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 친척의 덕을 보다.

-- 사촌지간의 정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왕박(王薄)이라고 부르는 한 농민은 <무향요동랑사가 无向辽东浪死歌>를 만들었고 대히트하였다. 마치 예전에 "DJ.DOC와 함께 춤을"을 할아버지부터 미취학아동까지 모두가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무슨 뜻이냐고? "요동으로 가면 쳐 죽으니까 가지 마라"라는 아주 단순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였다. 그 당시의 온갖 농민운동이나 그 외의 잡다한 난리들이 모두가 이놈의 무향요동랑사가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난리부르스 속에서 강도(江都), 그러니까 지금의 양조우(扬州)에 있었던 황제를 호위해야될 금위군(禁卫军)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제(隋炀帝)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서 심복에게 주고, 목 졸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혼자 죽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그런데 수도가 장안인데 수양제는 왜 양주라는 중국의 남방에서 죽었을까? 사실 수양제 제위 18년 중에 13년을 양주에서 지냈었다. 아마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서 남방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황제일 것이다. 수양제가 자주 양주에 있었기에, 어떤 이는 대운하가 어디까지나 수양제가 양주에서 놀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막말도 적당히 해야된다. 대운하는 기본적으로 남북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조역통로로서 필요했었다.

어찌되었든 수나라는 581-618년이라는 딸랑 39년만에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원(李渊)은 진양(晋阳)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618년에는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한다. 그가 바로 당고조(唐高祖)이다. 그는 국호를 당(唐)으로 정했다. 또한 수도를 장안으로 지정하였다. 이원은 수양제의 사촌동생이다.  그 둘의 어머니가 서로 친자매로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독고(独孤)씨였다. 이원은 수나라 시대에 당국공(唐国公)으로 진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거병해서 관중의 장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수양제의 손자를 황제로 세우고 수공제(隋恭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양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다 장악해버린다. 왜 황제가 되지 않고 귀찮게 섭정을 했냐고? 당시 이원의 거병 이유는 어디까지나 살해된 사촌형 수양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수양제의 장례를 성대하여 치루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 친형제의 난

626년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놈의 이세님의 즉위과정은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한 이씨왕조의 태종이 떠오른다. 친형제간의 피가 튀기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권력 앞에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없다는 것을 세삼 깨닭게 된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玄武门之变)이라는 친형제살육전을 벌인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을 통해서 친형인 이건성(李建成)과 친동생인 제왕(齐王) 이원길(李元吉)을 살포시 죽여버린다. 그리고 친아버지를 협박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런 짓을 해놓고서는 역사서를 고쳐버린 것이다. 현재 당시의 역사에서는 이세민이 죽여버린 이건성과 이원길을 천하의 호로자식으로 써놓고 있다. 그런데 병신에 바보같은 녀석들이 어떻게 수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을 기본 사상으로 간직한 동양의 역사책 서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황제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 있는 사관(史官)은 그것을 모두 기록을 한다. 당시에는 비록 지금의 녹음기나 카메라 같은 것이 없었지만, 사관은 조정에서 황제가 하는 모든 말을 기록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황제의 실록(实录)이 된다. 조선왕조실록도 바로 이러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결코 실록을 볼 수가 없다. 명(明)나라와 청(清)나라는 강력한 왕권국가였지만 어떠한 황제도 실록을 보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사실 어차피 실록이라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기록이었으니 굳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아! 물론 어디까지나 조정에서 대신과 말하는 것들의 기록이다. 황제도 사생활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이넘의 이세민은 실록을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바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건 별로야. 지워버려. 안 지워? 너 죽을래?"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종종 발생하고는 했었다.

