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용으로 고문을 대충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엄격한 해석이 아니라는 점 염두해두시길 바랍니다.


자치통감 95권

원래 전조의 석륵시대부터 천축승 "불도등"의 많은 예언이 맞았기 때문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석호가 후조를 세운뒤에서 계속 "불도등"을 열심히 모시는데...

이 천축승이 국가회의에 참석할때면 태자와 다른 석호의 자식들이 부축해서 회의실로 인도를 하고, 회의진행자가 큰 소리로 "큰 스님!"이라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어났다. 


初,赵主勒以天竺僧佛图澄豫言成败,数有验,敬事之。及虎即位,奉之尤谨,衣以绫锦,乘以雕辇。朝会之日,太子、诸公扶翼上殿,主者唱“大和尚”,众坐皆起。




불교의 전파라던지 천축승이 온 경위, 북방민족에서의 불교 전파가 전투력에 미친 영향 문제등등은 냅두고 재미있었다. "큰스님"이 나오는 부분에서 열람실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푸핫" 이라고 웃어버렸다는.......머.....재미 없으면 말고...  왠지 내 자신이 한심해져.ㅠㅠ 이게 점차 미쳐가는 징조일까.....으음...


이거 보고 웃은 사람 손 좀 들어주셔요.


살리에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모짜르트이라는 천재와 같이 태어난 바보이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모짜르트의 재능을 넘어서지 못한 바보이다.

그래. 일단 난 지금 술을 먹었다. 솔직히 취하지는 않았다. 술이 약하지만 맥주 한 캔에 술이 취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취했다. 취해버리고 싶다. 너무나 슬프다.

외국 땅에서 외국어로 그 나라의 천재들과 같이 공부를 하는 것은 나같은 범재에게는 너무나 큰 "영광"일 것이다. 그래. 가진 것 없고, 생각도 없고, 바보같은 내가 북경대학교라는 곳에서 역사과를 나와서 계속 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한 편의 코메디일지 모르겠다.

너무나 바보 같다. 고문 사료. 나는 열심히 본다고 본다. 하지만 내 친구들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다. 내 친구들이 본과에서 곧바로 박사가 된 천재들이 모였다는 북경대에서도 천재들이라는 변명은 웃긴 것이다. 나의 고문 사료 해석 능력은 친구들에 비해서 너무나 부족하다. 아니 한심하다.

외국인이 그럴 수도 있다. 그럼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개념. 그런 것이 있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없다. 그냥 남들이 하는 생각정도에 머무는 한심한 바보이다. 새로운 것. 말이 쉽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완벽하게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나 같은 인간은 역사를 사랑하면 안되었다. 바보로서는 너무나 힘든 길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난 역사를 이미 사랑해버렸다. 이런 돈도 안되는 한심한 학문을 사랑해버렸다. 어찌 해야하겠는가....


바보 같은 나로서는 그냥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그냥 이렇게 걸어 갈 수 밖에 없다.
세계적인 석학도, 위대한 학자도 나에게는 이루지 못할 꿈이다.
그냥 역사를 공부하자. 그냥 사랑하자. 그것 밖에 없지 않는가....
이미....알고 있지 않는가?!





더더욱 주절주절
살리에르도 비록 모짜르트의 재능에 슬퍼하고 탄식하고 좌절했지만, 살리에르가 없었지면 모짜르트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이런 바보같은 길을 걷지만, 내 자식.....넌 죽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넌 이제 나에게 사육당할 것이다. 나같은 것은 그냥 결혼하지 않고 너도 안 만드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넌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xxx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하하하하.........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람을 말하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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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님께서 죽은 과거보다 살아있는 현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짐작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연대기 작가가 되시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지 못하신 것도 압니다. 예. 언어는 말해진 순간부터 고정되겠지요. 어떻게든 이 아름다운 지금을 표현해 보려 해도, 그것은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겠지요."
남작은 졸음에 취하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어쩌면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스발의 목소리는 이제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작님은 훌륭한 연대기 작가이십니다."
"어째서-?"
"지금을 사랑하시니까요."

--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중에서...


요즘 자주 생각나는 문장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관찰하고 해석할 뿐 과거에는 내가 참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는 "지금"을 너무나 사랑하나보다.  그렇다고 나는 행동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아련하다.


관찰하자.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의 조그마한 관찰로 현실에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겠지.
관찰하는 능력부터 제대로 기르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까! 괜히 공부가 안된다면서 이렇게 떠들지 말고 책이나 더 보자고!!!


《代歌》《代记》和北魏国史 - 国史之狱的史学史考察

《拓跋史探》

田余庆


이 글을 읽는 이유

1) 티엔 선생님이 편하게 쓴 글이다.

2) 史风에 대한 이야기(정치의 역사에 대한 영향)에 대한 이야기 : 티엔선생님의 시대의 특수성

3) (60年代)三大才子 : 田余庆,剪伯赞,戚本禹 이 문장은 티엔선생님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늙었기에-_;;"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료나 기타 증거로 할 수 없을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일단 사료나 기타 증거로 제대로 쓰는 것부터 잘 해야지 저런 경지를 바라보지. 으휴...


요약 :

이 글은 책의 맨 마지막 종합이다.

처음에 투르크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글의 핵심은 투르크 역사는 원래 생각했던것과 다르게, 다양한 내부적인 정치권력투쟁(투르크의 외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권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선비와 오환으로 발전하게 된 투르크는, 특히 외척세력인 오환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을 하는 시기에는 외척(모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정치적 권련 배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척세력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전통이 생겨서,  원래의 모후를 다 죽여버리는 전통이 창조된다.

오환이 투르크의 초기발전에 끼친 영향은 처음으로 서술한 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위서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한다. 특히 위서와 같은 경우 소수민족의 역사서 중에서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魏收은 어떤 기준으로 이 글을 적었을까? 아마도 구전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이 된 것이것이다.

그 예로서 崔浩을 든다. 그는 역사서를 잘못?! 서술했다가 최강막강의 권력에서 밀려난다. 역사서를 쓰고 돌에 새겨넣어서 도로에 전시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올린 것인데, 문제가 되어서 난리가 난다. 이 돌도 아무곳에 묻어버리는데( ...이거 발견하면 최고일터인데....)이 문제에 대해서 周一良선생님이 이론을 내놓는다. 수집혼으로 인하여 도광에게는 조카이자 친동생인 사람이 있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척에 대한 서술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최호에 대한 처리가 이후의 북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티엔선생님은 정치에 의한 역사간섭은 인류의 손해이자, 역사학자로서는 자신도 경험했던 괴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代歌 --》 代记가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한것이, 왜 같은 내용인데 선비어 代歌는 가능하고 崔浩가 역사로 남기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汉化의 문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孝文帝는 반대하는 아들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중국 주변민족은 건국과 동시에 汉化라는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화를 안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존에 한화를 이야기할때, 관료화라던지 복장과 같은 물질상의 것을 토론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정신상의 반응이다. 이 문장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댕기나 족발과 같은 것들은 중국사람들에게 이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의 노인배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이 이러한 댕기나 족발을 거론을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북위초기 시대에도 이러하여서, 과거의 선비의 도덕관과 새로운 세대의 한족의 도덕관은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崔浩의 경우는 이 중간에서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도기에 현재의 관점에 보아서 나쁜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그래야 과도기의 고통이 적어진다. 상당히 슬픈 결론이다. 요즘 있는 티베트관련 중국인 시위와 같은 경우는 과거의 망령과 같은 무력탄압을 잊고, 없애고,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슬프기만 한것은 아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후...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의 외래 민족이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세대의 티베트인들은 이제 과도기를 지나서 중국을 추종하지 않을까? 머...지금까지의 역사적 예로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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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구성호와 투르크문화에서 보면 서역의 이민족들은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말이 되면 샤만-불-불교의 3대 파벌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만약 이민족들이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시 서역의 투르크가 일정정도의 문화를 보유한 것이라는 소리가 되는데,그렇다면 샤마니즘이나 불숭배도 문화라고 하면, 이러한 문화를 공유했던 북방이민족도 문화가 있다는 논리모순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족보에서는 여성을 서술하느냐 안하느냐?기억에는 하는것 같은데...으음...

내가 본 것은 근대의 족보이니 최소 조선시대 이전의 족보를 찾아봐야될듯.



中国北方民族与蒙古族祖源 1979年

중국학자중에서 북방민족의 대역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 몇 안되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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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要】流传于北魏宫掖与鲜卑贵族间的《代歌》,是拓跋族的民族史诗。道武帝时修撰的北魏早期历史《代记》,主要当是依据《代歌》。《魏书·序纪》大体是以《代记》为本。辑集《代歌》和修撰《代记》的重要人物是邓渊。由于邓渊冤死,崔浩死于国史之狱,北魏一代史学衰微,史官视修纂北魏前期历史为畏途。考察《序纪》的来历,可以看出拓跋族面对其民族早期历史的某些问题时陷入的痛苦与窘境。这是中古时期民族融合浪潮中值得重视的一个案例。
【关键词】北魏 代歌 代记 邓渊 崔浩

