말해보면, 한국에서 해양사쪽으로 본인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 "윤명철"교수님인데, 정작 이 분이 이 책의 필자 명단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이해할 수 없다. 집필자 명단이 모두 경북대교수로만 이루어진 점도 같은 이유로 심히 곤혹스럽다. 이러한 새로운 키워드에 대한 토론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범위와 폭을 가지고 진행되어야되는데, 어디까지나 경북대 자체내에서만으로 정리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책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필진명단의 선정이나 심사부분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책머리에

1 9세기 신라의 해양을 통한 국제교류와 통제 / 이문기
1. 머리말
2. 9세기 신라의 국제교류 활성화의 시대적 배경
3. 해양을 통한 국제교류의 제 양상
4. 맺음말

2 고려시대의 대외교섭과 해방 / 장동익
1. 머리말
2. 중원과의 교섭과 황해. 동중국해
3. 일본과의 교섭과 남해. 동해
4. 고려시대의 해방
5. 맺음말

3 조선 후기 해금정책의 내용과 성격 / 우인수
1. 머리말
2.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해금
3. 해금의 실제와 해금정책
4. 해금의 성격과 변화
5. 맺음말

4 청조 해금정책의 성격 / 홍성구
1. 머리말
2. 송 이후 해양통제정책의 추이
3. 청 초 해금의 목적
4. 강희 23년 이후 해금의 목적
5. 해금정책을 둘러싼 논쟁
6. 맺음말

5 '진사'와 '위사' - 무로마치 막부의 정권체제와 조선왕조의 통교 통제 / 이에나가 쥰지
1. 머리말 : 조선왕조의 통교 질서와 '위사' 문제
2. '진정한 막부사절'의 주변사정
3. '위사' 파견에 있어서 중앙정계와 해협역 지역세력의 연관
4. 맺음말

벼락치가 완료했습니다. 원래 계획보다 2시간이나 늦어졌군요. 마지막에 "충주"녀석이 말썽을 피우는 바람에...-_-+ 정확하게 2시간내내 충주녀석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후..이로서 이번 학기 레포트 완료했습니다. 완벽한 벼락치기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이넘의 벼락치기는 정말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본문 딸랑 4500자. (주석이 1500자....후..) 이따구를 레폿이라고 내고 있어야되다니...물론 학술적인 창조성은 나름 있습니다. 아무도 연구해본적이 없는 곳을 건드렸으니까요. (그래서 몇 배나 힘들었습니다. 젠장..ㅠㅠ) 저도 나름 변명할 거리는 있습니다. 정말 이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서, 자료부터 혼자 알아서 씩씩하게 해야되었습니다. 나름 보람은 있었지만.....단순한 기말레포트 하겠다고 대략 5만자의 고문과 놀았던 전 멀까요? ㅠㅠ 아..레포트 쓸 때, 그 고문중에서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써서 그렇지..젠장...레포트 뒤에 묘비명이라도 가져다 붙일까..ㅠㅠ


내용은 대충 순흥 안씨, 태원 안씨, 충주 강씨, 충주 석씨가 소그드인임을 고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논리 구멍이 몇 군데 보이기도 하지만 대충 비스무리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안씨나 강(康)씨는 거의 90% 소그드라고 보면 됩니다. -_-;; 사료부족으로 인하여 광주안씨는 정확한 고증을 할 수 없었지만...솔직히 90% 소그드임이 확실합니다.

소그드가 머냐면...보통 서역의 상인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대륙도 그렇고 한반도도 그렇고, 무관이나 문관으로 등극한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제가 볼때 이건 유가 사상에 입각한 동양의 사학이 일부러 상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국의 안씨와 강씨는 이 서역에서 온 상인들의 후손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음;;;

어쩌다가 살짝 살짝 안씨분들하고 강씨분들의 조상관련 덧글들을 봤는데, 순수 한국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특히 어디서 감히 중국에서 왔다고 묻냐고 하는 덧글이 있었는데...죄송합니다. 중국도 아니고-_-;; 서역에서 왔습니다;;; 태원안씨의 경우는 빼도 박도 못하는 100%라고 생각되는군요. 이건 고증할 필요도 사실 없었습니다. "원나라때 중국태원에서 왔다"라는 사실로 사실상 게임 오버! 왜냐면 당시의 태원은 소그드인들의 집단거주지였다는 연구결과는 이미 쌓여있고~ 이쪽 계열에서는 그냥 상식처럼 되어가고 있고~~

피곤하군요. 오랜만에 밤샘했습니다. 어?? 제 생활은 원래 밤낮이 바뀌지 않았냐고요? 죄송합니다. 나름 다시 아침형..아니 새벽형 인간이 되었었는데..ㅠㅠ 이번 한방으로 주르륵 날라가버렸군요. 만쉐!! -_-;;;

이제 슬슬 준비하고 프린트 해서 선생님 편지함에 쳐박아놓고...자야겠습니다. 음하하하..ㅠㅠ 그나저나....다음 레포트에서는 본문보다 긴 주석을 시도해볼까나...-_-;; 주석주석~~ 헤롱헤롱~

그럼 잠에 취한 바로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휭휭휭~~~~
이제 한국갈 준비를 해야겠네요. 므흐흐흐흐흐....

레포트 하다가 그냥 심심해서 천추태후를 거론해 본다. 참고 서적도 없고, 그냥 레포트 쓰다가 정신을 좀 놓으려고 쓰는 것이니 막나갑니다. -_-

1. 거란은 바보가 아냐 -_-;;; 동물을 앞세워서 침략을 하다니??
본인이 무식해서 거란이 맹수들을 앞세워서 공격했다는 것은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스페샬 보고서 이 부분에서 푸욱! 하고 뿜어버렸다. 나름 잘 나가다가 이런건 좀....자제요. 뒤쪽에 보면 유가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찌 생각하는 것은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유가의 색체일까나...북방기마민족은 그냥 다 야만인?! -0-;;

2. 외교의 천재 서희라...거란을 바보로 보나?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말로만 상대를 농락하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가? 거란이 바보도 아니고-_-;; 나름 송나라와의 외교에서 雲十六州 냠냠 먹은 거란이란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정신의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이라는 책이다. 심심하면 한번 보도록...(머..이 책을 보면 서희는 외교의 천재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내정의 천재일지도-0-)

간단하게 말해서, 해당 조약으로 인하여 고려는 요동은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성종이 조약을 맺지 않고 그냥 물러나려고 한 것은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아예 모든 조약을 맺지 않음으로서 다시 수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도 해석을 해볼 수 있건만-0-

3. 유학자들이 역사를 쓴것이 맞긴 하다만...
그 부분은 분명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부분이다. 역사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유가의 영향이 강력하고, 집필진이 유가계열이니 당연히 정치에서 배제되었을 유학자들이 왜곡 시켰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가이기에 사실을 과장할 수도 있지만, 아예 없는 사실을 집어 넣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야되지 않을까나?