유명한 일이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한 사건 - 崔杼擅弑齐庄公"이다. 최저가 제환공을 죽이고 사관에게 "아파서 죽었다"라고 기록하라고 했지만, 사관은 사실대로 "최저가 제환공을 시해하였다"라고 적어버린다. 최저가 열받아서 사관을 죽여버리지만, 그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동생 모두 차례대로 사관에 임명되어서 사실대로 쓰고서는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만이 "사실대로 쓰는 것은 사관의 의무입니다.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목숨만을 바란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 또한 제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쓸 것입니다. 설사 다른 이가 쓰지 않아도 당신의 죄는 결코 덮어지지 않으면 천하인들이 모두 욕할 것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결국 최저는 역사조작을 포기하였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세민 때의 사관은 누구인지 바꾸어버리고 만다. 사관으로서의 의무는 어디 갔냐? 븅.


이렇게 이세민의 등극은 친형제를 죽이고 일어났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말아야 될 역사조작까지 감행하였지만! 그는 단순한 악인은 아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을 좋은 곳에 쓰기도 한다.

수양제는 당태종(이세민)의 오촌 아저씨였다. 또한 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당태종의 한 첩이 수양제의 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촌 아저씨이자 장인 어른인 사람이 어떻게 망했는지 두 눈 똑똑히 지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수나라 멸망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래서 역대 최강의 부자 정부였다는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3번째의 통일을 이룩하고는 38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딸랑 15년이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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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응??;; 먼가 전의 글과 문체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끙...
이 글만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문제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아니;; 어차피 문체를 떠나서 글 내용 자체가 원문하고 점차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핵심이나 뼈대야 어차피 역사가 그게 그거니 같다만....음;;;;;;;
................................................
어차피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걸.....
................
...
무엇보다 별로 덧글도 없고.....계속 해야되나...;;;
(라면서 덧글 유도+_+)




제 4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아들(2)
(지난회는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1) -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수나라의 양식은 얼마나 풍부했었던 것일까? 천하를 50~60년동안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수나라가 38년만에 망했으니, 당나라는 날로 20년분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이러한 수나라의 부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나라도 수나라만큼 국고가 넘쳐흐르지 않았다(古今称国计之富者莫如隋)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도 수나라 정부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수나라와 맞짱을 뜨지 못한다. 수나라야 말로 막강 돈지랄을 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3. 운하를 뚫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뚫었다. 용제거(永济渠), 통제거(通济渠), 한구(邗沟), 강남하(江南河)로 분리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탁군(涿郡)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도달한다. 참고로 미치도록 길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파나마 운하의 38배이고, 스위스운하의 20배에 달한다. 현존하는 최대길이의 운하를 수나라때 포크레인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 현대의 기술로도 한반도에 운하를 뚫는 것은 환경파괴는 둘째 치고 돈을 몇 조씩 넣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에는 어떠하였을까?



4. 도로 재정비....
이쯤 되면 우리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떠오른다. 진나라도 만리장성 만들고[각주:1], 길을 새로 설비하면서 사람들을 부려먹다가 2대만에 망했었다. 수나라 역시 딸랑 2대만에 망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수양제를 욕만 해서는 안된다.


수양제는 분명히 폭군이지만, 멍청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 나쁘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무지막지 부려먹었던 운하공사를 보자. 대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은 지금이야 관광자원이 되어서 이민족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곳이며, 중화민족의 상징이니 머니 하고 있지만, 역대 대대로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돈과 인력은 무지막지 투자를 해놓고 정작 방어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타크레프트로 비유를 하면, 열심히 벙커를 지었지만, 정작 미사일터렛을 만들지 않아서 다크템플러가 은신해서 유유히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대운하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대부분의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래서 강을 이용하면 동서간의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남북간의 교류이다. 열심히 말을 타고 다각다각다각 갈 수밖에 없다. 머? 그냥 말타고 교류하면 안되냐고?

말을 타거나 짐마차를 끌고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은 매우 적다. 당신은 어디 이사갈 때 맨 몸으로 터덜터덜 가는가? 가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을 챙겨서 가야되는데, 육지로 이것들을 옮기려면 죽어나간다. 그런데 배로는 매우 쉽다. 특히 당시에 핵심적인 세금이었던 양식인 "쌀"은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배를 통해서 운반하지 않으면 죽어난다. 못 믿겠으면 쌀 한가마를 지고 100KM만 가봐라[각주:2].