一、《真人代歌》释名

读魏收书,留意到《乐志》所载《代歌》问题[1]。《乐志》谓“凡乐者乐其所自生,礼不忘其本。掖庭中歌《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凡一百五十章,昏晨歌之,时与丝竹合奏。郊庙宴飨亦用之。”我不懂音乐和音乐史,但是觉得代歌内容从“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看来,应该就是拓跋史诗,很有史料价值,值得读史者探究。只是歌词散失殆尽,研究《代歌》本身已不可能,只好当作史学史上的一个话题来对待,看看能否发掘出一点有用的东西。
《乐志》所说的“时”,意指代歌进入北魏乐府之时。因为代歌本是鼓吹乐,马上奏之,只有入乐府后始“与丝竹合奏”,才能脱朔漠土风而登进于庙堂宴飨。北魏始设乐府,年代甚早。魏平中山,晋伶官乐器屡经转徙遗散之后而得留存者,多入代北,理当设官司理,但只是草创而已,乐工、器物、乐谱、歌词都远不完备。辑集代歌之事似乎与设乐府大体同时,有代歌之辑即有乐府。《乐志》叙代歌事于天兴元年至天兴六年(398—403)之间。以后拓跋破赫连,平凉州,通西域,所得稍广,乐府渐有规模。孝文帝务正音声,搜求古乐,乐府始盛。乐府音声审定,器物调适,歌词取舍,编撰次第诸事,魏初邓渊首居其功,以后续成者则有高允、高闾等人。
代歌,《隋书》卷14 《音乐志》未曾特别言及。但《隋书》卷32《经籍志》小学类有《国语真歌》十卷,无解释,姚振宗《考证》亦无说。我认为应当就是指代歌一百五十章。国语即鲜卑语,代歌是用汉字写鲜卑语音而成。至于真歌之名,下面再作解释。《经籍志》还有《国语御歌》十一卷,不知是否与代歌有关系。
《旧唐书》卷 29《音乐志》、《新唐书》卷22《礼乐志》都有代歌资料,又称北歌。这是由于两唐乐志在有关部分列叙四夷之乐,入代歌于其中的北狄乐中,故有北歌之名。北魏迁洛以后对于拓跋旧物都以代、以北为称,所以北歌、代歌同义。两唐乐志都说北歌是“燕魏之际鲜卑歌”。狭义地说,所谓“燕魏之际”,当以道武帝皇始元年(396)建天子旌旗、取并州、夺中山,至天兴元年(398)克邺、灭后燕、定都平城为基准,北歌辑集当在此时;而所谓“鲜卑歌”是总括此时鲜卑各部之乐而言,包括以拓跋为主的代歌在内。广义地说,它也可能泛指十六国至北魏后期的胡歌胡乐,在燕魏之间以至魏末较长的时间之内陆续辑成。魏志所叙大体符合狭义的要求。两唐志所叙燕魏之际鲜卑歌,在这两方面都显得混乱,只能从广义方面来理解。
两唐乐志都说北魏乐府代歌,到周、隋之世与西凉乐杂奏,原有的代歌一百五十章由于只有鲜卑音而无汉译,理解者越来越少,以至逐渐失传,至唐时只存五十三章,而名目可解者只有六章。两唐乐志录有六章名目,即“慕容可汗”、“吐谷浑”、“部落稽”、“钜鹿公主”、“白净王太子”、“企喻”。郭茂倩《乐府诗集》卷25《横吹曲词》录载了几章汉译歌词。从这几章汉译歌词看来,两唐乐志所说到的代歌内容与发展情况,大大超越了《魏书·乐志》所说的代歌,所叙可解者六章与《魏书》不能吻合,时代较晚,也不是道武帝先人有关事迹。证据如下。“部落稽”,十六国时称山胡,魏时只一见,称步落坚,在《北史·尔朱荣传》中;至于正式见到步落稽的称呼,已是北周之事了[2]。“钜鹿公主”,《旧唐书·音乐志》说似是姚苌时歌,其词华音,与北歌也不合。“企喻”,据《乐府诗集》卷25引《古今乐录》,其四曲之一是苻融诗,不涉及鲜卑。所有这些,与《魏书·乐志》所说代歌“祖宗开基”、“君臣废兴”的鲜卑史实都不是一回事。不过,旧志又说“其不可解者咸多可汗之词,此即后魏世所谓簸逻廻者是也。其曲亦多可汗之词”。此事在隋志中也有相应记载,可以确认为魏世之作。隋志谓“天兴初吏部郎邓彦海(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簸逻廻即是大角及其所奏,北狄鼓吹之乐,马上用之。所谓“不可解者多可汗之词”,似内容为历代鲜卑君主言语行事,这与魏志所谓 “祖宗开基”、“君臣废兴”或者可以合辙。
以上的资料和解析,使我理解到唐乐府中的北狄乐、鲜卑乐、代歌,是三个大小范围不一的名称。北魏代歌一百五十章,唐以前多半陆续散失,也有新章羼入,所以唐志所说的代歌已不全是北魏时的原貌了。所谓唐时尚存而又可解者六章,其中的“步落稽”一章属于大范围的北狄乐(步落稽族属来源主要是南匈奴),“慕容可汗”和“吐谷浑”二章属鲜卑乐范围。只有严格意义的代歌才是拓跋歌,但也不能完全排除其它鲜卑歌包含其中,因为拓跋在推寅(即追谥宣帝的所谓前推寅)时还曾是鲜卑檀石槐势力的一部分,称西部鲜卑。唐志成书,距代北拓跋年代已远,乐府歌词变化很大,最重要的是鲜卑语言已鲜为人知,所以难于区分乐府各部分来源演变,以至于对代歌的叙述混淆不清,产生了上列的矛盾。
也许还可以这样认定,代歌是经过拓跋君主有意筛选甚或部分改造的燕魏之际鲜卑歌。筛选是按照道武帝个人意志进行的,目的是用口碑资料中的拓跋(也不排除鲜卑它部如慕容等)传说,编成歌颂先人功烈的歌谣,于代人中广为传播,为道武帝的帝业制造舆论。《乐志》所说代歌中“祖宗开基”“君臣废兴”的具体内容,道武帝正需借鉴,是他在创业时期朝夕思虑的大问题。《魏书》卷24《崔玄伯传》说其时道武帝“历问故事于玄伯”。又说“太祖常引问古今旧事,王者制度,治世之则。玄伯陈古人制作之体,及明君贤臣,往代废兴之由,甚合上意。”道武帝满心关注的有关治道的掌故,崔玄伯等人所能提供的,只限于汉人典籍所载,非拓跋旧事,而拓跋开基废兴诸事,却正是代歌的核心内容,而为此目的替道武帝筛选辑集代歌的人,从文献查找,只能找到邓渊一人。只有邓渊一人,于天兴元年冬奉命定律吕,协音乐,这势必涉及代歌;也只有邓渊一人,几年以后又受诏撰修代记,这也势必要以代歌所涉为主要资料。两唐乐志都说代歌是“都代时命宫人朝夕歌之”,所歌又尽代人之事,因而有代歌之称,迁洛以后不一定还有此需要,而且鲜卑语音大多既被遗忘,代歌也不再具备原来的意义了。
我还想用拓跋人爱歌的风习,来加强代歌是拓跋史诗,是拓跋古史资料来源的看法。拓跋爱歌的风习是历史上早已形成的,到了平城和洛阳已有汉字可供使用的年代,这种风习仍然依旧。《序纪》说拓跋先人“世事远近,人相传授,如史官之记录焉。”所谓人相传授,当是有言有歌,基本上都是口述的拓跋历史资料。一个部族,一个部落,甚至一个家庭,都有这种口述传授的资料。北魏皇帝是爱歌的。太武帝神三年(430)行幸广宁温泉,作温泉之歌以纪其事,见《世祖纪》。他令乐府歌工历颂群臣,赞美“廉如道生,智如崔浩”,见《长孙道生传》。其它臣工当各有诗歌赞颂。《文明冯太后传》载,冯太后曾与孝文帝幸灵泉池,孝文帝率群臣上寿,“太后忻然作歌,帝亦和歌,遂命群臣各言其志,于是和歌者九十人”。耆宿之臣元丕(422—503)为烈帝翳槐后人,历仕太武、景穆、文成、献文、孝文、宣武六朝,以能言“国家旧事” [3]见重于时。《北史》卷15《元丕传》:“丕声气高朗,博记国事,飨宴之际,恒居座端,必抗音大言,叙列既往成败。”孝文帝说他“亲歌述志”,当然是又说又唱了[4]。
北魏墓志中也有一些歌唱家族史传的例证。永熙二年(533)元肃墓志,记肃父扶风王怡“道勋出世,列在歌谣”[5],这种赞颂歌谣可能是乐府歌工奉命所作,如赞长孙道生、崔浩之例;也可能是贵族家传自编之作。正光五年(524)元子直墓志,说到其家世业绩“故已播在民谣,详之众口”[6]。永熙三年(东魏天平元年,534)张瓘墓,自矜其家世“吟诵两穗”[7]。这些可吟可唱的歌谣,其内容大概相当于汉人大族的家传。还可注意的是,武定八年(550)穆子岩墓志赞美先人事迹说:“家图国史,可得详言”[8]。然则贵族家世记录除歌谣以外,还有家图相配。
有一种文化现象曾令我不得其解,就是当拓跋人已进入高速汉化轨道之后,拓跋皇族人物自记其先人名字,仍旧任意用汉字写鲜卑音,而不遵循官方规范,与今本《魏书》所见多异。这也是从墓志材料中看出来的。永平四年(511)元侔墓志志阴铭文,谓墓主的六世祖为昭成皇帝;五世祖为昭成第八子受久[9];高祖常山王遵[10],字勃兜;曾祖常山康王素连;祖河涧简公于德;父悝,字纯陁。案以墓志核对《北史》卷15《常山王遵传》及《魏书》15《常山王遵传》,名字异处甚多。一,受久,本传作寿鸠;二,遵,字勃兜,本传不载其字,元昭墓志[11]则作字兜;三,素连,本传作素,元昭墓志则作连;四,于德,本传作德;五,悝字纯陁,本传不载其字。
显然,墓志所见名字当是据家传歌谣,有真实性,为常所使用者;《魏书》则当据官府文书。北魏有宗正[12],宗室人员名字,宗正必有文书记录,是在官的正式名称,却并不被本人及家族重视,因而有如上歧异出现。从这里也可推知,直到魏末,拓跋人仍不重视汉字汉语,记事仍以歌谣为准,风习未改。前引元肃墓“道勋出世,列在歌谣”,歌谣作用甚过文字叙述。顺便论及,甚至连汉字拓跋作为国姓,也未被普遍认同,西魏北周恢复胡姓,民间写拓跋为 拔。北周武成二年(560)《合方邑子百数十人造像记》所刻邑子姓名中,拓跋全作 拔,共有十余人[13],初疑这是民间讹写,一方流俗。后见镌刻精美的北周大将军李贤墓志[14],拓跋也作 拔。李贤墓志立于公元569年,此时魏收《魏书》早已修成了。从这种文化现象推知,甚至到迁洛以后,拓跋人对其祖宗开基及先人事迹的记忆,恐怕还是靠歌谣传诵为主,而不是依赖汉字记述。
现在还是回头来讨论乐府代歌本身的问题。
代歌的来源、内容,姑且作了上述的探讨。在《魏书》、《旧唐书》里,代歌叫做“真人代歌”。《新唐书》叫“真人歌”,当系省称。只有《隋书·经籍志》称之为“国语真歌”。真歌之“真”和真人代歌之“真人”,不像是同一含义。这又是怎么一回事呢?
汉音所读真字,鲜卑语中是表明人物身份称谓的字眼。《南齐书》卷57《魏虏传》中说到此语,列举了称为真的人物职称身份语词甚多,近年所出北魏文成帝南巡碑、孝文帝时司马金龙及其妻墓表刻石、北魏诸多墓志铭,以及《周书》怡峰传、薛弁传,《北史·斛律金传》等处,所举人物职称身份中均带“羽真”[15]。其它墓志中也另有带真字之例[16]。但是真歌之真与人物身份之真,似乎看不出任何关系。所以,“真歌”很可能是隋志为图简便而形成的误写,而“真人歌”和“真人代歌”才是正式的名称。

人代歌名称,我认为与真人一词有密切关系。真人自来就是道家方士一类人物时常提及的称谓。王逸注《楚辞·九思》,以真人为仙人。《魏书·官氏志》天兴三年(400)“置仙人博士官,典煮鍊百药。”天兴是辑集代歌的年代,煮鍊百药又是供道武帝服用。可见代歌冠以真人二字作为正式名称,具有道武帝的时代特征。至于这与道教有无直接关系,可能另有文章可做,这里不细究了。
《魏书·天象志》皇始元年(396):“先是有大黄星出于昴、毕之分,五十余日,慕容氏太史丞王先[17]曰:‘有真人起于燕代之间,大兵锵锵,其锋不可当’。其冬十月,黄星又见,天下莫敌。”自注:“是岁六月,木犯哭星。木,人君也,君有哭泣之事。是月,太后贺氏崩。至秋,晋帝殂。”[18]《魏书·灵徵志》记天兴四年(401)吏上言昔句注老父谓某曰:“自今以后四十二年当有圣人出于北方。时当大乐,子孙永昌,吾不及见之。”某遇老父之年为二十二岁,当前燕元玺二年(353)。以此推之,后四十二年,正当道武帝破慕容宝之岁。这些资料都说明,道武帝之兴,曾经动员不少方术之士为他制造舆论,其中最起作用的,还是王先借天象所言“真人起于燕代之间”。
皇始元年对北魏道武帝说来是个极具意义的年份[19],王先所言的这一年天象所示,就是人间变化的朕兆,真人代歌正是从此后二年邓渊着手辑集的。用拓跋正朔记后燕慕容太史丞所见天象,所言人事与拓跋帝纪又若合符契,这明明是道武帝周围之人所编造的痕迹。“大兵锵锵,其势不可当”,正是指拓跋平并州、出幽冀之兵,起于燕代之间的真人只能是道武帝。恰恰在此时出现的真人代歌,所歌颂的不是道武帝又能是谁呢?所以北魏乐府昏晨演习代歌,就是为了歌颂开国之君道武帝,以及拓跋“祖宗开基”的功业。
这些就是我认为代歌的正式名称是真人代歌的理由。代歌是拓跋史诗,又是道武帝帝业的舆论工具。同时它也承载了拓跋部人的感情,因而获得了它在这个时代应有的价值。这种文化现象,值得研究拓跋史者重视。