그리고 유가들은 기본적으로 호국사상이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중국" 이외의 다른 민족이나 문명은 다 야만인으로 보고, 본인이 알기로 태조(왕건)의 정치적 배경은 불교세력과 호족무장세력이고, 유가들은 그리 배려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추태후가 태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라....음....머.

4. 그냥 "천추태후"로만 해서 나온 사료중 일부...
千秋太后皇甫氏,逼大良院君詢,爲僧,初洞州人金致陽,太后外族,性姦巧,嘗詐祝髮,出入千秋宮,頗有醜聲,成宗,杖配遠地,成宗,薨,召授閤門通事舍人,不數年, 貴寵無比,百官予奪,皆出其手,親黨布列,勢傾中外,起第至三百餘間,臺榭園池,窮極美麗,日夜與太后遊戲,無所畏忌,洞州立祠,額曰星宿寺,又於宮城西 北隅,立十王寺,其圖像,奇怪難狀,潛懷異志,以求陰助,凡器皿,皆銘其意,其鍾銘曰,當生東國之時,同修善種,後往西方之日,共證菩提,王,常欲黜之, 恐傷母志,不敢也,至是,太后生子,是私致陽所生也,與致陽,謀爲王後,忌大良君,强令出家,大良君,時年十二,後,寓居三角山神穴寺,太后潛遣人,謀害 者屢矣,寺有老僧,穴地室中,匿之,而上置臥榻,以防不測。

-- 高麗史節要 卷之 穆宗宣讓大王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예전에 동주(洞州 황해 서흥군(瑞興郡)) 사람 김치양(金致陽)은 태후의 외족(外族)으로 성품이 간교하였다.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라 하면서 남들을 속이고 천추태후의 궁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성종이 장형(杖刑)을 내리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성종이 훙하자 왕이 그를 불러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하여, 몇 년 되기도 전에 귀하고 총애를 받는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백관에게 벼슬을 주고 빼앗는 일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늘어서서 세력이 조야에 떨쳤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칸이나 되며, 누대와 정자ㆍ동산과 못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밤낮으로 태후와 놀고 희롱하여 아무런 두려움이나 꺼림이 없었다. 동주(洞州)에 절[祠]을 세워 이름을 성수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의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그림의 형상이 기괴하여 형용하기 어려웠다. 몰래 딴 뜻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여 모든 기명(器皿)에 그 뜻을 새겼다. 그 종(鐘)에 새기기를, “동국(東國)에 태어난 당세에는 태후와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서방(西方 극락세계)으로 가는 뒷날에는 태후와 함께 보리(菩提)를 증(證) 하리라." 하였다. 왕이 항상 이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태후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치양과 관계하여 낳은 아이였다. 태후는 치양과 모의하여 왕의 후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대량군(大良君)을 꺼려서 강제로 그를 출가하게 하니 대량군이 이때 나이 12세였다. 후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였는데, 태후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절의 늙은 중이 방 가운데를 파서 지하실을 만들어 대량군을 숨기고는 그 위에 침상을 놓아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막았다.

○辛未,王,疾篤,召太子欽,屬以後事,俄而薨于重光殿,上諡元文,廟號顯宗,太子,卽位,居翼室,朝夕哀臨。
史臣崔冲,曰,傳稱天將興之,誰能廢之,千秋太后,自縱淫荒,潛圖傾奪,穆宗,知百姓之屬望,排千秋之惡黨,遠馳使命,以授神器,俾固本支,所謂天之將興,誰能廢之者,詎不信歟,然,以姨母貽孼,戎臣構逆,强隣伺釁,京闕俱燼,乘輿播遷,艱否極矣,反正之後,和戎結好,偃革修文,薄賦輕徭,登崇俊良,修政公平,內外底寧,農桑屢稔,可謂中興之主矣。
李齊賢曰,崔冲之言,世所謂命也,勾踐,嘗膽,雪恥會稽,小白,忘莒,遺患於齊,人君,恃有天命,縱欲敗度,雖得之,必失之,是故,君子,理思亂,安思危,愼終如始,以對天休,如顯宗,所謂吾無間然者乎。
甲戌,王,率群臣成服,百姓,玄冠素服。

-- 高麗史節要 卷之三  顯宗元文大王

신미일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태자 흠(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조금 후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하였다. 시호를 원문(元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 하리오.' 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 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중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소백(小白)은 거(莒)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환(禍患)을 제(齊) 나라에 남기었다. 왕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방종히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질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워질까 생각하여,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천명에 보답하니, 현종과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신라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긴 여진족이 그들의 원류를 찾고자, 중국의 역대 사서와 서적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뽑아서 유목민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수록한 책이다. 1,777년 청(淸)의 건륭제의 지시에 의해 43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부족ㆍ강역ㆍ산천ㆍ국속(國俗)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편찬된 책이기에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서이자 문화사적 서적이라 볼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비중 있게 인용한 뒤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접하고 넘어가야 할 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다른 각도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민족과 같은 계열인 여진족의 청(淸)이 그들의 시각을 담아 고증하여 편찬했다는 점과 중국의 정통사서가 중국을 중심축으로 만주를 분절시켜 기술한 데 반해 만주가 중심이 되어 각 시대별로 사건 기사가 집대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중에서


본인 아직 이 책을 보지는 못했다. 원문으로는 몇 번 접해봤지만, 국역버젼은 그 동안 한국에 들어가지 못해서 접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설명만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고....개인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만주원류고는 중국에서조차(서양학계도 그렇고) 자신들의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역사서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주를 강조한 것은 당시에 한족에게 점차 융화되어가는 만주족을 위해서였고, 이로서 탄생된 만주족은 단순히 여진족뿐만이 아니라, 몽고족,한족, 조선족등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게 된다.