문제는 수양제가 돈지랄을 너무 했다는 것이다. 10권짜리 장편 소설을 쓴다고 보자. 그럼 자료수집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이런저런 구상과 수정에 몇 달은 충분히 걸린다. 그런데 이런 장편소설을 일주일만에 써내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1억을 준다고 해도 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수양제가 딱 이꼬라지 였다.

수양제는 제위를 하고 나서 고구려을 3번 원정해서 대패하고, 수도를 옮기고, 법령을 강화하는 등등등 온갖 일들을 다 벌리고 다닌다. 문화사업이라던지 풍류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멍청한 상관이 아니고,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3차례의 고구려 공격을 보자.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정권이다[각주:3]. 지금 북한의 북부에 있었다. 이녀석은 700년동안이나 계속 반항하였는데, 처음 300년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있었고, 그 다음 300년은 평양(平壤)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됐고, 어찌되었든 한국인은 머든 뻇는다.[각주:4]

수양제의 3차 고구려 공격에 100여만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딸랑 2700명만이 돌아왔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한 전략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상대한 전략이었다. 하늘은 드럽게 많고, 땅은 넓은데 다 귀찮고 그냥 튀어!!!! 땅을 뻇으려면 뻇어라~~ 나는 튀련다의 정신으로 겨울까지 계속 후퇴만 한다. 승리의 기분도 처음뿐이지. 몇 달 동안 계속 걷기만 하고, 점점 겨울을 다가와서 추워지는데, 고향에 놔두고온 설미는 보고 싶고......근데 왜 이리 졸리지.....

이렇게 알아서 얼어 죽어주는 거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제 쫒아가면서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열받은 수양제이지만 나름 황제가 아니었던가? 육군만으로 안되면 수군까지 동원해주지! 그래서 쌈 싸먹겠다의 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에 동원된 백성들의 분노로 의한 봉기가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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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처음부터 쓸까...-_- 이미 원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아무리 의역이라지만...이래도 되는걸까나;;;; 뼈대야 그대로 가고 있다만....



  1. 정확하게는 만리장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밟아 버린 나라들의 장성(연나라, 조나라등)과 자신의 장성을 이어서 만든 것이 만리장성이다. 한마디로 새로 만든게 아니라 좀 대규모의 보수공사라는 거... [본문으로]
  2. 한반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초등학생도 알 이 상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대운하 필요 없다. 그냥 바다을 통해도 전국 어디든지 간다. 그런데 굳이 대운하 삽질을 하시겠다는 그 분은....후.... [본문으로]
  3. 본인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문 그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본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라. 본인도 지방정권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아두라고 그대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4. 다시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_-;;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은 중국을 분석하고자 하는 분들은 유심해서 볼 부분이다. [본문으로]
제 3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2.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 모범 근로자 수문제(隋文帝)

수문제의 위대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상의 황제들은 대부분 수 많은 첩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는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 명이 넘어서 이름이 아닌 번호만이 있었다고 하지요. 오늘은 001번에서 007번까지~ 내일은 230번부터 250번까지~[각주:1] 이런 복이 넘쳐흐르는 황제들 중에서 오직 2명의 황제만이 첩이 없었답니다. 바로 수문제(隋文帝)와 명효종(明孝宗)이죠.


명효종은 그가 태자였을 때부터 장황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즉위를 하고서는 첩을 받지 않았던 것이지요[각주:2]. 그에 비해서 수문제가 첩들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일벌래의 극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사를 생각하고, 매일매일 조회에 참석하거나 날을 세우고는 하였다"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황제가 매일 매일 조회에 참석한다면 아마 과로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근면했다는 청나라 황제들도 10일에 한번씩만 조회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황제에게는 매일 매일 처리해야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군기대신(军机大臣)을 만나서 처리하였지요. 군기대신을 만나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선생님이 학급반장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학급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씩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학급반장을 만나서 일처리를 부탁하고 중요한 일들을 전달 받는 것이지요.