二、《代歌》、《代记》及其与《魏书·序纪》关系的推测

《代歌》素材来源于拓跋部民的口耳传闻。按照民族学所示的通则,这类素材总是越积越多,能说能唱,但却是杂乱芜蔓,内容矛盾。把这些长期积累的素材裁剪整理,配以合适的乐声,提升为史诗般的《代歌》,是在道武帝创建帝业的短时间里完成的。留存于《代歌》中的内容以“祖宗开基”、“君臣废兴”诸事为主,是适应道武帝本人创业治国的要求,而《代歌》的这些主要内容又正是邓渊撰修《代记》的资料依据。道武帝时拓跋部的《代歌》和《代记》这两项重大文化成果,都与邓渊有密切关系。
在道武帝以前的漫长岁月里,拓跋部社会发展缓慢,基本上停滞在“言语约束,刻契记事”[20]状态,开拓帝业的道武帝自己,也是出自结绳的野蛮人。力微以来,拓跋与外界也有接触很多的时候,所接触者或者是自幽州西渐的乌桓人,或者是以代郡、雁门郡人居多的汉人。汉人与乌桓人文明程度较高,但数量比拓跋人少,不足以在较短的时间内对拓跋部起太大的带动作用。拓跋部内缺乏各项文明制度,与道武帝经营的事业极不适应。所以当皇始、天兴的几年中,随着军事形势的大发展,拓跋部在社会、政治、文化、经济诸方面都面临转轨的急迫要求。魏收书诸《志》中多有这几年间诸项制度建树更革记载,一般都依靠人数不多的汉士的帮助。汉士如燕凤、许谦、张衮、崔玄伯等人作用最大,但除崔玄伯以外,事绩以军事谋略、政治运作居多;至于涉及文化的诸多方面,则往往另有它人专任。如音乐、官制,由邓渊司其事,史事记注也是责在邓渊。邓渊“明解制度,多识旧事”[21],是一个知识型的人才,是帮助道武帝向文治迈步的重要人物之一。
邓渊,雍州安定人,祖、父历仕苻秦,渊随父在冀州。道武得冀,以渊为著作郎、吏部郎。天兴元年(398)入代,与吏部尚书崔玄伯“参定朝仪、律令、音乐;及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魏书·太祖纪》天兴元年十一月改制诸事,首列邓渊典官制,主爵品,定律吕,协音乐[22],其中前二类详见《官氏志》,当是就皇始元年“始建曹省,备置百官,封拜五等”诸事而整齐之;后二类见于《乐志》,其中重要一项当为创制庙乐,辑集《代歌》。《乐志》在邓渊定律吕、协音乐之后连叙庙乐和《代歌》,可知《代歌》辑集功在邓渊是可以肯定的。北齐时祖珽曰:拓跋初有中原,“乐操土风,未移其俗”,意指唯有鼓角,未识其它。皇始元年(396)破慕容宝,“于中山获晋乐器,不知采用,皆委弃之。天兴初,吏部郎邓彦海(邓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23]这就是邓渊协音乐之事。
邓渊在文化上更重要的成就,是他在戎马倥偬之际受命修史。他“明解制度,多识旧事”,具有基本的修史条件;而道武帝又是深具历史感的人,在创业兴国阶段百事俱需史鉴,而拓跋旧事比起汉典来更容易为他所理解。邓渊“性贞素,言行可复”,这也是修史人选应具有的史德条件。道武帝的“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其中所谓“文记”当包括今昔史料记注在内。汉士中有意搜罗记录拓跋旧事,邓渊应是第一人。
《北史》卷56《魏收传》:“始,魏初邓彦海撰《代记》十余卷”云云,这是修魏史之始。《北齐书》卷37《魏收传》全同。《魏书·邓渊传》:“太祖诏邓渊撰《国记》,渊造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此时北魏开国伊始,国史记注暂时只能是大事编年,全书体例还谈不到。
邓渊正式受命修史之事,本传系于邓渊与崔玄伯参定朝仪诸事之下,中隔渊“从征平阳”及赐爵加官诸语。案道武征平阳,是天兴五年(402)七月事,见卷二《太祖纪》及卷九五《姚兴传》。所以邓渊奉诏撰修国记,当在从征平阳之后,距他天兴元年入代已有四年之久[24]。邓渊株连于和跋一案赐死,而和跋被刑在天赐四年(406)四月[25],所以他兼领史职时间可以确定在402年七月以后至406年四月以前,前后不足四年。史不载道武帝命崔玄伯监修,可见当时并不理解修史是个难题,没有由崔玄伯监修的必要。
邓渊撰史,规模只有十余卷[26],属草创性质,其基本情况,有关载籍所记都一样,只是书名微异。《北史》、《北齐书》称之为《代记》,《魏书·邓渊传》、《史通·古今正史》则作《国记》。前所言及的邓渊修史以“记”为称,即邓渊所典“文记诏策”之“记”。《史通·史官建置》:“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代记》年代早,自然都是根据“当时之简”,准确地说是以当时口述传闻记录为“当时之简”,所以称之为“记”是准确的,《代记》应是原始名称。《魏书》以魏为统,是北魏国史,故改《代记》为《国记》,《史通》则以唐代所见魏收书为准,亦袭称《国记》。这种差异是比较好解释的[27]。
邓渊《代记》记事包括的年代究竟有多长,载籍所见并不明确。《魏书》48《高允传》:崔浩之狱以后“世祖召允,谓曰:‘《国书》(案指崔浩监修的国史)皆崔浩作不?’允对曰:‘《太祖记》,前著作郎邓渊所撰;《先帝记》(案指《太宗明元帝纪》)及《今记》(案指《世祖太武帝纪》),臣与浩同作……。”这里把邓渊所撰之史称作《太祖记》,举以与下述《先帝记》及《今记》并列,不是用邓渊书的本名。邓渊死在道武死前三年,其时还无太祖庙号,更不可能撰成完整的《太祖记》[28],一定是后人据邓渊所撰编年记事续有斟酌增删而成。但高允所称都是诸帝之“记”,说明邓渊书名本称为“记”,或《代记》,或《国记》,这也是一证。
高允所称的《太祖记》,是严格限于道武帝本人的事迹呢,还是包括了像其它国史那样于开国之君中追叙其族姓世系以及开国以前的历史内容?我想,按中国历来修史成法,应当是后者。以邓渊其人博学而又“多识旧事”的特点,以他辑集《代歌》所获知的拓跋史诗资料,他是可以把拓跋历史梗概整理成文字的。我确信北魏之时经汉士之手保存了一些拓跋祖先资料,供以后崔浩以至魏收修史使用。最早整理拓跋祖先资料的汉士从现有资料看来,只有邓渊。
《十七史商榷》卷66“追尊二十八帝”条,谓二十八帝中惟猗 、猗卢、郁律、翳槐、什翼犍名通于晋为可据,其余凡单名者与猗等不同,疑皆道武帝时所追撰。我觉得王鸣盛所列数人以外,还有非单名者,如力微、推寅、诘汾等,其中力微之名亦见于晋代文书,所以不能一概而论。但道武帝时其先祖之名有代歌可作根据,所以断定其先祖之名大部分是邓渊辑集代歌时从鲜卑音记录而来,则是可相信的。
《魏书》卷57《高祐传》孝文帝时秘书令高祐与丞李彪等奏曰:“惟圣朝创制上古,开基《长发》,自始均以后,至于成帝,其间世数久远,是以史弗能传。臣等疏漏,忝当史职,披览《国记》,窃有志焉。愚谓自王业始基,庶事草创,皇始以降,光宅中土,宜依迁、固大体,令事类相从,纪传区别,表志殊异,如此修缀,事可备尽。……著作郎已下,请取有才用者参造国书,如其得人,三年有成矣。”
高祐等所言,是一段简略但却比较准确的拓跋先祖历史,从“披览国记”主要即邓渊《代记》而来,其内容与以后编成的魏收《魏书·序纪》所见一致,颇可窥见《国记》、《序纪》的因缘。我们且取这两者加以比较:
一,“创制上古,开基《长发》”,说的就是《序纪》黄帝后人封大鲜卑山、统幽都之北这一拓跋远古传说,如同《诗·商颂·长发》所叙殷人发祥的史诗内容。
二,“始均以后至于成帝”,世数久远,史弗能传,说的就是《序纪》始均入仕尧世,其裔不交中夏,载籍无闻,以迄于成帝毛的历史。以后道武帝追尊拓跋二十八帝,自成帝毛始,可见毛已经是道武帝认为其祖先中可信的人物,而成帝毛“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之说,也为拓跋后人所认同了。
三,“王业始基,庶事草创”,说的是《序纪》自成帝毛至圣武帝诘汾共十四帝时期。毛既可以追封,自然就是王业之始。不过人物虽然可信,事迹却是不详。只有自幽都两度南移,“九难八阻”之说,大体有今知考古材料,参照地理方位,可作印证。高祐上奏之中对此未作解释,只用“庶事草创”一语带过,说明其时除了口耳传闻以外,能见到的刻木结绳资料,未必皆能准确解读。而口耳传闻的代歌,比刻木结绳所记,应当更为可靠,更为具体。这一类拓跋祖先史实,都经过邓渊记录整理,加上他记注的道武帝事迹,共同构成邓渊《代记》,后来就基本包含在由崔浩总揽的国史之中。崔浩国史除崔浩之狱已毁的一部分以外,余下的当即高祐所说的《国记》,有三十卷之多。这种种资料,应当就是《魏书·序纪》的蓝本。
神元帝力微以下,迄于376年代国之灭,还有十四帝,高祐似皆归入“庶事草创”阶段,未作描叙。大概邓渊、崔浩所记这段历史已较详备,编年差可,不必更张[29]。这就是后来魏收书的《序纪》范围。皇始以降,北魏立国,记事日繁,制度日备,所以高祐等建议国史宜纪传表志兼备,不可仍依编年之旧。后来魏收书的全书规模就是这样,其中必定有很大的继承关系,可惜今天已无从说起了。
邓渊《代记》虽被高允称作《太祖记》,当是兼具魏收书《序纪》的全部内容,这里还有一个证据。魏收书十二帝纪,其中《序纪》在目录中排列为“本纪第一”,《太祖道武帝纪》排列为“本纪第二”,可见《序纪》是自有系统的独立存在的一纪,在魏收书中地位重要,不是附

带叙述性质。《序纪》列举的人物就是道武帝追尊的二十八帝[30]。二十八帝名字具在,世系清楚,间有大事可述,多少不等,而神元帝以后且有甲子纪年,可述大事较多。可见在邓渊书中,道武以前之事是独立成为段落的,以后就顺理成章地成为国史的前纪,也就是魏收书的《序纪》。
《序纪》应当主要就是根据《真人代歌》中“祖宗开基所由”,“君臣废兴之迹”的内容,经过邓渊《代记》的译释解读整理,才得以流传下来。《代歌》中的大事不被《代记》搜罗以致为后来《序纪》所遗的,恐怕不会很多。这也就是魏收书《序纪》在北魏史学史上极具价值的所在。根据这个事实,我认为《代歌》与《代记》同源,《代记》主要出于代歌。我还认定,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也是《序纪》实际上的第一作者。
但是代歌是歌,代记是史,两者毕竟还有不同之处。代歌虽经筛选,难说没有一点违碍内容保存其中。但它不是直接叙事,不完全是真人真事的写实,又有音乐配制的影响和限制,所以是拓跋历史的升华。加以它用鲜卑语音,传播限于宫廷之内,汉人无从理解,所以它的内容稳定,未受政治非议。《代记》则不然,它首在实录,首在直笔,否则无以称史。正由于此,它容易受到挑剔,被当轴者疑忌,所以其作者邓渊就先于崔浩成为国史之狱的第一个牺牲者。不过邓渊人微,又值国初秩序初定,未至构成大狱,不像崔浩之狱那样引人注意,引人研究。
在思考邓渊《代记》撰写的多种细节时,我觉得邓渊之书不称《魏记》也值得一究。如前所论,邓渊撰史时间是在天兴五年至天赐四年(402—406)。据《太祖纪》,登国元年(386)元月道武帝即代王位,四月由代王改称魏王,而没有说明原因;天兴元年(398)六月经过朝臣议论,道武帝裁定国号不称代而称魏。这就是说,邓渊修国史之前已有两次明令改代为魏,而国史之名理应用国家正式名号[31],称为《魏记》才算合理,但事实并非如此。
拓跋先受晋封称代公、代王,后有实土,百余年孳生蕃息于代北之地,没有整体迁动。所以拓跋珪复国之后先称代王,符合习俗民情,是很自然的事。天兴元年(398)正式定国号称帝,经过朝议,群臣主张称代本无异议。只有崔玄伯以拓跋奄有中土,且将报聘江左为由,用旧邦维新之义,主张称魏。这很可能是崔玄伯揣度道武心意,以问作答。道武帝裁定以魏为称,并以魏帝名义昭告天地。但是代人习用旧称,而且反对向中土迁徙,连崔玄伯之子崔浩都是如此。官私称谓,都是代、魏兼用,到孝文帝迁洛之前,称代更为多见,称魏较少。何德章君《北魏国号与正统问题》[32]一文举例甚多,毋烦赘叙。所以国史以代为称而不曰魏,并不难于理解。何况邓渊于国初修史,所记尽代人代事,与整理《代歌》相近,如不称代而改称魏,反而不协于时了。
何文对于道武称魏的理由,已有论证。事实上当年曹操称魏的理由,拓跋也都考虑到了。何文留下两个他所不解的问题,一个是崔玄伯为什么以“慕容永亦进奉魏土”作为他所持称魏的理由之一,另一个是登国元年四月拓跋珪何以在甫称代王后数月即匆匆改称魏王。这两个问题是互相关联的。我现在把二者揉合在一起,试作回答。
拓跋珪复称代王,是前秦灭代十年以后的事。灭代的十年中,代北草原各部族部落经历了长期的混乱,刚复国的代王一时不可能把秩序恢复过来。其中拓跋珪最感困难的问题,是他的代王地位得不到普遍认同。与拓拔部最亲近的贺兰部和独孤部内,各自都有拥护的部落和反对的部落,拓跋珪随时要进行对反叛者的战争。最急迫的战争挑衅更是来自拓跋部内,因为拓拔部内并没有较稳定的君位传承制度,昭成帝以前,兄终弟及和父死子继总是交错出现,夹杂着残酷而复杂的斗争。拓跋珪是昭成帝的嫡孙,但珪父寔(献明帝)并未正式履位即死,昭成余子即献明诸弟存者尚多,按照兄终弟及的部族习俗,他们都有继承君位的权力。昭成幼子窟咄,是珪的季父,国灭时被掳徙长安,后因前秦之乱而随慕容永东迁并州闻喜、长子。慕容永称西燕,以窟咄为新兴太守。新兴,以地理位置言,与代北只有一山之隔;窟咄,以个人身份地位言,有继承已死的昭成帝而为代王的权力。而且他此时还有一定的实力。看来,他受慕容永命出为新兴太守,目的就是为了注视代北,相机进取。这种危殆形势,初即位的代王珪是不可能不觉察,不能不警惕的。
以《魏书》、《通鉴》等史籍互参,可以略见皇始元年正月拓跋珪即代王位以后的代北局势和代北周边局势是极为复杂多变的。皇始元年正月,可以看到三股势力同时活动。一,拓跋珪于牛川称代王;二,慕容垂在邺称帝,是为后燕;三,慕容永由长安东出,中途闻垂称帝而止驻河东闻喜,此处与邺皆为旧魏地。三足鼎立,都谋求前秦崩溃后并、幽、冀区域的统治权力。窟咄被委以新兴太守,独孤刘亢泥迎窟咄入代北与珪争位,都是此年春季的事。四月,珪由代王改称魏王;六月,慕容永遂称藩于后燕慕容垂。这暗示慕容永、慕容垂有可能联合共击拓跋珪。十月,慕容永进驻长子,是为西燕。长子和闻喜一样为旧魏之地。这表明拓跋周边彼此戒备的力量,全是驻在旧魏之地。拓跋珪其所以在此时匆忙改称魏王,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既警告慕容永,也警告拓跋窟咄,不许插足其间,不得侵犯代北。至于慕容垂,他不能容忍自长安外奔的慕容永以及附属于永的拓跋窟咄染指幽、并。是冬,拓跋珪联络慕容垂大败入侵的拓跋窟咄,代北局势才得以初步稳定[33]。
慕容永等东来时颇有军力,但无退路。当慕容永求入冀、幽不成,北上代北受阻,只得龟缩于长子一隅,还不时受到后燕压力之时,处境是艰难的。所以可以理解,《太祖纪》登国七年(392)十二月所载“慕容永遣使朝贡”之事,就是西燕怵于后燕压力,求代为与国以图存的表示[34]。同时也可以理解,天兴元年(398)道武帝在邺再议国号时崔玄伯所说“慕容永亦进奉魏土”,所指即此。至于“进奉魏土”,虚词而已,并无实事。所谓魏土,即指闻喜、长子。崔玄伯所谓奄有中土,旧邦维新,也是此义,只是地面更广而已。
综观前后,皇始元年,拓跋窟咄随慕容永入闻喜,拓跋珪敏锐地感到来者不善,立即表示他自己是魏土之王,改国号曰魏;登国七年,慕容永遣使北魏,也许真有过愿以长子魏土“进奉”的口头表示;天兴元年,拓跋珪又获得了旧魏要地邺城。把这些资料合起来看,研究所谓代、魏之辩问题,岂不是多了一重思路吗?何文遗下他所不解的两个问题,到此是不是算解决了呢?
以上,由探索《代歌》、《代记》同源及其与《魏书·序纪》关系,进入到所谓代、魏之辩的疑难之点及其解决门路。从这里我又想到,正史中对本朝先世历史追溯能做到像《序纪》这样既相当久远又比较准确,还以其“得体”[35]而受到四库馆臣的称赞,是少见的。追根溯源,拓跋古史中的这一特异之处,不能不归于国初邓渊同时完成辑集史诗《代歌》和记注古史《代记》的开创性成就。