...머...그냥 간단하게 말해서...(모든 역사서가 그게그거 이지만) 아주 분명한 목적하에 작성된 글이라는 것이다. 관방사학의 극치라는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특히 환빠들의) 입맛에 맞는다고 좋다고 하는건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真明行님이 재미있는 글을 올리셨더군요. 김구가 어떻게 테러리스트라며 뉴라이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만 문제가 있군요. 김구는 당연히 테러리스트이기도 하며,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사람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생각해야될 듯 합니다. (물론 다른분이 덧글로 비슷한 지적을 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풍자라고 하셨지만...으음...이 문제가 단순히 풍자로 끝나야되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구심이 드는군요.)

민족주의적으로 보았을 때에, 현재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김구은 당연히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민족독립을 위해서 노력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위대한 민족독립의 영웅이라고 하는 간디와 비교해 보면 김구의 방법론은 분명히 "요인 암살"등을 통한 적극적인 독립기획이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테러라고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시 조선은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요? 탈레반도 그렇습니다. 당시 조선은 정식으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요인 암살 행위는 테러가 아닌 전쟁행위라고요? 탈레반도 그렇습니다. 왠지 거부감이 팍팍 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김구의 행동과 탈레반과의 차이점이 별로 없습니다.(물론 국제정세나 시대상황 및 기타 제반사항이 다름으로 인한 차이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 방법론)


여기서 인도할 수 있는 의문은 :
1- 민족독립이라는 이름으로 폭력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느냐? 정당화 한다면 우리는 티벳을 지지하는 것만큼이나 탈레반과 신장위구르를 지지해야될 것이다. 정당화되지 못 한다면 김구의 방법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반성이 있어야될 것으로 본다. 이상론이라고? 분명히 그렇다. 본인 진정한 세계 사회주의를 꿈꾸니까 말이다. 물론 이것이 단지 이상향이고 이상일 뿐이라는 것도 인식하고는 있다. (그래서 한숨이 나오지만 말이다-_-;;)

2- 한국에서는 한국만의 역사만을 서술해야되는가? 김구를 한국만이 아닌 일본, 그리고 세계적인 눈으로 보아야될 때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체계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를 민족독립의 영웅으로 생각해야된다. 웃기는 것은 국가체계중에서 지배계층의 이력은 대부분이 민족독립이 아닌 일제시대에 김구와 반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기에 김구를 깍아 내리려 한다. 위의 질문은 사실 두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고 한가지로 통한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역사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나? 이 다른 입장의 주장을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3- 동아시아 역사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혹은 균형잡힌 세계 역사는 가능한가? 사실 이 질문은 2번 질문의 또 다른 반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중일 모두가 강력한 국사체계를 가지고 있고, 각자의 공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통합교과서 같은 일이 가능할 것인가? 하다 못해서 한국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역사관으로 (개인적으로 역사관이 아니고 그 분들이 하는것은 역사라고 하기도 머한 찌질이짓이지만...일단-_) 싸우고 있는데 말이다. 흐음...

어차피 모든 관점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런 논란을 통해서 김구가 테러리스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살펴보고 현재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1) 혹시 절 뉴라이트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전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자이랍니다. 뉴라이트와 기본 베이스가 좀 많이 다르다고 생각되는군요.

2) 저 개인적으로는 김구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신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감상일뿐, 역사적인 평가는 그것과는 다르게 이루어져야될 것으로 생각되며, 김구선생님의 공격적인 성향은 당시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간디와 같은 평화주의적 방식이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추가 :
혼자사 잡담형식으로 한 것인데 의외로 덧글이 많이 달려버렸군요. 저 혼자의 잡담이어서 뛰어넘은 지점들을 종합적으로 추가사항에 정리를 하고, 그 다음에 각각 분들의 덧글에 대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테러리즘의 정의문제
테러리즘(Terrorism, 문화어: 테로)은 일반적으로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의 수단을 통해 민간인이나 비무장의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사망 혹은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함으로서 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중단하게끔 강요하는 행위이다. 이런 테러행위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념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민간인이나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가치 판단을 내리며 그 자신 혹은 자신들의 동조자들의 생명또한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요인의 암살과 같은 폭력적 행위로 인한 직접적 효과 보다 이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대중의 공포심을 더 큰 효과로 보며 이러한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위키백과)

악트님도 밝혔다 싶이 " 프랑스레지스탕스, 한국독립군과 같은 전쟁시의 민간 혹은 조직적 저항단체에 의한 침략군에 대한 무력저항운동의 경우 이러한 테러리즘의 범주에 속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크다."라고 할 수 있다. 악트님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테러리스트라고 안하니 김구와 같은 광복군도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박을 하시는데, 이는 논리적 오류로 보인다.

테러리즘의 정의 문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일방만이 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반면, 다른 일방은 해당 사건이 전쟁이 아닌 행위라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민간인의 희생은 전쟁수행시에도 충분히 발생하는 결과이다. 단지 현대사회로 올 수록 민간인의 비율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을 뿐이라는게 보다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생각된다. 직접적으로 이야기 해서 일본은 당시 한국과의 독립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독일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독일이 정식 군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 처럼, 테러리즘으로 정의될 수 있는 문제가 언제나 상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본인이 익숙한, 신장의 이야기를 거론하면, 실제로 신장은 중국에 의하여 탈레반과도 연결이 되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장은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흔히 말하는 요인암살을 시행하고 있고, 그 와중에 민간이 피해자도 일정정도 나오고 있다. 이미 신장의 독립운동가들은 지금의 상황을 전쟁상태로 인식하고 행동하고 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상태가 아닌 잘해봐야 지방소요일 뿐이고, 이로 인하여 테러리즘으로 정의될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고로, 김구의 행동이 방어적이냐 아니냐? 혹은 요인암살이냐 아니면 민간인 대상이냐를 떠나서 테러리즘으로 정의될 공간이 있는 것이다.