청나라때 조정의 조회는 궁전안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대신을 궁전 안에 들여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궁전이 아닌 건청문(乾清门)과 어문(御门)에서 조회를 했습니다.  황제야 건청문의 굴 속에서 앉아 있으면 되지만, 대신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광장에서 대기를 해야했지요. 황제야 추우면 손난로나 모피를 입어서 곰탱이 같았고, 영상 30도의 더위에서는 햇빛 가리개와 부채가 동원이 되었지요.

사극을 보고 있으면 대신들이 궁전 안에 들어와서 조회를 합니다. 청나라 황제들의 정사는 모두가 양심전(养心殿)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좁은 장소에는 몇 명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잘해봐야 몇 명이 되지 않는 군기대신들이나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래서 건륭(乾隆), 용정(雍正), 강희(康熙)들의 영명한 군주라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조회를 보고, 매일 밤샘을 하면서 조정의 일들을 처리하였지요. 또한 책을 보다가 밤을 새는 것도 부지기수이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곧장 조회를 보고는 했습니다. 참 대단하죠?


보통 황제가 조회에 나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던, 4시면 기상을 하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클럽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두워지면 잤으니 저녁 8시 반이나 9시면 잠을 잤기 때문이지요. 황제 역시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었습니다. 새벽 4~5시면 어둠을 헤지고 조회에 참석을 하여서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일처리를 했습니다.


"오품이상은 부름을 받으면 국정에 대해서 논하여야 한다. 五品以上,引之论事" 다시 말해서 오품 이상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는 황제가 부르면 달려와서 국정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해야된다는 소리입니다. 청나라에서는 4품 이상만이 황제를 볼 수 잇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부의 관원은 모두가 4품이상이었고, 지방에 있는 사람은 3품 이상이어야지만 황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품의 지부(知府)와 같은 지방관리는 황제를 못 만나는 것이지요. 3품의 보정사(布政司)나 안찰사(按察司)급은 되야지 만날 수 잇었습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그 당시 오품이상의 사람들을 불러서 국정에 대해서 논하게 하였습니다. 아마 청나라의 저글링때와 같은 관원숫자보다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당직을 서는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宿卫之士,传餐而食" 수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밥을 무조건 혼자 먹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과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 먹는 틈에 독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황제가 황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같은 방에서 먹지 않습니다. 황제가 건청궁 서원각(乾清宫西暖阁)에 있다면 황후는 동원각(东暖阁)에 있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 황제가 개고기찜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되면, 황후에게 한 그릇을 보냅니다. 황후는 토 쏠리는 것 같아도 황제의 성은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기 자체를 먹고 싶지 않아도 황제폐하의 성은에 감동의 도가니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여러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수문제의 황후인 독고(独孤)씨도 역시 현명하다고 칭송되는데, 그를 더욱 더 열심히 일하도록 계속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이런 수문제의 모습은 극도로 부패했던 남조의 진(陈)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陈叔宝)는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망국의 군주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박진회(泊秦淮[각주:3])에서 나오는 후정화(后庭花)가 바로 진숙보가 즐겨 부르던 노래로 망국의 노래로 등극하였습니다.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황궁으로 돌입할 때, 진숙보는 우물에 몸을 숨깁니다. 수나라 병사들은 그를 찾다가 우물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는 말합니다. "지금 당장 안나오면 돌을 던지겠다고" 그러자 안쪽에서 "던지지 마요. 던지지 마. 우리 좀 끌어올려줘요." 그들을 끌어올리자 진숙보와 황후 그리고 귀비까지 3명이 엉켜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광(杨广)이 그 귀비를 보고서는 자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대자 한금호(韩擒虎" "이년 때문에 진나라가 망한거야. 근데 이 년을 원한다고?" 단칼에 양광을 두동강 내버립니다. 괜히 여자 밝히다 죽은 양광에게 애도를....


수나라는 진나라를 명말시킨 이후에 공사를 시작합니다.