三、国史狱事造成的史风问题

我留意考察邓渊之狱对北魏一朝修史的长远影响,是受到台湾青年学者陈识仁《北魏修史略论》[36]一文的启发。陈文看重邓渊之死是道武帝猜疑的结果;又提出崔浩国史之狱对北魏修史造成影响。这两点立意我都赞成,只是觉得两者之间似乎有某种关系,而陈文未曾措意。我现在进一步思考的是,第一,邓渊一介书生,不涉权势,要是真有什么事引起道武帝猜疑的话,最可能是修史中出现了敏感问题;第二,国史之狱影响北魏一百余年,历来把这笔帐从崔浩之狱算起,我看应以邓渊之狱为始。邓渊是受命修史的第一人,其狱事内容与崔浩基本一致,崔浩之狱正是邓渊之狱滥觞所及的结果。
《魏书》卷24《邓渊传》,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和跋[37],代人,世领部落[38],与拓跋部关系久远,随道武帝,以武功显。天兴元年(398)和跋以行台尚书镇邺;邓渊从弟晖为行台尚书郎,与和跋“厚善”。道武杀和跋,罪名是修虚誉,性奢淫。“修虚誉”云云,罪名空泛,可重可轻,毕竟不是犯上作乱一类死罪。邓渊是新附文臣,一直“谨于朝事,未尝忤旨”,史臣叹其“贞白干事,才业秉笔,祸非所罪,悲哉!”邓渊之死不但时人愍惜,道武本人也是“既而恨之”。由此可见邓渊之冤昭然在人耳目,但冤情底蕴却迄今无人探究。
《魏书》卷 125之二《天象志》,天赐四年(406)四月“诛定陵公和跋”。邓渊赐死当是紧接其后之事。邓渊《代记》记事,最晚当止于此年,下距道武帝之死还有三年半的时间。道武帝死于天赐六年(409)十月,年三十九,算是盛年之君。但他自幼多艰,历经波折,从复称代王到建立帝业,历二十四年之久,在政治上已到晚期,是嚆矢之末了。天兴五年(402)阳平之役获胜,道武帝驰骋疆埸生活从此结束,此后他思虑所及,多是“追思既往成败得失”,以及穷思如何跳出拓跋历史争位斗争的老路,实现帝位的平稳传承。这是一个非常棘手,很难决断的问题。道武晚年多猜疑忌妒,当与此有密切关系。而邓渊奉命修史,恰恰就在这个时候。
无力执政的道武帝,寄情校猎于新筑的犲山离宫,有时一年行幸三次之多,每次长达数月。他嗜服寒食散,药动颠狂不已。天灾变异使他恐惧,但更多的恐惧是政治性的事件。这种身心状态加重了他喜怒乖异,杀戮无节。邓渊之死也就是在道武帝这种心态下发生的。
据《官氏志》,天兴四年(401)九月“罢外兰台御史,总属内省”。可知邓渊天兴五年居馆职之时,是内省官员,修史事务,包括史实的搜求、翻译、斟酌、取舍,巨细无遗,都是在道武帝眼下进行。道武帝是一个深具历史感的人,对于拓跋旧事之可资借鉴者是非常留意的。崔玄伯对他谈论的许多汉典故事,虽然对他有启迪之处,但毕竟是隔了一层。而拓跋故事中本有许多可以资治者,道武帝更易理解,可以产生联想,直接利用。但这些保存于刻契结绳中的拓跋旧事,需要专门的人来解读;拓跋先人的口碑歌谣在史官中编辑使用,也先得翻译成汉文。所以《史通·史官建置》中说:“当代都之时,史臣每上奉王言,下询国俗,兼取工于翻译者,来直史曹。”邓渊供职史馆,必然也是“上奉王言”,即听取道武指授;“下询国俗”,即了解拓跋旧事,包括寻绎《代歌》,经过翻译由汉字记录,备国史采用。《邓渊传》史臣谓渊“才业秉笔”,这正是史臣的日常职分所在,也正是道武帝不时指授检核之处。道武帝喜怒乖常,史实中疑窦之生,全在乎他一念之萌,而史臣也许并未经意,它人更难理解。我推定邓渊死于修史之狱,就是从这里出发的。这是一场所谓腹诽之狱,一场不动声色的文字狱。它以诬枉之词定谳,后人不能确指原因,又不信坐和跋案的谰言,只能让它成为一樁不明不白的公案。邓渊人物不显,其死事又在国初,魏史中论及者少,后来又被更大的崔浩之狱遮掩,所以后世留意及此的人就少而又少了。
邓渊《代记》可能包含什么样的敏感问题,以至形成北魏头一樁国史之狱呢?据《邓渊传》,渊造《国记》(案当时的本名是《代记》)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按史官修国史成例,这只是一种草创,后人谓之长编,今人所称初稿。刘知几之言曰:“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然则当时草创者资乎博闻实录,若董狐、南史是也;后来经始者,贵乎儁识通才,若班固、陈寿是也。”邓渊之书显然只是史实排比的实录,以待后之儁识通才删定勒成,一般不会有雌黄褒贬。连所谓“当时之简”,也只是临时自鲜卑语翻译而成,并无现成简牍可用。如果此中出现口实,不过是译文中事实取舍而已。邓渊主持而成的译文中,不大可能有所谓“春秋笔法”问题,因为如前所说,邓渊贞白干事,未尝忤旨,亦无权势背景,遇到敏感问题,一定是小心处理,以避嫌忌。

而且,《代记》虽被称作《太祖记》,当包括拓跋先世事迹,相当于魏收书中的《序纪》;而真正的《太祖记》部分最多只记到天赐四年,并未完成。如果邓渊书被认定有问题,只能是出在拓跋先世和道武帝本人至天赐四年为止的这个时间段里,而此时间段内道武之史是当世之事,道武亲自过问,估计难产生嫌疑;而道武先人事迹,相当于魏收书的《序纪》部分,则其事其言已久历时日,滋生嫌疑的可能要多一点。现在就来看能否找到一些蛛丝马迹。
不少学者认为崔浩国史之狱所谓“备而不典”、“暴扬国恶”,是指国史所录的一些拓跋故事,在昔本为旧俗使然,无关风化,在今则不合常道,有悖人伦。史臣直笔招祸,最易在此方面产生。周一良先生《崔浩国史之狱》[39]判断献明帝死后贺后被其父昭成帝收娶,所以贺后先后所生既有献明帝之子,又有昭成帝之子,诸人行辈既为兄弟,又为叔侄。这在北俗中蒸报之事本无所嫌,如果《代歌》中有此等内容,也不一定会受到注意,可是记入《代记》,诸人行辈混乱所涉人伦问题就暴露出来了。我自己在考察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时,对此现象也有所发现,有所议论。国史所记这类本无足异的拓跋旧事,在道武帝成为专制帝王以后极易成为定罪口实,崔浩国史中的“不典”、“国恶”,的确可以从此得到解释。进一步说,这些口实,当以道武建国以前所传而迻译所得者居多,记载这些事的国史,并非崔浩新撰而是已有的邓渊《代记》。因为邓渊有《代歌》参考而崔浩则不可能有新的资料可据,不能凭空造成。我认为崔浩之狱滥觞于邓渊之狱,这是一个重要理据。至于在两次狱事中究竟是哪一个具体问题形成道武帝和太武帝的痛点,是否每次还有更为直接的兴狱的政治需要,由于资料缺乏,本文不拟探讨。
还有一个值得思索的现象,就是太武帝恢复史馆以后,修史之事与以前邓渊相比较,进展非常缓慢,似乎有某种障碍存在。案邓渊死在天赐四年(406),太武帝恢复史馆在神二年(429),其间二十余年国史“废而不述”;崔浩书成而大狱兴,在太平真君十一年(450),其间又是二十年有余,新纂成者除补足的《道武纪》以外,不过是《明元纪》、《太武纪》(未竣)而已。时日迁延太久,令人生疑。其中原由,我们先从太武帝修国史二诏试作分析。
据《崔浩传》,太武事功有成,神二年“诏集诸文人撰录国书,浩及弟览、高谠、邓颖、晁继、范亨、黄辅等共参著作,叙成《国书》三十卷。”此为前诏。太延五年(439)太武帝平凉州,完成了大功业,于是诏崔浩监修国史,大意说神后戎旗仍举,而“史阙其职,篇籍不著,每惧斯事之坠焉”。所以采取特别措施,“命公留台综理史务,述成此书,务从实录。”此为专门给崔浩之诏,我称之为后诏。二诏不同之处,一是后诏崔浩留台监秘书事,综理史务,并以中书侍郎高允、散骑侍郎张伟参著作,这就是专人专责,提高史臣档次,务期于成,而不是像前诏那样,诸人共参著作,崔浩只是参与者之一厕列其间而已;二是后诏提出特别的编纂要求,这就是“务从实录”,这是前诏所没有的。至于前诏所说“叙成《国书》三十卷”或是预期之词,实际上当时未曾完成而完成于后诏之后,所以后诏才说此前“史阙其职,篇籍不著”。
细审二诏,我认为修史难成,障碍在于史臣趑趄不前。太武帝前诏以一般事务看待修史之事,并未特予重视,对障碍也没有估计。趑趄不前的原因,我认为是邓渊史狱遗留下巨大影响,其中关键又是史臣不敢直笔实录。所以后诏才强调“务从实录”,实际上是太武帝亲自承诺不会重复出现邓渊史狱,以安史臣之心。
邓渊“祸非其罪”,必修史有所违碍,只是谁都不便明言。这是史臣寒心之事,是明元帝一朝史事“废而不述”,太武帝时仍然“篇籍不著”的真正原因。太武帝前诏所命史官,邓渊之子邓颖就在其中,这可能是太武帝故作无事的一种姿态,但事实上会产生负面影响。太武帝后诏正是针对此中问题,针对史臣缄口裹足,惟恐愆失心态而发。后诏特命有地位、有担当、有能力的大臣崔浩总监其事,也是表示有事可由崔浩负责,不致牵连史臣。一般说来,修史中是非得失的评骘,惶惶中的文士或可藏而不露,但是据实录文,文士逃避责任的余地很小。所以“务从实录”一语,加上崔浩总监,应当能释史臣重负,让他们安心著述。
崔浩本来是有德于太武帝的,太武帝得以早为储君,抚军监国,以至于为国副主,就是出于崔浩向明元帝的力荐。崔浩极富军国智谋,迭有大功,太武帝令歌工历颂群臣,有“智如崔浩”之颂。而且崔浩在朝谨敬避嫌,“以示不敢犯国”,甚至早在道武帝杀戮无节,左右力求逃隐之时,崔浩随侍左右,“独恭勤不怠,或终日不归”。他是邓渊之狱的目击者。所以用他综理史事,应该是最合适的人选,是推动史臣尽力著述的重要一步。他本人应该是深知太武帝对他的知遇之恩的。
崔浩不负所托,受命十年,国史告成。道武纪及拓跋先人追叙部分以邓渊《代记》为蓝本而有所加工,所谓“删定勒成之笔”,当出崔浩。邓渊死后道武纪所缺部分自然也由崔浩续成。太宗明元帝及世祖太武帝纪由崔浩、高允同撰。三纪的注疏高允居多,总裁在崔浩[40]。从后来崔浩罹大狱而高允无罪的情节看来,除了景穆极力保护高允以外,也许还有别的原因,例如所谓“备而不典”问题不出在太宗、世祖二纪,而出在崔浩续成太祖纪中;不出在各纪注疏而出在选材综理方面,等等。前有邓渊之狱,崔浩又蹈覆辙,我看只能从崔浩当真执行“务从实录”寻求解释。
崔浩总裁史事,首在破邓渊狱后史臣裹足局面,一切惟“务从实录”是崇,显示自己忠于太武帝的付托。而竞趋之士为了迎合崔浩,更以国史刊石立衢,“欲彰浩直笔之迹”。古来权势宠幸者于臣君相与之际,有时未达一间,酿成事端,自贻伊戚。智如崔浩,也不免忘乎所以,竟不思伴虎之谚。所以高允议论刊石诸事,“分寸之间,恐为崔浩万世之祸”。希君之旨以实录为依归,以直笔相标榜者,终于栽倒在直笔之下!人主的复杂心态使希旨者祸福无常,给史学造成祸害,问题不正是出在“分寸之间”吗?
古书所见,有一类智者以“揣摩之才”见长。赵国虞卿作《虞氏春秋》八篇[41]“以刺讥国家得失”,其中有“揣摩”一篇。隋代杨素称赞封伦善于揣摩,史臣称封“多揣摩之才”[42]。崔浩盖亦封伦之俦,揣摩人主之意而遭反噬,成为千古史坛话题。崔浩以直笔、实录获谴,不悖于史德。但他并不理解太武帝所言“务从实录”,除了有惩于邓渊狱事外,还有他的理解与需要。诚如《史通·序传》所说:“苟能隐己之短,称其所长,斯言不谬,即为实录。”“盛矜于己而厚辱于先”,那就难保不取祸了。当拓跋君主尚生活在名教以外之时,先人事迹无涉荣辱,无大违碍,而当皇权在握,礼法人伦成为衡量准则之时,所谓实录也就是另有尺寸了。如若不然,皇权就要裁剪史法,约束史家。这也是研究中国史学史的一个值得思考的问题。
实录之说始自刘向等人赞誉太史公书之“其言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从此实录被尊崇为史德之首。至于著史冠实录之名,唐宋定实录之制,明清开实录之馆,历代相仍,有保存史料之功,但难说都能遵循太史公之所界定。刘知几以张俨《默记》、孙盛《晋阳秋》为例,“以验世途之多隘,知实录之难遇也”。[43]他感叹“古来唯闻以直笔见诛,不闻以曲词获罪” [44],这似乎就是暗指崔浩狱事。
史馆再开以后,直笔仍然是修国史中的大问题。孝文帝尝谓史官当“直书史实,无讳国恶”[45],但史官自有忖度,趋避在己,再也不会出现邓渊,更不会出现崔浩。韩显宗答孝文帝之问,自诩“直笔而无惧”[46],但实际上却无寸进。近一个世纪中史官备位,少有著述,崔光直云“但须记录时事,以待后人”[47];崔鸿撰《十六国春秋》,以其涉国初事,惧其言多失体,迟不敢行[48]。邓渊、崔浩事件阴影难消,国史之学难振。尔朱荣入洛后竟有山伟、綦儁等倡言“国书正应国人(案指代人)修缉,不宜委之余人”,以至二十余年中代人掌史事,一无所成。及至东魏魏收受修史之命,执政者所关注议论,忧心所在仍是直笔问题。他们自然知道不许直笔则无史可言,允许直笔又惧扇扬褒贬。高欢戏语魏收“我后世身名在卿手”;魏收言志,故意标榜“臣愿得直笔东观”[49]。高洋效法孝文帝之意,直言“好直笔,我终不作魏太武,诛史官”[50]。诛史官之始作俑者实际上是道武帝,此时其事已被人淡忘了。这些资料陈识仁的文章都已引用,无烦多说。只是附加一句话:修国史引出如此纷纭,历代少见,追根溯源,还是北魏史风造成,这种史风正是国史狱事不可避免的后果。
魏收著史,时过境迁,拓跋先人行事已失去敏感性,所以收书中得以保留一篇《序纪》,分量虽然不大,迄今仍为研究拓跋先人历史唯一重要资料,而且是基本上经得起验证的资料。经过邓渊、崔浩两案以后,《序纪》中的资料一定有不少磨合删削,在相当程度上已失去从鲜卑语迻译时的原始面貌。但是五胡诸载记之中,还不见有保存先人历史资料像《序纪》那样系统准确之例。只是自邓渊、崔浩以来百余年中史风污染,当途者既求誉于国史,又畏国史之毁;既不能不标榜直笔实录,又吹毛求疵于直笔实录之中。风气积久,洗之愈难。不止是帝王干预修史,连权势之辈都想利用国史巩固家族地位,多求史官为先人作佳传。这就是《史通·直书》所说史臣也只有“宁顺从以保吉,不违忤以受害。”魏收的一部《魏书》,虽不远于是非,但亦难免无疵,未行时已多纠纷,刊布后被指责为“秽史”,以至于历代学者屡起为魏收辨诬。在我看来,这也是北魏史风污染的一种后果。