2) 어디까지가 무고한 "일반인"인가?
아래 어느 분의 덧글에도 보이듯이, 탈레반은 악독한 테러리즘이고, 김구의 행동은 위대한 민족독립운동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폭력의 방향이 "무고한 민간인"이냐 아니냐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1- 테러리즘이나 전쟁이나 그 본질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그리고 테러리즘이 폭력의 방향이 요인암살이든 민간인이든간에 폭력이라는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의 고리일 뿐이다. 민족독립운동이라는 포장지로 말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폭력이다. 물론 일제시대의 침략행동도 어디까지나 폭력행위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저지리는 실수가 개인 연쇄살인범의 폭력과 전쟁행위에서의 군인의 폭력을 동일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둘이 폭력행위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국가나 일정한 공동체가 해당 폭력행위을 적법성 혹은 적합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의" "민족" "국가" 등으로 포장할 뿐이다.

우리는 분명히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쁜 일"이라고 분명히 배웠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흔히 "국가" 혹은 "공동체"를 위하여라는 말로서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거 자체가 코메디 아닌가?


2- 과연 무고한 일반인이 있을까?
무고한 일반인이라는 것이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모든 폭력행동을 반대한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탈레반이 악독한 이유는 무고한 일반일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분들이 계신다. 본인 이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과연 무고한가?

그들은 미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미국의 세계에 대한 폭력을 암묵적인 동의 혹은 적극적인 동의로 묵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얻어진 이익물을 많던 적던 향유받고 있었다. 과연 무고한가? 물론 이것은 본인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이다. 또한 요인암살은 당연히 허락되는데, 요인은 공인이라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가? 예를 들어서 이등박문은 당시 민족운동가그룹에 있어서는 죽여야 되는 요인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부흥을 이끈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등박문은 스스로의 이상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 뿐인데, 그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위에서 말했다 싶이 이에 대해서는 본인도 완벽히 정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쉽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운운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3) 그러니까 본인이 말하고 싶었던것은 -_-
당시에 모든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침묵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구성되었고, 그 국사체계에서는 자국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을 부각시키고 영웅으로 만들고, 당시에 일본제국에 충성하던 사람들을 친일파로 정의하고 규탄을 하는데(머..그렇다고 제대로 정리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는 국가적인 입장에서보면 당연한 행동이다.

문제는 국가라는 차원을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느냐라는 의문이다. 본인이 원래글이나 추가 글에서도 계속 제기하는 의문과 고민은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국가체계를 넘어서는 역사서술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4) 그래서 뉴라이트가 잘했다고?
사실 그들에 대한 판단은 아예 하고 싶지 않다.하지만 그것 자체도 하나의 역사관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역사관은 국사체계에 합리적인 역사체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사체계를 뛰어넘으려는 역사체계도 아니고....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 하기 위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역사관이 각자의 동등한 가치가 있겠지만....기본적인 논리구조가 모순된 이 생각을 역사관이라고 가정해야되는지자체가 의문이다.


5) 왜 김구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는가?!
본문글을 잘 보면 아래쪽에 개인적인 감상을 밝힐 때에는 "김구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칭호자체가 개인적인 감상이 포함되는 일이기에, 역사에 관한 내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쓸 때에는 해당 용어를 빼려고 노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서 말하고 싶었던 문제가 조금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중국에서는 모택동 주석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모택동이라고 말한다.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칭호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본인은 어떻게 하면 이런 칭호들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최대한 융합 시킬 수 있느냐라는 의문으로 본문을 쓴 것인데, 자꾸 화제가 "김구가 테러리스트냐? 아니냐로 간다-_"


감기 걸려서 헤롱헤롱하면서 추가사항을 완성하니 쓰러질 거 같군요....지금 위에다가도 머라고 썼는지 제대로 기억이 안나고 있습니다. ㅠㅠ덧글에 대한 각각의 대답은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흑...ㅠㅠ (혹자는 저보고 파워블로거면서 왜 그렇게 사람들의 덧글을 보면 무조건 대답을 하냐고 하는데-_-;; 전 일단 파워블로거도 아니고, 원래 블로그의 목적이 제 잡상을 저장해두는 것과 다른 생각과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요즘 소통은 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추가 2 :
헤롱헤롱하면서 굳이 답글을 다 달아버렸군요. 후..ㅠㅠ
그런데 트랙백 온것에 대해서는 제가 중국에 있어서 RSS로는 긁어서 봤습니다만....정작 트랙백주소를 알 수가 없군요. 하하하;;; 삐질;;;; 괜찮으시면 덧글로 트랙백 주소 좀 남겨주실 수 없을지.ㅠㅠ


본 글은 윤휘탁(한경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의 "‘以古爲今’:중국의 민족문제와 중화민족 국가관"; 동북아역사논총 21호을 보고서 적은 간단한 잡상이다. 해당 글은 동북아시아역사 재단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해당 글의 전체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이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교육과 역사연구의 큰 방향은 해당 논문에서 지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특히 교과서 부분은 이미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오고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점도 충분히 고려가 되어야되야된다고 본다. 실제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정부에서 말하는 연구 방향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한 강도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 단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외국 학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 국내학자들만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중국정부에서 말하는 역사관을 비판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는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정부의 이러한 방향설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원일체의 중화민족’과‘통일적 다민족 국가’ 인 중국은 불가분의 유기적 관계라든지, 애국주의가 중화민족 정신의 핵심이라는말속에서는,‘ 민족=조국’을혼연일체로인식하여조국인중국을 사랑해야 한다느니, 혹은 다원일체가 된 중화민족은 일치단결하여 통일적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발전에 매진해야 한다느니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 차원의 강렬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민족’·‘조국’·‘변강(즉 영토)’이 일체로 파악되고 있고, 민족관념5)과 국가관념(혹은 애국심)·영토관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 "‘以古爲今’:중국의 민족문제와 중화민족 국가관" 중에서...