1. 장안과 낙양을 재건합니다.
수문제는 장안에 대흥성(大兴城)을 만들고, 수양제(隋炀帝)는 낙양에 동쪽 수도를 만듭니다. 이 둘을 합쳐서 양경(두 수도 两京)라고 하고, 서쪽 수도는 장안이며, 동쪽 수도는 낙양입니다.

2. 전국에 창고를 건설합니다.
이 창고가 무식했냐면은 수나라의 한 양식창고는 함가창(含嘉仓)이라고 불리는데, 고고학자들이 이 함가창을 발굴하면서 대략적인 통계를 내었습니다. 함가창에는 총 259개의 식량 저장고가  있었는데, 한 저장고 안에서 이미 탄화된 곡식 약 300만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식량저장고가 259개가 있으니 얼마나 무식하게 곡식을 쌓아놓았는지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함가창 말고도 낙구창(洛口仓)이니 경낙창(京洛仓)등과 같은 곳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나라의 양식 비축량은 무시무시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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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제 의자왕의 3000궁녀가 있지요. 하지만 해당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실려 있고 정확한 숫자는 없습니다. 이후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니 실제로 3000명은 아닐것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황제에게는 첩을 받아야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황제는 그 자손을 번창시켜야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3. 烟笼寒水月笼沙,夜泊秦淮近酒家,商女不知亡国恨,隔江犹唱后庭花; 중국인들에게는 워낙 유명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는 좀 어색할듯 합니다. 두목이 당 말기 귀족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비판한 시입니다. [본문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을 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의 모든 통일전쟁은 거의 대부분이 북방에 의한 남방통일이었다. 오직 명태조(明太祖)의 북벌만이 예외일 뿐이고, 이것 역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골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소멸할 수가 없었고, 이후 명나라 역사에서 계속 골치거리로 남아 있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황태극(皇太极)에 의해서 마지막 몽골제국의 황제인 임단칸(林丹汗)이 패배하기 전까지 계속 칸의 자리에 있었다.

칭기즈칸에서 임단칸까지 482년, 35대의 칸을 배출하여 사실상 명나라와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고, 훗날 청나라가 된 후금(后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조는 결국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이다.

중국근대의 해방전쟁(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간의 전쟁)에서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송화강(松花江)에서 해남도(海南岛)로 계속 내려오는 도강전투(渡江战役)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의 중국통일전쟁은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이는 고대에는 북방의 경제가 발달하여서 남쪽의 야만인(남만 南蛮)을 공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훗날 남쪽도 발전을 하게 되지만, 북방인들은 기마에 능하고, 전쟁수행능력이 뛰어난 반면에, 남방인들은 유들유들한 학자분위기였기에 승패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또한 남방의 지형은 구릉지형[각주:1]으로서 쉽게 서로 간에 분리되어 독립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서 북방의 지형은 평원으로서 쉽게 통일 될 수 있었고, 통일이 된 이후에는 내부을 결집하여 외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 쉬웠기에 수나라의 통일은 더욱 더 쉬웠고, 너무나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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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량은 짦다.^^;;; 아싸리~ 아싸~~~~


  1. 남방의 지형은 한국의 산이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산으로 숨어들어서 방어에 주력하면, 상대방을 공략할 수는 없지만, 방어를 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해갈 수는 있었다. [본문으로]
제 4장. 화려했던 당(唐)나라를 기리며...
1. 수(隋)의 위밍업

* 외할아버지 외손자의 황위를 빼앗다.

여러분들. 이제부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인 수당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중화민족은 모두 56개이며, 한(汉)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족이 해외에서 모여 사는 곳인 ChinaTown은 "당나라 사람의 거리(당인가 唐人街)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서 한(汉)나라와 당(唐)나라로 아직도 불려지고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두 왕조입니다. 한나라의 강력함은 이미 설명했었습니다. 그럼 당의 번영은 누가 그 기초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수나라입니다.