行文既竟,还有几句赘语。近年我所作拓跋早期历史研究的几篇文章,某些环节找不到确证,因而有推测成分,论述难得周全准确,大体都随处注出了。本文也是如此。对邓渊狱事性质的判定,旁征颇有,但迄今找不到直接证明,而以下行文与此点关系较大。这在逻辑上是犯了“丐词”的毛病。我想,古史中有大量“待垦荒地”,由于直接资料缺乏,研究难于下手,历史的空白点难于填充,杂乱的现象难于作出说明。出于这种考虑,我把此文(以及其它相关文章)作为研究拓跋历史的一种思路,一种探寻,而不是作为确凿的结论奉献给读者,希望能起到一点从空白处、从杂乱中探索拓跋历史问题的促进作用。果能如此,此文本身即令言而不中,我觉得还是值得的。也许,这可以从“得鱼忘筌”、“得意忘言”之义来理解吧。

[1]拙著《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曾出一长注解释“代歌”问题,但未细究。
[2]参唐长孺《魏晋杂胡考·步落稽》,《魏晋南北朝史论丛》。
[3]《魏书》卷108之三《礼志》三。
[4]阎步克教授见告,北魏的太常乐户,属杂户之一种,数量不少,可以视为拓跋朝野崇尚乐舞的佐证。我同意这个说法。
[5]赵超《汉魏南北朝墓誌彙编》(以下简称《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2年, 303页。元怡、元肃,景穆帝之后,《魏书》卷19下有传。本文所用赵超《汇编》资料,均分别与中州古籍出版社1989年版《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第3、4、5、6册所刊拓本对勘。
[6]

FONT>《汇编》,150页。
[7]《汇编》,314 页。张瓘并非代人,大概是受代风影响而作此说,也可能只是自饰家世而已,并非真有可吟可唱的歌谣。案墓主此年七月死,正朔在北魏,十一月葬,已属东魏正朔了。
[8]《汇编》,381页。此墓志《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未收。
[9]元侔墓志见《汇编》60页。据《北史》卷15,“昭成帝九子,庶长曰寔君,次曰献明帝寔,次曰秦王翰,次曰阏婆,次曰寿鸠,次曰纥根,次曰地干,次曰力真,次曰窟咄。”此受久即寿鸠,居第五,而墓志则谓为第八子。按罗振玉《丙寅稿》已注意到《魏书·宗室传》所载此世系与墓志有异。岑仲勉《元和姓纂四校记》(1994年整理本,中华书局,401页)亦略有说。又,《元和姓纂》引此世系中有名翰者,即秦王翰,《北史》作地干。
[10]《魏书》此卷据《北史》及它书补,而《北史》与今本《魏书》又有世系歧异处。点校本《魏书》校勘记据赵万里说,以此歧异处《北史》是而《魏书》非。
[11]元昭为昭成帝玄孙,志见赵超《汇编》页146。
[12]《魏书·官氏志》,宗正,六卿之一,第二品上。《汇编》140页元斌墓志,斌为景穆帝曾孙,官宗正丞,“器识闲雅,风韵高奇,澹尔自深,攸然独远”,完全是汉人名士气质。这样的知识分子拓跋人中还很少见。
[13]马长寿《碑铭所见前秦至隋初的关中部族》。页57—59,中华书局,1985。碑在陕西渭北下邽镇。
[14]据《原州古墓集成》,文物出版社,1999。
[15]近见日本学者松下宪一提交北朝史国际学术会议论文《北魏內朝制度考略》,所辑史籍及墓志中带有羽真号者有十六例。羽真一词迄今尚无确解。松下认为系北魏爵名以赐内附者。但上举各例多有于羽真之外另有爵名,而且还有皇族人物,则羽真之义毕竟难于确认。
[16]文成帝南巡碑尚有折纥真、斛洛真。另外,《汇编》267页比和真, 294页他莫汗真,365俟勤真,是否都是人物职称身份之词,不敢肯定。
[17]王先《魏书》只此一见。《晋书·苻坚载纪》记淝战中苻融陷寿春,执晋安丰太守王先。二王先年代相近,不知是否一人。
[18]《天象志》此卷魏收书亡,后人取张太素书补入,参点校本校勘记。此年天象志既记北事(贺太后崩),又记南事(晋帝殂),盖此时已开始有了南北两分认识,参见下注。
[19]《魏书·乐志》释皇始为开大始祖之业;《通鉴》胡注认为“南北之形”定于此年;正光二年杨氏墓志有“皇始之初,南北两分”之语(见赵万里《集释》及赵超《彙编》)。《天象志》(三)天兴元年(398)十二月“群臣上尊号,正元日,遂禋上帝于南郊。由是魏为北帝,而晋氏为南帝。案初上尊号是皇始元年事,即帝位在天兴元年,大抵北帝、南帝之形定于皇始,制度确定实施则在天兴。
[20]《魏书》111《刑罚志》。
[21]《魏书》24邓渊传。
[22]其下还列仪曹郎中董谧撰郊庙、社稷、朝觐、宴飨之议,三公郎中王德定律令、申科禁,太史令晁崇造浑仪、考天象。连同邓渊在内,都是当时各有专长的汉士。吏部尚书崔玄伯则总而裁之。
[23]《隋书》14《音乐志》中载北齐祖珽上书之言。
[24]陈识仁《北魏修史略论》(见《结网编》,台湾东大图书公司1998)237页文中,参考杨翼骧编《中国史学史资料编年(一)》(南开大学出版社,1987),断邓渊受命修史在天兴元年(398),似可酌。
[25]见《魏书·天象志》。事详后。
[26]《史通·古今正史》作十卷。
[27]《南齐书·魏虏传》谓平城“西三里刻石写五经及其国记”。此盖南人据传闻崔浩刻国史事,其国史亦称“国记”。称史书为记,《史记》、《东观汉记》都是例证。
[28]太武帝时,太祖这一庙号还是指平文帝;道武帝从烈祖之称改称太祖,是孝文帝太和十五年事。高允在太武帝时何得用太祖之号称呼道武帝?所以这整段文字都是经过后人改写的,不是太武帝时的原状。
[29]《魏书》卷62《李彪传》“自成帝以来至于太和,崔浩、高允著述《国书》,编年序录,如《春秋》之体,遗落时事,三无一存。彪与秘书令高祐始奏从迁、固之体,创为纪传表志之目焉。”修史人物不列邓渊,只能说明邓渊《代记》内容已被崔浩、高允之书吸收了。“三无一存”之说是笼统估计,以情理言,当是年代愈早,存者愈少。
[30] 参《十七史商榷》66“追尊二十八帝”条。《序纪》中只有二十七帝之名,是由于昭成帝之子、道武帝之父寔,未立早死,只附见于《序纪》昭成三十四年而未独立立目之故。
[31]例如《礼志》(一)天兴元年道武帝即帝位祭天地,理当用正式国号,故祝辞用“惟神祇其丕祚于魏室”之语。
[32]《历史研究》1992.3.何文着重分析拓跋力求争神州正统,改代为魏,守旧者则仍以代为称。称魏称代,何文举证甚多,文献墓铭均有。
[33]《通鉴》记永入长子即位在前,窟咄败亡在后,《本纪》记二事先后相反。实际上这大致是同时发生的事。
[34]代国无力助西燕抗衡后燕,西燕终于在394年为后燕所灭。
[35]《四库全书总目提要》史部《三国志》条。
[36]见《结网编》,台北市东大图书公司出版,1998。
[37]《魏书·官氏志》神元时内入诸姓有“素和氏,后改和氏”,和跋历代当世领素和部落。《元和姓纂》卷8去声十一暮,素和氏:“后魏有尚书素和跋。”
[38]和跋部落所驻,可以考知。《和跋传》太祖校猎豺山,“群臣佥言跋世居此土,祠冢犹存”。据《读史方舆纪要》卷40,豺山在善无,今山西右玉境,但有异说。
[39]见周著《魏晋南北朝史札记》,中华书局,1985。
[40]与高允同参考作的张伟,从其本传看,不但未罹刑罪,甚至未提及参预修史之事。大概张伟在后诏中虽有其名,而实际上未尝参与。
[41]《史记》卷76《虞卿列传》。《汉书》卷30 《艺文志》著录《虞氏春秋》十五篇,另有《虞氏微传》二篇。
[42]《旧唐书》卷3《封伦传》。
[43]《史通通释·直书》。
[44]《史通通释·曲笔》。参同书《疑古》引《孟子》和汉景帝、魏文帝之言。
[45]《魏书》卷7《高祖纪》(下)
[46]《魏书》卷60《韩麒麟传》附显宗传。
[47]《魏书》卷67《崔光传》附崔鸿传。
[48]同上。
[49]《北史》卷56《魏收传》。
[50]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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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宝国:读《拓跋史探》