본문의 글에 대해서 본인도 분명히 동의한다. 문제는 해당 문제가 과연 중국에만 있느냐는 것이다. 단어 몇개만 바꾸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윤휘탁교수님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무엇이라 하기는 힘들다. 단지 단순히 중국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한국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왠지 이상해 보이지만, 지금의 한국의 현실적인 상황은 중국의 역사관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국가가 나서서 역사의 방향을 정한다던가 국가에 대한 강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알기로 현재 한국의 다문화 가정은 전체의 10%에 다다르고 있다. 주위의 10명중에 한명이 외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연관이 되어있는 형편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한국이 유지해오던 단일민족이니 순수민족이니 하는 관념은 파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민족 국가개념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북경대에서 민족사를 공부한다고 하면, 그것도 첨여하게 대립하고 있는 위진남북조부터 몽고까지 내려오는 시대의 북방소수민족사를 공부하면 가장 쉽게 받는 질문은 "중국의 패권주의적 생각에 매몰된 녀석이다"라던지 심하게 말하면 "중국만의 사학에 빠져있는 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사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교수님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지도교수는 분명히 무섭다.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상당히 싫어하신다. 국가주의도 싫어하신다. 당연히 본인은 너무나 행복하다. 문제는 본인 능력이 떨어지는다는 점이겠지만....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뤄신(羅新) 베이징대 교수
이번에 한국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고구려와 동북아관계사가 전공인 탓에 근대 이후의 지식은 부족하다. 처음에 전공을 정할 때 주위 학자들이 중국의 북방문제를 다룰 때 한국과관계있는 부분은 연구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나 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 학자는진리만 다룰 뿐이다. 나의 역사인식에도 중국은 없다. 민족이라는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모든 역사에 나오는 민족은모두 ‘정치체’다. 모두 정치구조이자 이익집단이다. 민족관계를 다루면서 낭만적인 관계를 도출해내기는 어렵다. 핵심은 진상을밝히는 것이다. 진상을 밝혀야 문제가 해결된다.

“실사구시와 역지사지 태도로 인식의 간극 메워야”

본인은 정말 불민한 제자이기는 하다. 본인 먹고 살기 위해서 알바하겠다고, 선생님이 한국왔는데 중국으로 몰래 날라와서 알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무지막지 혼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_-;;; 에휴..나도 이쁨 받는 제자가 되어야될터인데 말이다. 이건 애물단지이니....




참고로 임지현 교수는 요동사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요동사도 변경사주장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중세에 형성된 상황을 그대로 고대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즉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한 문화권이었음에도 이를 억지로 분류해, '요동과 한국은 미분화상태였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하거나6세기에 형성되 대신라 이후 많이 쓰기기 시작한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말로서의 삼한)'이란 단어가 고대 삼한시대에서 부터 형성된것 처럼 착각하거나.고구려 이전과 이후에 상황이 너무 다른 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 '요동의 미약한 문화적 정체성은 한중문화교류에서 차지하는 요동의 역할을 도관이나 통로의 그것에 머무르게 했다'(요동사 p. 615)는 말을 하는등 중세에 형성된 시각을 그대로 고대에 투영해버렸다.

역사문의 밸틴님의 글 중에서...http://cafe.daum.net/alhc

본인 실력이 매우 떨어져서 당 카페같은 곳에서 감히 토론 같은 것을 못하고, 이렇게 뒷구멍에서 중얼중얼해보련다. 이렇게 조용한 변경의 글이 퍼질리도 없고 말이다^^

일단 본인도 요동사라는 개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 만연해 있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로서 주입된 국사개념의 고구려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냉철한 역사적 의미로의 전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김한규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동사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의 개념이고 아직은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으며, 현실적인 정치와 외교 논리에서 무시당할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밸틴님이 지적하신 문제를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억측과 가정 속에서 요동사를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쟁을 할때 지양하여야 할 방법이지만!! 반문을 해보자면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한 "문화권"이었다는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문화권이었다는 개념은 말 그대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개개인의 정의에 따라서 얼마던지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다. 기존의 국사에서야 "민족"이라는 허황되고 개념적일수밖에 없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서 이야기 했다. 이것도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요동사를 비판하는 그 방법 그대로라면 역시나 비판받아야 되는 방법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한국호랑이라는 분이 임지현씨의 인터뷰를 올리고 이런 덧글을 달았군요. "임지현교수 인터뷰 내용입니다 한번 만나면 물어보고 싶군요 1000년전에 삼국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보았는데 1000년후의 당신이 갑자기 1980년대생긴 변경사라는 개념을 적용하는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는지요" 해당 인터뷰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그럼 제대로 개념이 형성된지가 300년도 안된다고 할 수 있고,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100년도 안된 "민족"이라는 잣대로 마음대로 모.든. 과거를 재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비꼬는 듯한 반문이지만....무엇보다 1000년. 아니 훨씬 전의 중국 사서들은 천하를 모두 중국의 아래로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현대사이기에 현대 개념을 적용시킬 수도 있습니다. 단지 그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고, 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당 글은.....예전에 쓰다가 중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남겨둔 것인데.....으음...그냥 공개해버리겠습니다. 갑자기 완성하기 싫어진 글이라고 할까요? 사실 이런글은 공개하면 안되겠지만....


아래 글은 http://www.cyworld.com/hrieu/1423985 의 일부분입니다.