서기 581년 북주(北周)의 외척 양견(杨坚)은 나라 이름을 수(隋)로 하고 년호을 개황(开皇)이라고 하여 장안(长安 지금의 서안)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양견은 곧 수문제(隋文帝)입니다. 수문제는 북주의 외척이었지요. 외척이라는 것은 황제의 어머니나 아내의 가문, 혹은 태후나 황후의 가문을 말합니다. 양견은 북주 정제(静帝)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손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된 것이지요.

황제를 빼앗긴 정제(静帝)의 할아버지인 북주의 선제(宣帝)는 아마도 양견의 딸과 억지로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척에 의한 찬탈은 대부분 이런 식이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도 황제의 외할아버지였었죠. 삼국연희로 유명한 조조(曹操)도 황제의 장인(아내의 아버지)이었지요. 비록 그는 황제자리를 뺏지 않지만, 그의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서 매형의 자리를 뺏어서 황제가 됩니다. 북주의 선제와 같이 한헌제(献帝)도 원래의 황후를 없애버렸기에 억지로 조조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죠.

앙견은 북주에서 수국공(隋国公)이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隋)라고 이름을 붙이고 년호를 개황(号隋)이라 하며, 장안(长安)을 수도로 한 것이지요. 서기 589년, 앙견은 그의 둘째 아들을 진왕(晋王) 양광(杨广)에게 총병력 5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중국 남부에 있던 진(陈)나라를 멸망시키게 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어냅니다. 진나라는 이름바 남북조시대에 송(宋)-제(齐)-양(梁)-진(陈)으로 넘어가는 남쪽 왕조의 마지막입니다. 남조의 천자는 풍류(风流)를 사랑했고, 단지 자강산을 굳게 지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조의 정권의 황제는 자주 변하였고, 무력이 약한 서생들이었으니 결국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 여러 민족의 융합.
역사상 북방에서 남방을 통합하려고 노렸던 적은 몇 번이나 됩니다. 삼국시대에도 그랬고, 진나라때도 그랬고, 남북조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것은 383년의 비수지전(淝水之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북방의 16국중에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坚)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0만도 안되는 동진에게 발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민족간에 첨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의 원래 북방에서 쫒겨온 사람들은 오랑캐들에게 통치 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또 전진(前秦)은 저족(氐族)이 만든 국가인데 90여만 대군의 대부분은 한족(汉族)이었습니다. 저족의 전체 인구는 단지 몇십만에 불과했으니 말이죠. 한족들의 입장에서는 동진을 자신의 조국과 같이 보았으니, 누가 조국을 치기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비록 군대로 동원되었지만 그리 싸울 마음이 없었고 결국은 전쟁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각주:1]

그런데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쯤이 되면 상황이 변합니다. 수나라나 당나라 모두 비록 선비(鲜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남방쪽 사람들도 더이상 그들을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별 신경은 안 쓴 것이죠. 민족이 이미 융화가 된 것이지요. 북방은 이미 완전히 한화(한족에 동화됨 汉化)가 되어서 기존의 중원 왕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각주:2].

이렇게 남쪽 사람들이 수나라를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기에 양견은 날로 천하를 먹게 됩니다.


2. 북방 농업의 회복과 발전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쌓음.
북방은 원래 남방보다 훨씬 더 농업이 발전해있었습니다. 비록 계속 되는 전쟁으로 황폐하게 되었지만, 수나라의 천하통일쯤이 되면 충분히 회복하고 발전해 있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오래된 말처럼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양식이 먼저 움직여야 됩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돈싸움인 것이지요. 미국이 이렇게 죽이게 강력한 이유와 같은 것이랍니다. 전쟁에는 튼튼한 경제적 기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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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가 없다는 것이야 이미 소개했지만, 좀 문제가 많은 내용들이 있군요. 이건 머...제가 다시 쓰는게 더 속편하다고 느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렇게 분석해서 안될 것도 없기에 그냥 냅두고 주석으로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이건 어떻게 수정하지도 못할 만큼 긴데, 좀 문제가 많아서 주석을 달겠습니다. 일반 백성에게 누가 통치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의 비수지전의 패인으로 민족모순은 별로 언급이 안됩니다. 그것보다는 당시 전진의 전략-전술상의 문제와 동진의 방어전략 및 군사훈련이 좋았다고 평가합니다. [본문으로]
  2. 라는 것이 교과서급의 역사책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화보다는 오히려 중국 전체가 북방이민족들의 문화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동화가 된 것이 아닌! 서로서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본문으로]