田余庆先生新作《拓跋史探》已于2003年3月由三联书店出版。全书24万字,主要讨论了三个方面的问题。第一,北魏子贵母死制度与离散部落的关系。第二,拓跋与乌桓共生的问题。第三,《代歌》、《代记》与《魏书》序纪的关系。我认为,其中第一部分是全书最为重要、最为精彩的部分。以下的讨论主要围绕这部分展开。 
关于北魏子贵母死这一现象,前人早已注意到。赵翼说:“立太子先杀其母之例,实自道武始也。”(《廿二史札记》卷一三“《魏书》纪传互异处”。)周一良先生说:“拓跋氏入中原前之旧制,凡其子立为太子者,母妃先赐死,至孝文帝母犹因此而被杀。但北方其他少数民族未闻有此风俗。且游牧部落亦不如封建王朝之易于发生母后专权之例,其来源尚待研究。”(《魏晋南北朝史札记》)韩国学者朴汉济对此提出过一个解释。他认为,子贵母死既非拓跋旧法,也非汉制,而是北魏胡汉体制中的特殊事物,其目的是为了加强皇权。(朴说见田书所引)这个解释是不错的。 
关于北魏离散部落,《魏书》中一共有三条记载。《魏书》卷一一三《官氏志》:“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魏书》卷一○三《高车传》:“太祖时,分散诸部,唯高车以类粗犷,不任使役,故得别为部落。”《魏书》卷八三上《贺讷传》:“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对于道武帝离散部落,分土定居之举,研究者多从拓跋社会由部落联盟向国家转变这个大的时代背景下求得解释。这个解释也是不错的。 
总之,不论是子贵母死,还是离散部落,都是老问题了,而且也都有了不错的解释。不过事情常常是这样的,不错的解释往往对我们妨碍最大,因为它使得我们有理由停下来,不再进一步思考。田余庆先生的可贵之处却恰恰是不满足于此,而是按他惯常的思考习惯,在一般人停下来的地方继续穷追不舍。他指出:“拓跋鲜卑,相对于先后兴起的其他胡族说来,是一个发展缓慢的部族。东汉桓帝时拓跋南迁,‘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群体庞大松散。汉末建安年间拓跋诘汾再次南迁,部落联盟更扩大了。《魏书·官氏志》所谓‘七族’、‘十姓’,是拓跋部落联盟新形成的核心,血统亲近,‘百世不婚’。拓跋部作为联盟领袖,其后妃必取之于七族、十姓以外的部落,其女子也必于七族、十姓以外择偶。因此,在一定的时间内,可能出现一些与拓跋部世代为婚的部族,形成于拓跋部的特殊关系;由于君权不张,拓跋后妃也就自然而然地居间起着联络作用,甚至有可能成为维系拓跋部落联盟的关键人物。”(24-25页)在本书的另一处,作者明确写道: “道武帝建国,并没有强大的外界敌人要去认真对付,真正棘手的倒是他的母族部落和妻族部落,甚至还有他自己的母、妻。这一现象令我恍然大悟,原来道武帝用战争手段”离散部落“,首当其冲的竟是母族贺兰和妻族独孤,这并不是偶然的现象。打破部落联盟的束缚,建立帝国,是此举直接的,急切的原因。至于更为根本的社会原因,如部落役使之类,在当时似乎是第二位的。……离散部落之举和子贵母死制度看似无涉,却是内蕴相通,后者是前者的后续措施。”(3页)至此我们看到,作者从他独特的思考角度出发,终于把本来属于皇室内部的子贵母死制度与看似毫不相干的离散部落问题结合了起来。两个问题的结合真可谓互相发明,相得益彰。如果没有联系到离散部落,关于子贵母死的问题实际上已经无话可说;如果没有联系到子贵母死,离散部落的问题就难以落到实处,而只能是国家形成理论的一个具体例证而已。 
诗歌语言中有所谓“陌生化”之说。一位诗人朋友曾就此向我解释说,“形式主义”批评家们提出过一个概念。他们认为文学,这里主要指诗歌,目的就是要把语言“陌生化”,也就是说,让语言能够给人以新的刺激,提供看待世界的新角度。借用这样一个概念,我们不妨说,田余庆先生也是把我们熟悉的问题陌生化了。在原本已经题无剩义之处开掘出了新的局面,提供了新的思考动力。不过我这里要强调的是,诗歌语言的“陌生化”是诗人的有意追求,而田余庆先生的“陌生化”却并非刻意为之,而只是他研究工作的客观结果而已。 
与陌生化的结果相反,对于熟悉他研究特点的人来说,作者在书中所使用的研究方法是一点也不陌生的。这个方法是什么呢?其实就是政治史的方法。我们知道,在《东晋门阀政治》一书中,作者曾研究了南方几大家族的政治关系,而在《拓跋史探》一书中,作者研究的则是北方几大部族的政治关系。这本书的各个部分总括起来说,实际上就是一部拓跋早期政治史。众所周知,年鉴学派重视长时段,而对于属于短时段的政治史则比较轻视,认为是“转瞬即逝的尘埃”。这个思想对我影响很大,所以在以前写的《读<东晋门阀政治>》一文中,较多地指出单纯政治史的缺陷。但是读了《拓跋史探》,我却感到政治史的方法也有它不容忽视的长处。政治史虽然不能解释一切,但从此入手,却也可以发现并解释民族史上的很多重要问题。具体到早期拓跋史,政治史的方法显得尤其必要。如果从传统的民族学的角度去研究,除非有更多的考古发现,否则已经没有多少可以利用的资料了,而一旦从政治史的角度切入,就会发现还有不少值得我们分析的素材。正是借助于政治史,作者才描绘出了一个早期拓跋族的隐约身影。由此,拓跋早期的历史不再只是一种部落→国家的理论概念的演进,而是变得具体了、生动了、活泼了。 
研究政治史,不只田余庆先生一人。但他的政治史研究却别具一格,颇有值得论说之处。我们知道,研究政治史,既可以依据政治学的某种理论框架展开,也可以不要这些框架。在我看来,田余庆先生属于后者。我们看作者在本书前言中的一段话:“五胡十六国这一破坏性特别突出的时代得以结束,归根结柢是五胡日趋融合,其主要部分终于陆续积淀在农业地区而被汉族文明逐渐同化之故,这可说是今天史界共识。但是,在这漫长过程行将结束而又尚未结束的时候,为什么是拓跋部而不是别的部族担当了促死催生的任务呢?”(1-2页)我们再看作者在《东晋门阀政治》中就“王与马共天下”说的一段话:“为什么江左会出现这种政治局面呢?总的说来,偏安江左是八王之乱和永嘉之乱的产物,而江左政权依赖于士族,则是门阀制度发展的结果。士族高门与晋元帝‘共天下’,归根到底可以从这里得到解释。但是这还不能说明为什么是琅邪王氏而不是别的高门士族与晋元帝‘共天下’的问题。”(3页)这两段话充分反映了他对历史的认识。这个认识简单地说就是:当时的事情必有当时的原因。由此,他自然不会满足于理论框架给出的解释,也不会满足于一般性的说明,而是一定要找出一个具体的历史原因。受这种认识的引导,他在本书中又有如下的一段话:“我不排除道武帝曾在某个时候发布过离散部落号令的可能,也不排除某些具有定居条件的部落俯首接受号令的可能,但不认为所谓离散部落主要就是如此而无其他更直接、更急迫的原因和具体的过程。”(62页)把问题具体化的思路会很自然地诱导出新的疑问:道武帝究竟是在什么时间?在什么地点?离散了哪些部落?道武帝母后究竟又是来自于哪些部落?回答了这几个问题,离散部落与子贵母死之间的关系就自然地呈现了出来。在解释历史现象时,研究者很容易急切地求助于“规律”、“趋势”来加以说明,他却反其道而行之,一再向“具体”索要答案。与众不同的思考方法使他更像是一位旷野中的孤独旅行者。在他不断的追问中,泛泛的解释愈来愈显得苍白无力,而我们原本熟悉的问题也终于变得陌生了。 
研究早期拓跋史,面临的最大困难是资料太少。作者虽然竭尽全力钩沉索隐,但很多地方还是不得不以推测来弥补资料的不足。这之中有的推测极有道理,给人以启发,但也有的推测难免令人生疑。 
在《<代歌><代记>与北魏国史》一文中,作者指出《魏书·乐志》中《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应该就是拓跋史诗。根据有限的记载,作者进而推测,在当时替道武帝整理、辑集代歌者只能是汉族士人邓渊。以后邓渊又奉命修《代记》,《代歌》中的内容应是《代记》的主要资料依据。因此《代歌》、《代记》同源。邓渊之后,又有崔浩修国史。记录了早期拓跋史的《代记》基本包含在了崔浩的国史之中。这些资料以后又成为魏收《魏书·序纪》的蓝本。因此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应是《魏书·序纪》的第一作者。由此,作者就勾勒出了《代歌》→《代记》→ 崔浩国史→《魏书·序纪》这样一条史学发展线索。我认为这条线索不仅清晰而且很有道理。其中尤为可贵的是作者意识到《代歌》与《代记》之间可能的联系。《代歌》早已不存,根据有关的只言片语而注意到它的价值,并将其纳入史学史的发展线索中是很不容易的。 
与上述合理的推测相比,接下来的推测就不那么合理了。关于邓渊之死,史书中是有明确记载的。《魏书·邓渊传》载,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但作者不相信这条材料,反而认定邓渊与以后的崔浩一样,也是死于国史之狱。在毫无材料依据的情况下,作者为什么一定要做出这样的推测呢?我想,这或许是因为作者不自觉中已经被前面自己发现的《代歌》、《代记》的线索束缚住了。我们先来看崔浩国史之狱。崔浩因修史“备而不典”、“暴扬国恶”而遭祸。《通鉴》也说崔浩国史“书魏之先世,事皆详实,……北人无不忿恚。”。由此可知崔浩国史当是记录了一些有悖人伦、有伤风化的早期拓跋故事,因此惹怒了皇帝,引来杀身之祸。但是,崔浩所记拓跋早期历史是从哪里来的呢?根据《代歌》、《代记》线索,这些内容应该都是从邓渊所撰《代记》那里来的。既然如此,既然崔浩已经死于国史之狱,那么更早的邓渊能不死于国史之狱吗?看来,为了符合这个逻辑,作者只能让邓渊死于国史之狱了。 
更为值得商讨的问题还不是邓渊之死,而是关于离散部落的史料依据。根据作者的统计,贺兰部被离散的经过是这样的: 
第一次:据《资治通鉴》记载,北魏登国三年(388年)三月,“燕赵王麟击许谦,破之,谦奔西燕。遂废代郡,悉徙其民于龙城。”作者指出:“显然,慕容麟尽徙代郡民于龙城,当包括三十年前的前燕时期由贺赖头率领居于代郡平舒城的数万贺兰部民在内。”(67页) 
第二次:登国五年,道武帝与慕容麟合击贺兰、高车诸部于意幸山。稍后,铁弗刘卫辰又袭贺兰,贺兰部请降于拓跋,“遂徙讷部落及诸弟处之东界。”(70页) 
第三次:登国六年,贺讷兄弟内讧,后燕“兰汗破贺染干于牛都”,慕容麟“破贺讷于赤城,禽之,降其部落数万。燕主垂命麟归讷部落,徙染干于中山。”(70页) 
第四次:作者在叙述皇始三年贺讷之弟贺卢逃奔南燕后说:“至此,道武帝舅贺讷、贺染干、贺卢三人,只剩下贺讷一人,据《贺讷传》,此时贺讷已无所统领,而且后嗣无闻。道武舅氏中还有一个贺讷的从父兄贺悦,待道武‘诚至’有加,得到道武善遇。贺讷、贺悦的部民,自然也被强制离散,分土定居了。这是第四次离散贺兰部落,也就是现知的最后一次。”(70-71页) 
以上离散贺兰部事例中,第一次、第三次都是被慕容部离散的,真正被拓跋部离散的只有第二次、第四次。我们再看独孤部被离散的情况。 
第一次:《资治通鉴》登国二年记“燕王(慕容)垂立刘显弟可泥(亢泥)为乌桓王,以抚其众,徙八千余落于中山”。作者指出:“刘显八千余落徙中山,这是独孤部的主要部分第一次被强徙,是孤独部落离散之始。”(80页) 
第二次:刘亢泥降于慕容氏,《太祖纪》皇始元年(396年)六月“遣将军王建等三军讨(慕容)宝广宁太守刘亢泥,斩之。徙亢泥部落于平城。”作者指出:“这是《魏书》所见独孤部民第二次被强制迁徙。”(83页) 
独孤部被离散两次,一次是慕容氏所为,一次是拓跋氏所为,这与贺兰部被离散的情况类似。作者在59页曾分析说:“部落离散,就其实质说来,本来是部落发育的自然过程,它之所以在道武帝时比较集中地出现,却也是由于道武帝创建帝业的特别需要。这可以解释为什么离散部落只留下这几家外戚部落的个案,而大量的对道武帝帝业无害的部落却得以保存下来。”显然,作者十分关注、十分强调的是道武帝拓跋珪离散贺兰、独孤部落,而不是别人的离散行动。但是,根据他提供的事实,不论是对贺兰部还是对独孤部,离散部落的发动者都是不仅有拓跋氏,而且也有慕容氏。两家各占一半。既然如此,恐怕就不能把离散部落很特殊地仅仅看成是道武帝为打击外戚部落,“创建帝业的特别需要了”。应该说,作者也意识到了慕容氏在离散过程中所起的作用,所以在35页又补充说:“看来,贺兰部破败主要是拓跋部借慕容部之力,得利的是拓跋部。”这个补充其实没有太大用处。这里所谓“借慕容部之力”一说,给人的感觉似乎慕容氏只是前台的表演者,而拓跋氏才是幕后操纵者。如果真是这样,那么上述由慕容部发动的离散事例就不构成对本书观点的反证了,但遗憾的是,实际上并没有这样的材料可以证明。所谓 “得利的是拓跋部”云云,其实只是一种客观效果而已,并不能因此把慕容氏离散贺兰、独孤部归结为拓跋氏操纵的、有预谋的行动。 
这里还涉及到一个概念问题。究竟什么是离散部落?按书中多数场合的表述,所谓“离散部落”就是指强制迁徙部落。但十六国时期某个部族强制迁徙另一个部族从甲地到乙地是常有的事情。如果仅在此意义上来理解离散问题,那道武帝离散部落还有什么特殊意义好说呢?作者似乎也认识到这个问题需要解释,所以在 75页又说:“强徙部落自十六国以来就是常有的事,包含离散部落,但并非都离散。道武帝在完成帝业的过程中,从总体上意识到离散部落的深层意义,理解其必要性和可能性,因而采取更主动更连续更强烈的措施,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要离散部落。这是他与十六国君主的不同之处。”按这个表述,似乎强制迁徙部落又不等同于离散部落了。 
按我的理解,强制迁徙部落不等于离散部落。前引《官氏志》说:“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贺讷传》说:“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按离散的结果既然是“同为编民”、“君长大人皆同编户”,因此所谓“离散”应该是指打破部落内部旧有社会等级结构而言的,唐长孺先生也是这样理解离散部落的,他说“部落的解散使贵族、人民都成为单独的编户。”(唐长孺:《拓跋国家的建立及其封建化》,载《魏晋南北朝史论丛》205页。)而所谓强制迁徙部落,即只是把某部落从甲地强制迁徙到乙地是不可能起到这种作用的。按作者上面的表述,似乎道武帝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离散了部落,但根据前面提到的有关贺兰、独孤部的史料,我们见到的还只是迁徙而不是离散。总之,如果我的理解不错,如果强制迁徙部落真的不等于道武帝登国年间的离散部落,那么本书所有有关于此的讨论就值得重新考虑了。 
写到这里,我不想再就作者的种种可疑推测说更多的话了,因为作者本人早就认识到了这个问题。他在前言中说:“我衰年涉入拓跋史题,颇感力不从心、步履维艰,更感到资料不足,结论难下。”他还说:“基于以上认识,我把本书所见主要作为窥探拓跋史的一种思路,而不一定是作为确切结论,奉献给读者,希望起到促进思考、共同探求的作用,以期尽可能把古史的这一模糊区域一点一点加以辨识。”凭借着几十年的研究经验,田先生当然知道要尽量避免过多推测,本书诸多推测实再是出于无奈,正所谓巧妇难为无米炊。史料的极度缺乏制约着每一个研究者。他已经竭尽全力了,尽管有些推测还需要再斟酌,但他毕竟已经给我们描述出了一个以前未曾见过的、精细的历史过程。这是我们要十分感谢他的。 
《汉书》卷六二《司马迁传》载,西汉刘向、扬雄“皆称迁有良史之材,服其善序事理,辨而不华,质而不俚,其文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故谓之实录。”本传又载司马迁语:“所以隐忍苟活,函粪土之中而不辞者,恨私心有所不尽,鄙没世而文采不表于后也。”“实录”之说、“文采”之说,正反映了史学的两个特点,一方面,史学是求真的学问,另一方面,史学也是展现史家思想、才华与魅力的手段。换言之,史学不仅是科学的,而且也是艺术的。从求真的角度看,我对《拓跋史探》多有疑惑;从展现史家个人才华与魅力的角度看,我又认为这是一部成功的著作。这种矛盾的态度或许就说明了这样一个浅显的道理:真与美有的时候并不能完全统一。 
(载《读书》2004年第6期,题目被编辑改为《在题无剩义之处追索》)
学术批评网(www.acriticism.com)转发 2005年11月20日