     ★ 나는 이 문제는 중국의 자만심이 없어지지 않는한 계속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 실마리의 첫번째는 바로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 래서 난 중국에게 바란다. 더이상 역사 왜곡을 하지 말라고. 자신들의 역사만 최고인듯한 착각 좀 하지 말라고. 오랫동안 현 중국의 땅의 절반 이상이 북방민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크게 중국은 몽골족과 여진족, 일본인에게 식민지 시대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여진족은 고구려, 발해의 후손으로 고려, 조선과 형제국이라 스스로 칭했던 민족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마치 모두가 자신들의 나라 안에서 일어난 일인듯, 자신들의 업적인듯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50개 대표 소수민족을 앞세워 우린 하나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 공산권의 정치적 필요의 의한 이유 때문이다. 이 와 관련, 한국인은 중국 시민들이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한국인은 중국인을 싫어 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여, 쓸데없이 서로 비방하는 것을 자제하는 지성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유를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또한 중국인에게 올바른 사실을 전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동안 중국인들이 온갖 전화 사기 등등의 일을 저지르거나, 여행간 한국인만 골라서 범행을 저지르고, 위장 결혼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등의 여러 안좋은 일들로 한국인에게 신뢰를 잃었다. 어찌 이런 것도 없이 무조건 어린아이처럼 한국의 잘못한 것만 끄집어 내며 미디어를 이용해 정치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혐한을 이끌어 내는가? 중국인들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 같이 좋아하는 척을 원하는가? 중국인은 한국인이 일본인처럼 간사하게 그러지 못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과거사 관련하여 중국은 한국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고, 같이 대응해야 할 부분도 있다.

     이제 한국 역사학자에게 바란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역사가 왜곡되어지고 있다. 일본에 의한 것은 말안해도 잘 알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역사학자들은 더욱 분발해야 하고, 더욱 연구하고 세계와 교류하고 알려야 한다. 각 나라에서 직접 역사학 교수가 되고, 논문도 내고, 책도 많이 써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논리와 정의와 사실을 기반으로 서방에게 또는 역으로 중국, 일본에게 참 사실을 뿌리내리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더이상 세계 각국 역사책에서 한국사는 뺀채 중국, 일본만 가르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현재, 서점 역사 관련 책에서 대부분 한국은 빠져있음)

 1. 일본의 역사왜곡 증거    http://www.cyworld.com/hrieu/154978

2. 중국의 역사왜곡 증거 (지은이는 중국인이 아니지만, 현재 서방권에 얼마나 역사 왜곡이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줌)    http://www.cyworld.com/hrieu/199913


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이 글에  무려 로그인까지 해가면서 덧글을 적었는데 삭제인지 없어졌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중얼거려 봅니다. 일단 역사 학자는 아니지만 역사 학도로서 이 말부터 꼭 하고 싶다.


-- 역사학도 --
"돈만 제대로 주셔요. 그럼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본인 석박사를 마치고도 제대로 된 자리를 잡지 못하여 많은 지식을 그냥 날려버리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다. 이유는 하나다. 돈이 안되니 투자를 안해준다. 역사는 어치피 무시당한다. 돈도 안된다고 한다. 현대 사회는 아무리 부정해도 자본주의 사회이다. 어떤 것이든 돈이 있어야 멀 제대로 하던지 말던지 한다. 악으로? 깡으로?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 아닌 사실에 대한 도전입니다." 님의 글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은 열심히 역사왜곡하고 있고 한국은 마치 가만히 당하는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영~~ 아니옵나이다. 한국도 중국과 일본에 상응하는 일정정도의 역사 왜곡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왜곡은 몇몇 정치적인 역사학자(혹은 관방사학자)같은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많은 역사학자와 역사학도들은 한중일이라는 국적을 넘어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한 끊임 없는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님의 글의 어투는 (저만의 느낌일수도 있겠지만) 역사학자들이 한국의 영광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소리같네요. 전 한명의 역사학도일뿐이지만, 한국을 영광만을 위해서 노력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 단지 "사실" 혹은 "진리"라고 불리는 것을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바른 길이라고 생각되는군요.


-- 블로거 --
제가 볼 때, 이 문제는 푸는 실마리는 중국과 일본의 사이의 재미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한국의 의식변화부터 시작되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약하다는 인식 (중국과 일본은 강하니까 전세계를 대상으로 열심히 한국을 짓누르고 있어 정도의 생각인데, 한국도 인구와 영토에 비해서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단지 중국과 일본이 강대국중에서도 초강대국에 가까운 것입니다)

남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은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남들이 역사왜곡하고 미디어에서 삽질하지만 한국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양쪽 미디어를 모두 접하는 본인으로서는 솔직히 양쪽 다 웃길 뿐이다. 그런데 마치 중국의 미디어만이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언급하고 있는 중국의 문제점이라는 것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에 왜곡이 들어있는가는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미디어의 성질은 어느 나라나 그게 그거다. -_-)

마지막으로 위글의 작가에게 바란다.

더이상 역사 왜곡을 하지 말라고. 한국의 역사만이 최고인듯한 착각 좀 하지 말라고. 현재 한국에서 자신의 땅이라고 말하는 고구려나 발해을 말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관일뿐이고, 그 역사관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의 유민의 실제 한반도 유입이나 발해의 지도층의 민족구성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단일민족" "한민족" 이라면 말하고 있지만,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치적으로 발생된 "허구의" "가상의"개념인 것이다.

한국에서 한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한국 정치 지도층들의 정치적인 필요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짜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 써놓고 보니...트랙백도 안되는구나. 후.....어차피 중얼중얼 마스터 베이션이니....후...아실분은 아시겠지만, 위의 글은 어디까지나 "덧글 삭제 당했다고 꿍시렁 거리는 한심한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



亦邻真 :《成吉思汗与蒙古民族共同体的形成》《亦邻真蒙古学文集》

 

1- 안에 나오는 많은 전문용어들이 지금은 쓰지 않는 소련쪽에서 유행한 학술 용어들이다.

2-

1) 마르크스를 증명하기 위해? : 새로운 분층의 도출

2) 초원의 역사가 그 독특한 배경제약을 벗어났다. ? (혈연적인 부분)

3) 민족의 형성이 현대적인 의미의 계급이 분화되는 요건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때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된다.

그는 몽고의 민족이 이때 형성했다고 말를 하는 것은,

몽고민족이 예전부터 존재했다는 논설에 대한 반박이다.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명대중후반에 이르러서야, 모두가 인정하는 몽고민족이 생겨났다.  칭기즈칸이 한 일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서로 다른 민족들을 정복이후에 분열-통합하여서 전혀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지금 현재 중앙아시아의 질서는 칭기즈칸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기존에는 이러한 민족에 대한 분열-통합이 약하였고, 원래의 문화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신선생님은 피정복부족을 분열-통합한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물론 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계열의 몽고어와 투르크어의 관계 형성과 같은 것도 이러한 분열-통합의 와중에서 발생한 일이고, 기존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나 이후의 아랍화도 비슷한 과정속에서 발전한 것.