"역사상 가장 죽이는 역사 선생님(史上最牛的历史老师)"으로 불려지고 있는 위엔텅페이(袁腾飞)가 최근 출간한 "중국사는 장난감(历史是个什么玩意儿)"을 번역하려고 합니다.

이 책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정말로 쉬운 중국사다!"입니다. 오랜 세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매우 쉽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중국 고등학교 수준에서의 중국사라면, 한국의 대학생이상이 볼 수 있는 교양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책은 "깊이"가 없습니다. 제가 잠깐 본 부분에서도 현재 학계와는 조금 격차가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어디까지나 전공자의 입장이고,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교양서로서는 충분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로서는 솔직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전공자로서는 그닥 마음에 들 수는 없는 책을 번역하고자 합니다.

연재 방식은 아래 원문소스에서 말씀드릴 곳에서 한회 연재하는 분량만큼만 할 생각입니다. 제 예상으로는 분량이 적어서 하루에 길어야 30 분이면 번역-정리까지 다 할 수 있어서 앞으로 논문 작업을 해야되는 저에게는 부담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쳔무(钱穆) 선생님의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잠시 멈추고 이것부터 번역하려고 합니다. 사실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이 저 자신에게는 훨신 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중국사는 장난감이다"는 가장 쉬운 말과 유머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사학도로서 깊이도 중요하지만 대중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제 논문작업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는데, 그래도 블로그를 버려두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최신 뉴스를 모니터링 할 수도 없기에 가볍게 번역할 수 있는 이 글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본 글의 번역은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대로 최대한의 의역을 구사할 것이 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읽을 정도의 수준을 추구할 것이며, 원문에서 한국어적 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중국어만의 표현일 경우, 원뜻을 최대한 해치지 않게 생략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야될까? 이 책을 완벽한 직역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이 책의 핵심 자체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핵심이 머냐고? "한가로움~" (너 원래 의역파였잖아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군요. 하하^^)

본 글에 대한 어떠한 번역과 맞춤법 상의 조언과 비판을 환영한다. 단, 근거도 없이 단지 자신과의 번역 원칙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쏟아부어지는 비난이나 악플에는 방긋 썩소와 함께 그 분의 영혼을 위하여 옆차기를 날려겠다.

본 글의 번역은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건만을 보도하는 미디어성 기사의 인기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한 중국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건이나 내용은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그 동안 오랜 세월 번역일을 하지 않았던 본인이 앞으로 소개할 전공책을 번역하기 전의 몸풀기 과정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정도 분량은 왠만하면 30분내로 끝이다. 잘난 척이 아니라 본인의 중한 번역속도은 좀 빠르다.-_-;;) 앞으로도 이런 대중성인 내용은 계속적으로 조금씩이나마 번역하면서, 한국의 학계에 도움이 될만한 중국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갈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엉터리 유사역사학계열의 책이 제대로 된 역사학계의 책보다 잘 나가는 이유에 대한 역사학계의 고민이 있었으면 합니다. "깊이"도 중요하지만 "대중"도 중요합니다.


서지정보 :
作者:袁腾飞 插图作者:BBD
出版社:上海锦绣文章出版社
页码:288 页
出版日期:2009年08月
ISBN:9787545204476
装帧:平装
开本:16
正文语种:中文
读者对象:普通大众
丛书名:历史是个什么玩意儿系列
定价:32.80

http://book.qq.com/s/book/0/18/18058/index.shtml
위의 주소에서는 합법적으로 저작권계약을 하고 해당 내용을 조금씩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번역하는 것의 원본이 될 곳입니다. 종이로 된 책은 나중에 자금에 여유가 생기면 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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