본인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는 순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적인 가치는 0%에 가까운 쓰레기이다. 물론 한가지의 가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해당 가설의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영토 표시가 지 마음대로다. 해당 영토 표기는 태왕사신기에서 봤던 그 영토 표기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 드라마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건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올려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보는 지도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대충의 문제만 말해도...

 

1) 백제의 산동반도설 통치설은 한마디로 증거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한마디로 학문적으로 인정 못 받는다.

2) 거란의 위치도 훨신 아래쪽이어야 한다. 아니 고구려의 위대함?!을 말하려면 차라리 거란이 고구려에 통합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방랑을 하며, 한때는 고구려에 통치를 받았고, 다른 때에는 중국대륙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해당 위치도 요서쯤에 배치하는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대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3) 후연은 아무리 약해졌어도 최소한 요서정도까지는 지배했었다. 그런데 해당 지도에는 베이징(북경)도 점령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홍보를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어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당장 위대한 고구려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중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는 단지 타국의 역사일뿐이다. 우리가 로마의 문화가 유렵의 여러 국가에 내려온다고 간략하게 말하는 것처럼, 타국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명망한 뒤 현재 한중일 모두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이게 누구 역사란 말이 왜 나오는 것인가?

헛소리다. 민족주의에 사로 잡힌 오만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일 뿐이다.

 

 

더 황당한 건 독도다. 대체 저 시기에 "독도"라는 지명이 어디있었냐?

기본적인 역사 지도의 역할도 못하는 쓰.레.기. 일 뿐이다.

미리 언급해 둘 것은 해당 내용은 어디까지나 일.부. 중국 네티즌들의 반한정서입니다. 생각 없는 반한 글을 보면 비판하는 중국인도 있음을 반.드.시.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일부분을 소개하며, 그를 통해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되돌아보려는 목적입니다. 해당 글을 보시고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보일까 한번 되돌아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中国统治朝鲜半岛长达1000年.

别以为把汉城改成首尔就可以摆脱中国的统治.

绝大多数韩国人体内都流着中国人的血.

可以说是MADE IN CHINA!!

 

중국은 1000년넘게 조선반도를 통치해왔다.

한성을 서울로 바꾸었다고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한국인들의 몸에는 중국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쉽게 말해서 MADE IN CHINA 다.

 

이런 글을 중국 인터넷에 있는 반한글 중에서 하나를 뽑아왔을뿐 그 외에 다른 글도 많이 있습니다. (저 글은 제가 UCC를 돌아다니다가 마침 보인 글이기에 뽑아온 것입니다.) 저는 현재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친한파 : 한국의 경제발전을 배워야된다는 파로서, 특히 한국 드라마가 유행한 뒤에 많이 생겨났습니다. 중국에서는 哈韩(하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해당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그리 강력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단지 반한파들이 글을 쓰면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소리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친한파는 지금 글의 목적이 아니기에 이정도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1

유일하게 반한파가 거의 없는 내용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축구죠. 혹시라도 반한파가 한국 축구를 욕하면...친한파가 아주 새콤하게 비꼬아 줍니다. "한번이라도 이기고서 이야기 하라고-_" 하지만 해당 일은 워낙에 중국 축구협회와 중국 대표선수들이 중국 축구팬들에게 욕을 먹어서 생기는 반사이익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축협과 중국 대표선수들은 외국인인 제가 봐도 불쌍하게 욕 먹습니다.

 

 

2) 반한파 :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는 원래부터 한국을 무시하는...아니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그들에게 있어서 50년도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에서 적이었던 존재입니다. 이 3가지 사항이 모여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친한파가 늘어나면서 더욱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 저의 경험적 생각입니다. 현재 그들의 주요 까댐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까댐에 대한 대략의 내용을 적겠습니다.

 

바로의 잠깐 욕시간! (으응??::)

한국어에서 중국인은 짱깨, 일본인은 쪽바리 라고 욕합니다.

일본에서 한국인은 "조센징", 중국인은 "지나" 라고 욕합니다.

중국에서 일본인은 "소일본", 한국인은 "고려새끼" 라고 욕합니다.

 

 

(1) 고구려문제 : 사실 중국의 국사 교육으로는 고구려나 발해는 당연히 중국의 역사입니다. 물론 한국의 국사 교육으로는 한국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둘이 충돌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욕의 근원이 된 것은 한국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해당 사실이 와전되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의 국사교육을 이해한다면 싸울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재 민족주의 교육이 벌어지는 양국가 모두에서 매우 힘든 일임은 분명합니다.

 

고구려 문제로 중국인들과 말할 일 있다면 제가 몇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1. 왠만하면 이야기 안하시는게 좋습니다.

회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그 중국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자체로 고구려 문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친한 사람의 나쁜말은 원래 하기 힘든 법입니다. 고구려는 한국땅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울컥 합니다. 이렇게 한번 울컥한 사람 다시 중립?!으로 되돌리기 힘들더군요. 그냥 밥이나 혹은 술이나 한잔 하면 된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당신을 옹호하게 되죠.

 

2. 이야기 하시겠다면,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한국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한국의 역사로 어릴때부터 배우듯이, 중국에서는 해당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배웁니다. 이것은 국사라는 것 자체의 문제이지만, 건너 뛰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인들처럼 당연히 우리 역사 아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앞에다 대고 고구려는 무조건 한국 것! 이라고 말하신다면 돌아오는 것은 분노뿐일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투로 설명해 주시는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인들은 어릴때부터 고구려가 한국 역사라고 배워왔다. 한국인들은 고구려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국은 어쩌고 저쩌고"가 등장하지 말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특별히 반발할 대상이 없고,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3. "고구려는 대한민국만의 것!" .......참아주셔요.

이렇게 해서 설득당한 중국인....제 미약한 경험으로는 본 적이 없군요. 반발을 하면 반발을 하죠. 정확하게 역사적인 배경으로 설명을 한다면 중국인의 것도 되고, 한국인의 것도 됩니다. 위의 말은 학술적이지도 않고, 단지 무지막지하게 감정적인 발언일 뿐이지요.

 

 

(2) 그 외 역사 문제 : 몇몇 한국 네티즌들이 얼마전에 스파게티는 중국이 원조다라는 기사에서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해당 사건때 한국 네티즌들은 "짱깨는 맨날 모든 것의 원조가 지네라고 지랄하네"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됩니다.(냉정하게 말해서 스파게티의 원조는 중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면기술자체는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간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면기술을 이탈리아에서 독창적으로 응용하여서 스파게티를 만들었죠.) 그리고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의 목판인쇄(무구정광)같은 문제나 단오절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 무구정광과 같은 경우, 해당사항은 아직도 양국간에 논쟁거리입니다. 무구정관은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입니다. 문제는 무구정관의 낙양에서 인쇄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인쇄되었느냐 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705(혹은 706)년 낙양인쇄설과 한국의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751년 불국사 석가탑에 안치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해결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2. 단오절과 같은 경우 : 단오라는 단어자체의 유래는 보통 중국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단오절은 우리것인데 왜 한국이 마음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을 하느냐고 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한국이 등록한 것은 "강릉 단오"입니다. 강릉에서 단오날 벌어지는 제사를 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한 것이지 단오절을 등록한 것이 아니랍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단오제가 아닌 단오절을 등록한 것이라고 말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에서는 단오제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강릉지방에 단오제가 정착을 하여 자신들만의 단오절 풍습을 만들었고, 그것이 강릉 단오제로 불리면서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유라고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 공자의 경우 : 이유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1- 한국만큼 유교의 전통을 지키는 곳이 없다라는 말이 와전되어서 생겨난 말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유교의 전통...중국보다 한국이 더 많이 보존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2- 공자가 동이족이라는 분들입니다. 공자의 출생지가 노국이었고, 그곳은 환단고기을 믿는 분들에게는 동이족의 영역이었고, 그러므로 인하여 공자도 동이족이라는 이론에서 시작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직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동이족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은 중국분들에게 되물어보시면 됩니다. 어디서 나온 소리냐고? 왜 공자가 한국인이냐고 말이죠. 공자가 동이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이유를 잘 설명해보셔요.

 

4) 한자의 경우 : 얼마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된 사항입니다. 한국이 한자를 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는 사항입니다. 해당 사항은 완전한 오보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열혈적인 국가 민족주의자들은 분명히 한자도 한국의 유산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증거나 논리가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딴지를 거는 중국인이 있으면 오보였다고 말해주면 됩니다. 길게 설명하려면 "한국에도 중국처럼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해당 사항을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목소리일뿐이다."라고 말해주어도 되겠죠.

 

5) 백두산 or 장백산 : 이 부분에 와서는 더이상 할말도 없어집니다. 한국의 경우 백두산이라고 교육을 받아왔고, 중국의 경우 장백산이라고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한국정부는 중국지도에 백두산이라고 명시할 것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정간섭이 되죠. 단지 자신들이 백두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요.

굳이 싸우고 싶으신 분들은 청나라 시기와 한국의 고대 문헌에는 분명히 백두산이라고 적혀 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특히 청나라와 대한제국이 국가분계선을 그을 당시에 분명히 백두산이라고 명기해있습니다. 단! 다른 청나라 기록이나 다른 중국 고대 문헌에 장백산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같은 지역을 부르는 다른 지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이겠죠.

 

 

(3) 서울과 한성(首尔与汉城)

예전에는 서울은 한양이라고 불렸었죠. 중국에서는 汉城(한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앞자리의 한은 중국 한족할때 한입니다. 그러니 중국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해당 지명에 대해서 "원래 중국것이라서 그래"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는 여지는 남긴 것이죠.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한강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百濟)가 동진(東晋)과교류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漢水)라 불렀으며, 그 뒤부터는 옛 이름은 차츰 없어지고 마침내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으로만 불리워졌다. 한강(漢江)은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넓다,길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古語)로 크고 넓은 강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성의 유래는 조금 복잡합니다. 어떤 이는 한사군에서 왔다고도 하고, 또 다른 어떤이는 한강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중국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중국측에서 저런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서울시가 바꾸어냈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바꾼 것인지 구체적인 과정은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서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맨 처음 번역한 중국네티즌의 글처럼 해당 일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중국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왜 서울이라고 불러야되느냐고 말이죠. 솔직히 저도 중국말을 할때는  汉城(한쳥)이 입에 붙어버려서 首尔(쇼우얼)이 아직 습관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냥 저런 말을 보면 그냥 웃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2

중국은 자기네 맘대로 지명 가져다 붙이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발음에 맞추어진 방식이죠. 그리고 현지 발음은 사실상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위싱턴을 화셩뚠이라고 부르거나 베를린을 보린이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속편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서울을 뺀) 모든 지명은 현재 중국어 한자 발음 그대로 지명을 읽습니다. 제가 궁금한건!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 담당자는 어떻게 한청을 서울로 바꾸었을까요? 혹시나도 인연이 되서 담당자분을 만나면 술 한잔 사드리면서 내부 사정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드라마였을 것같은 느낌이 팍팍 들어서 말입니다. 밤 새도록 말할 내용이 넘쳐 흐를듯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죠.)