특히 이러한 정치체계가 있은 뒤에 민족체계가 만들어졌다는 소리이다.


칭기즈칸은 분열-통합의 주목적은 상대 민족에 대한 반란의 위험성보다는 재산분배에 가깝지 않았을까라고 선생님은 생각중이신듯 하다. 물론 반란예방과 재산분배의 의미가 모두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쪽의 비중이 높았냐는 것인데....흐음.........개인적으로 재산분배는 다른 식으로 진행 할 수 있겠지만, 반란은 다른 방식으로 막는 것이 매우 힘들지 않나? 물론 칭기즈칸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민족의 반란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전투 행적에서는 반항을 하는 자는 가차없이 "전멸"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데...음....모르겠다. 생각해봐야겠다.


김대중씨!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이러한 헛소리 찍찍 해댈 수 있는 분도 흔하지 않지요. 당신이라는 인간이 보수진영의 최고 논객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김대중 칼럼] '5000년' vs. '60년'
대한민국의 자존과 성장은 동북아 넘어 세계로 나간 덕
'우리 민족끼리'의 자폐성은 '中·日의 굴레'를 불러올 것
김대중·고문
더 자세한 내용은 : 클릭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한때 일본이 죽어라 외치던 소리.
"탈.아.입.구."

역사에서 배우라고? 이런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김대중씨 당신과는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갔기 때문에 마치 아시아가 언제나 열세이고 약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서구로 세계권력이 넘어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며 (대충 300년. 많이 잡아 500년) 그 전에 어느 곳이 세계를 움직였었나?

완곡은 있겠지만, 역사라는 것은 순환되는 것이고 세계권력은 점차 아시아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김대중씨는 한중일이 싸움박질에 아전투구만 할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그 반대로 서로 Win-Win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인가?

세계로 나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일을 버리고 미국만세를 외치는 것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 아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대주의의 구현일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정의 정책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과 황제의 관계는 언급했다. 이연은 황제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친 자매였고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동일인물이었다. 바로 북주(北周)의 독고신(独孤信)이다. 이연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4번째 딸이었다. 그리고 수양제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7번째 딸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작위를 승계하였는데, 이것은 최소한 그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보다 더 일찍 작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연이 고아가 된 이후로, 그의 이모인 독고황후는 그를 많이 아낀다. 수문제(隋文帝) 양견 (杨坚)도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황제와 황후 모두가 이연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입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수양제는 이연보다 2살이 어리다. 이연이 7살때 수양제는 5살이었다. 만약 황후이모가 자주 이연을 입궁시켰다면, 이연은 수양제와 어린시절부터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현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는 튼튼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살펴보면 이연은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그리 낙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연은 사촌인 황제를 경계했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이연도 좋고 수양제도 좋다. 모두가 관농집단(关陇集团)의 후손들이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모두가 알다 싶이 강력한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한마디로 무인집단이다. 그리고 무인들은 보통 준마를 사랑한다. 병적으로 사랑한다. 이연과 수양제도 당연히 준마를 사랑했다. 한번은 이연이 한필의 준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준마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연의 부인 두(窦)씨는 이연에게 조언을 한다. "황제도 준마를 사랑하는데, 당신이 이 말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황제는 당신의 관직을 깍아버릴 것입니다." 이연은 이 준마를 너무나 사랑해서, 부인의 조언을 계속 무시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묘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연의 관직이 오래동안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부인은 이미 작고한 이후였다. 그런에 이연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처럼, 준마를 수양제에게 바치는 것은 물론 황제를 위한 준마와 사냥개와 매등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곧장 효과를 봐서 그는 곧장 3품고급관에 올라가게 된다. 수당(隋唐)시대에는 3품이상이어야지 고급관원이었고 그 이하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이연은 이때 완전히 깨닭게 된다. 자신이 말을 바치지 않았으면 황제는 절대 그를 3품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번째 사건은 이연의 이미지때문이었다. 당시 점술가도 이연의 부귀를 점치엇다. <신당서 新唐书>에는 "3개의 유두가 있었다 体有三乳"라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신성한 상징으로 기록되어있다. 다만<수강가화 隋唐嘉话>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수양제는 자주 이연과 농담을 했다 "매번 조정회의에서 물어났때마다 양제는 그를 가지고 놀렸다 每朝谒退,炀帝皆有词谑" 정리하자면 이렇다. 황제는 자주 이연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촌형인 이연은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양제는 사람들 앞에서 이연을 놀렸다. 이연은 이연의 얼굴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연은 분노하고 원망하여 즐겁지 않았다 后因赐宴,炀帝于众因戏神尧。神尧高颜面皱,帝目为阿婆面,神尧恚(hui)不乐"이 둘은 매우 친했을까? 친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불평등하였다. 이연의 입장에서 그의 사촌동생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을 뿐이었다.

세번째 사건은 한번의 조정회의에서 벌어진다. 당시 이연은 병으로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수양제는 이연의 동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연의 생질(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외삼촌은 병이 났습니다." 그는 황제가 이연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양제가 관심을 가지는 방식은 매우 기묘했다. "병? 죽을것 같은가?" 이러한 어투는 분명히 이연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연은 훗날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더욱 더 황제를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탐관오리처럼 연기하며 황제를 안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쉽게 이연과 수양제는 비록 사촌지간이고 불알친구이지만 이연은 언제나 두려워했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였다. "

그렇다면 투르크에게 패배한 일에 대해서 황제의 처리를 기다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그는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태원에서 죽는 것은 비국중에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고? 왜냐하면 자신의 봉국의 원류인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영웅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비관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연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반란이나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야 한가닥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더 천하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돌발 사건

그리고 한번의 우연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사가 드라마같이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한번의 오해가 역사의 물길을 돌연 잡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북방은 투르크(突厥)이 침입해 왔다. 이연은 북부의 마이군(马邑郡)으로 병사를 파견하고, 당지의 태수 왕공인(王恭仁)과 힘을 합쳐서 투르크를 막아내려 한다. 이때 이연의 군대는 왕군아(王君雅)가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패배를 하고 투르크는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돌아가게 된다.

과연 이 전투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르크가 대체 얼마나 위대한 전과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주의한 것은 그러한 고증이 아니었다. 수군의 패배 처리는 역사의 새로운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전투의 책임은 누군가가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던 통치의 정석이다. 수양제의 조정은 더 큰 실패나 군인들의 책임감을 묻기를 위해서 당연히 일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법에조차 상벌을 철저히 할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연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일을 탐구할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 남겨져 있는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신당서 新唐书>의 <고조본기 高祖本纪>에 의하면 "양제가 관리을 파견하여 고조를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고조는 두려워했다." (炀帝遣使者执高祖诣江都,高祖大惧。)

<자치통감 资治通鉴> 에 따르면 수양제는 이연과 왕공인이 적을 막지 못함을 들어 관리를 파견하여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이연은 두려움에 떨었다."(帝以渊与王恭仁不能御寇,遣使者执诣江都,渊大惧。)

<대당창업기거주 大唐创业起居注> 에서는 수양제가 관리를 파견하엿고 "이연을 묶고 왕공인을 참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隋炀帝派使者前来,“系帝而斩仁恭。”)

비록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에서 전쟁실패의 책임자로서 이연이 조정의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최후의 처벌은 대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단 강도로 가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연은 강도로 압속되어 황제의 다음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연이 황제가 행할 처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이연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을까?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李大龙《汉唐藩属体制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06年
程尼娜 古代中国藩属体制的探索-读《汉唐藩属体制研究》 史学集刊2008年5月 第3期

 
武帝以前 :藩臣(闽越、东瓯类型的民族或民族政权)- 外臣(南越,朝鲜等政权)- 敌国(匈奴政权)

武帝后 : 郡县(对前期某些藩臣和外臣实行郡县统治的地区)- 属国(设置属国都尉的地区)- 特设机构(设置诸护某校尉,西域都护府地区)- 外臣(又作外围藩属,西汉匈奴、东汉南匈奴地区)

唐代 : 藩臣(初隶属边州都督府,后为羁縻府州) - 舅甥(吐蕃)- 敌国(唐初突厥)

藩属体制作为保护王朝核心地区(中原地区)的安全而出现的一个特殊的统治体制,它的发展、变化的根本原因在于中央王朝国力的强与弱。


程尼娜之想
敌国纳入藩属体制
郡县改为初郡
唐代划为 : 羁縻府州 - 藩臣- 舅甥 - 敌国



원본책을 좀 구해서 읽어보는게 좋을듯하다. 해당 내용은 청니나의 서평부분을 살짝 요약해 놓은것일뿐, 원문 글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민족사 연구에는 이러한 중앙-지방의 외교체계을 통한 분석도 있는데 그동안 이쪽으로는 조공책봉체계 이론만 대충보고 더 깊에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반성해야겠다. 끙...;;

주의깊게 볼 것은 "조공책봉체계"라고 부르던 "번속체계"라고 부르던, 이러한 제도의 유지는 중앙왕조의 국력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으로 지금을 보면 현재 중국의 국력이 일정이상 강하기에 티벳에 대한 강도높은 통치가 가능하지만 만약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면 이러한 변방의 공동체가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계속 중국의 국력이 유지된다면 티벳의 독립은 조금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이 이론으로는 지금 현재 티벳사태가 발생한 것이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예가 될수도 있다.

본인이 생각할때 해당 주장이 단지 중앙정부의 능력만을 생각하고 주변국가 혹은 민족 스스로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남흉노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여기서는 한나라의 국력 증가라는 요인도 있지만, 흉노 내부의 분열이라는 면도 작용을 하는데 이것을 일괄적으로 중앙왕조의 실력문제로 처리하는 것은, 혹은 중앙왕조의 실력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중앙정부의 능력에 따른 주변국가 혹은 민족들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것 같다. 음....근데 말은 쉽지-_-;;



오늘날 중국은 발해를 중국인들의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한국은 한국인들의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양측 모두 근대 독립국가의 개념으로 보는데, 이것은 19세기 유럽의 국가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개념은 여전히 현대의 유럽에 그 자체로는 영향력이 있지만 이미 시대에 뒤쳐진 것이다. 비록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대부분의 스위스인들이 같은 언어를 말하더라도, 그리고 한 세기를 비엔나로부터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한 같은 역사를 갖고 있더라도, 그 제국에는 체코인 또는 헝거리인을 포함되어있다. 한 언어, 한 민족, 한 국가라는 낡은 19세기의 개념은 새로 구성되는 발칸 혹은 붕괴된 소련 혹은 여전히 진행중인 티벳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특히 독일의 신성로마제국과 매우 비슷한 중국 같은 다인종국가에는 큰 문제이다.

(민족)국가(State)든 독립국가의 지위(Nationhood)이든 세기는 변해가고 있고, 현대의 사고를 고대의 시간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Parhae - A European view from afar(유럽의 관점으로 본 발해) J.Reckel(Univ. of Goettingen/Germany) , "중국 고대사 연구 - 어제와 오늘" 제 15차 국제역사교과서학술회의 중에서...

이런것을 올리면 서양학설에 매몰되었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고민해봐야겠다. 이런 개념문제는 역사학의 실제 운용해서 중요하지 않은듯 하면서, 중요하니 머리가 아프다....후...정답은 무엇일까? 혹은 정답은 없는게 아닐까?


해당 학회지에서 <중국 고대사 서술현황 고찰 - 하상주연대구축프로젝트의 기본내용을 중심으로> 조용준(청화대학 사학과)라는 글을 재미있게 보았다.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듯하다. 해당 세미나에 참가했었으면 좋았을거 그랬다.

얻어 들은 단대공정의 문제는 연대추정을 했지만, 정확한 연대추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갑골문이나 금문의 내용을 얼마나 믿을 수 있냐는 문제부터 그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냐는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단대공정과 같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상의 의문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물론 이에 정치적인 부분이 있다라는 것은 빼고,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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