 

 

(4) 한글

한국이 자랑하는 문자 한글입니다. 저는 이제 할 줄아는 언어라고는 중국어밖에 없고, 그냥 문자와 발음만 아는 알파벳, 키릴문자, 일본 문자(히라가나+카타카나+일본식한자)를 놓고 보면 확실히 한글이 재미있는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과학적일지 모르지만 한국어는 별로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는 모든 발음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한글은 가능하나 한국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국어에는 권설음이라고 불리우는 영어로 따지면 "R" 발음이 없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까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 조용히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주면 된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3

얼마 전에 한글로 중국어 타자를 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왔다고 합니다. 몇몇 한국 네티즌 분들은 중국을 점령해라고 하셨었지요. 그것도 중국 네티즌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안 좋은 반응을 보인답니다. 그런 것을 응원하실려면 조용히 성공을 기원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욕 할 사람들은 어차피 어떻게해도 욕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타자기를 한국식 한자와 독음을 다 아시는 어르신네들은 잘 사용하겠지만, 한국의 젊은 층과 중국 사용자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조금 힘들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실제로 사용해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비라는 중국 타자방식보다 빠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잘해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새로 입력법은 획기적으로 빨라야 하거나 쉬워야되는데 해당 타자기는 양쪽에 모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군요.

하지만 해당 자판기를 가지고 한국 문헌을 한국인이 입력한다면, 그 속도는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빠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되어있지만 조선왕조실록도 해당 입력기가 있었으면 훨신 빠르게 입력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하지만 아직도 입력해야되고 입력할 수 있는 한국 고전들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발자분도 그것을 위해서 만드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에 진출할 목표라는 홍보가 인터넷에서 되었는지 의문이군요.

 

 

(5) 그래도 반일정서 정도보다는...

위에서 몇가지 예시를 들었습니다. 저것 외에도 몇가지 더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중국 네티즌들의 반한 정서가 예전에 비해서 조금 강력해 진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드라마의 유입으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감으로서 자동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안티도 인지도가 있어야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나름 긍정적인 면을 찾아봅니다.

사실 한국과 중국 네티즌의 감정의 골은 아직 그리 깊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모두에게는 최고의 민족주의적 적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라는 목표가 그것입니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엔돌핀이 급속도로 전신을 순환하나 봅니다.

 

바로의 잠깐 번역!

해당 글은 중국 인터넷에 많이 퍼져 있는 글입니다. 일단 보시죠.

一韩国留学生说:我和你们(中国学生)打赌,在中国随处可见日本电器、手机、汽车,而在韩国街上你转上几天也不会看到一辆日本车--这就是日本不敢轻视韩国的理由日本松下有一位高官说过:即使我们不去拜靖国神社,韩国人也不会买我们的产品,但不管我们再怎样的去拜靖国神社,中国人照样会买我们的产品。一句让中国人从头凉到脚的话。每买一百元日货就会给日本政府送去5元钱,让日自卫队多造10颗子弹,多印8页反历史教科书。如果你买日本汽车,将来开上中国街头的日本坦克就是你造的,如果你买日本橱具,将来射穿同胞头颅的子弹就是你造的,如果你买日本电视音响,将来就会在战地喇叭中听到同胞被杀的哀鸣!请传给20个人,支持中国,抵制日货,就算没有回报,这也是你的义务!

한국 유학생이 말했다. "나랑 도박해볼래? 중국에서는 어디서나 일본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볼 수 있어. 하지만 한국의 거리에서 몇일을 돌아다녀도 일본차는 절대 볼 수 없지" 이것이 일본이 한국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파나소닉의 한 고관이 말하였습니다. "설사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아도, 한국인은 절대 일본 상품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야스쿠니를 가던 말던 중국인들은 우리 제품을 살 것이다." 참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번 100원의 일본제품을 사는 순간 일본 정부에는 5원이 세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자위대의 10개의 총탄을 제조할 비용이며, 8페이지의 역사 교과서를 인쇄할 비용입니다. 만약 당신이 일본 차를 산다면 미래에 중국 길거리에 있을 일본 탱크는 당신의 책임입니다. 만약 당신이 일본 주방제품을 산다면, 장래에 당신 동포의 머리를 뚫는 총탄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만약 일본 음향제품은 산다면, 미래의 전쟁터에서 동포들의 마지막 비명이 들을 것입니다! 해당 글을 20명에게 보여주십시오. 중국산을 지지하고, 일제를 몰라냈습니다. 어떠한 이익이 없을지라도, 이것은 당신의 의무입니다!

 

솔직히 위의 글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습니다.  (자동차야 한국에서는 거의 국산차 쓰고 관세가 많아서 그렇지. 전자제품에서 일제가 널리고 널려있는데!) 하지만 지금도 저렇게 믿고 있는 중국인은 의외로 많답니다. 한국인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일본제품을 쓰지 않는 줄 말이죠. 그럴땐 저는 저의 디카를 살포시 보여준답니다. 나의 사랑 캐논 G7!!! 아...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미 자유시장경제인 상황에서 질이 더 좋다면 그것이 일본산이든 중국산이든 한국산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음...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적의 적은 친구라던가요? ^^

한국의 반일 감정은 중국의 반일 감정보다 약하다고 자평합니다. 중국의 어떤 기사던지 간에 일본에 대한 욕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어떨때 보면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도 있습니다. 나름 머리 좀 돌아간다는 북경대학의 친구들도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더군요. 그리고 가끔 이성으로 무장한 중국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어릴때부터 보던 반일영화와 드라마가 문제일 것이라고 말이죠.  중국은 항일전쟁 영상물가 매우 많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른 영상물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현재 80년대 생들이 어릴때부터 보아 온 것은 일제에 저항하자! 일본은 나쁜놈! 인데 일본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기도 힘들겠지요. 이것이 세뇌의 힘입니다. 한국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희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세뇌가 아닌지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요?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이것을 보시고 모두 힘을 합쳐서 일본을 욕하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 능력껏 해당 사건의 원인과 와전 과정을 설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 과정도 말이죠. 이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외로 이상하고 짜잘한 것이 와전되어서 이상하게 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한국에 있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위와 같은 이상한 와전의 결과는 아닐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모두가 하나의 분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보면 저희는 동양인일뿐이고, 동양인에서 보면 동북아에 사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껑충 뛰어넘으면 저희는 한 명의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웃음 뿐입니다.

중국인을 만나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보셔요.

"니 하오!" 그 순간 또 하나의 사람과 알게 되는 것입니다.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PRE-DYNASTIC KHITAN

Xu Elina-Qian


배울점 : 서양학자 + 중국 + 일본 학자들의 의견을 모두 검토했음.(사실 이것만으로도 무지막지 존경스럽고 대단해보임. 해당 행위가 무슨 삽질?!이었을지 상상이 팍팍 된다는...)

              요나라 건국이전의 역사를 인종, 사회, 부족, 경제, 대외관계 및 역사 지리등 다방면으로 포괄적으로 서술(이것도 대단함. 본인이 관심이 있었던 것만을 정리한게 아니고 관심이 없었던 것도 다 해야되니 모든 것을 포관적으로 싹다 최소한 입문정도로는 다 배웠어야 된다는 소리인데 말이다. 후...)


자신을 되돌아볼 점 : 대외관계을 서술한 분량이 너무나 많음.

                                  특별한 결론이 없는 의견 종합에 가까움.


의견 :

1) 거란이 침략정책이 아닌 보수정책을 해서 성공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거란은 매우 빈번한 대외 침략행위를 한다. 이는 유목사회의 경제구조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해결책으로 중국 유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지만, 이는 유목민족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요나라 역시 빠르게 망해서 이를 입증하였다. 특히 쿠모시와 거란을 비교하는 부분은...

1- 쿠모시와 거란의 힘이 비슷하다고 말해놓고, 나중에 보면 쿠모시의 힘이 훨신 강력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거란의 힘이 모자랐고 그래서 보수정책으로 보이게 소극적으로 방어 정책을 했을뿐…

2- 쿠모시가 침략정책에서 실패한 이유는 단지 시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 예로 필자도 이야기 했지만 쿠모시는 빠른 속도로 성장을 했다. 단지 전투에서 패하여 망했을뿐. 그리고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예가 몽고이다

3- 거란은 단지 주위에 강력한 세력에 비하여 힘이 약하였기 때문에 보수정책?!으로 갔을 뿐이며, 자신이 힘이 생기면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공격해 들어갔다. 거란이 보수정책을 원해서 행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현실대처였을 뿐이다.

2) 한화(汉化)만을 중심으로 서술. 실제로 거란에 남아있던 많은 유목적 행태에 대한 자료를 (아마 고의적으로) 서술하지 않음. 이는 요나라 건립이후에 유목과 농경이라는 이중적인 정치 경제 구조에서 충돌이 일어났던 것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엉뚱한 생각 :

1) China 라는 영어 이름 혹시 거란(Khitan)에서 온거 아냐? 진시황의 진 나라가 아니라 말이다. 이는 언어학상으로 한 번 증명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일단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이지만 말야. 하하하하;;;

2) ames of the You Dabu and the Zuo Dabu are put in this account by the compilers of the Liao Shi, probably only to make the number up to twelve. --> 개인적으로 정치적 입장으로 다르게 부른게 아닐까? 중국파, 북방파, 고구려파?! -0-;;


그리고...

끝났다! 우와와와왕!!!!! 바로야. 난 니가 자랑스러워! 우와와와와와왕!! 중간에 딴짓한다고 절대 안 놀았지? 그치?!-_-;; 도저히 읽고 싶지 않아서 집어 던져 놓지도 않았지? 그치그치?!!!;;

자..그럼 다음 논문으로 가볼까? 다음은 이것에 비하면 짦은 논문이잖아. 딸랑 40페이지까지 영어 논문....아싸! 울고 싶다.ㅠㅠ

新增国家一级重点学科名单

国家一级重点学科名单(2007.08)

 

해당 조사는 중국에서 학과별로 국가에서 지정한 연구기관입니다. 해당 자료를 근거로 몇가지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의 오해들을 싹 날려버려야겠습니다.)

 

1) 철학, 역사학, 중문학등의 순수인문

북경대 천하무적입니다. 누가 따라오겠습니까?! 주의하셔야 될 점은 역사학의 경우 북경대와 남개대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경대는 고대사로는 막강 무적이며 근현대사에서 남개대학과 비슷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대사 쪽으로는 상대가 없는 막강 무적!

 

2) 이과는 청화대? 아닙니다.

청화대는 정확히 말해서 응용과학쪽 분야일뿐입니다. 수학, 물리, 화학과 같은 순수이과계열에서는 이제 막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화학과 같은 경우 북경대가 목록에 있는 반면에 청화대는 이름이 안 올라와 있죠. 그리고 뒤쪽에 가면 어쩌고 저꺼고 땅파기 저쩌고 지찌고 벽돌쌓기는 청화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3) 종합대는 북경대

지금 현재 중국의 유명 대학들은 모두가 종합대학을 향해서 나가고 있습니다. 종합대라는 것은 한 분야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뻗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목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북경대는 순수인문과 순수이과를 대표로 하여서 다양한 응용사회학과 응용과학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청화대는 땅파고 벽돌쌓는 것이지요. 므흐흐흐흐...-_

 

중국 내부에서 대학능력 평가를 하면 청화대가 일등을 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북경대생이었습니다. 크흠;;;(이거 청화대생이 보면 때찌 할거 같긴 하지만...아시잖아요. 자기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먼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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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년 11월 29일 량주고성 북쪽 성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성벽의 절단면이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年11月29日,량주고성의 북쪽성벽 절단면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고대의 도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돌들이다. 대략 40-60미터의 폭이어서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도로가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동쪽 성벽에 위치한 발굴지

 

절강성 고고학연구소를 어제 18개월 동안 발굴활동을 해오던 량주유적의 발굴보고를 하였다. 해당 량주 유적은 290만 평방미터의 4000년전의 최대크기의 성이다.(290만 정도면 대략 여의도 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막지하게 큰 크기인 것이다.)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언원밍 교수는 량주 유적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동시대 고성중에서 가장 큽니다. 저는 이 성을 "중화제일성 中华第一城" 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원래 학계에서는 량주문화는 그다지 발달 되지 못한 문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당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하여 매우 발달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량주유적의 발견은 지난 세기의 하남 안양 은허 발견에 비견할 만한 중국 고고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견입니다.

 

해당 고성은 동서 1500-1700미터, 남북 1800-1900미터이며 남북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은 대략 4미터정도의 높이이며, 폭이 40-60미터 정도 됩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으리라 생각되고 이습니다. 성벽에서 나온 도기 파편으로 고증해 보면 해당 고성은 량주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약 4000년전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궁전터로 보이는 곳들과 제사용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구덩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항은 발굴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 해당 고성으로 인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량주고성이 하나의 국가였냐 아니냐는 점입니다. 어제 엄원밍교수는 량주고성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미 "국가" 시기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량주고성이 사실은 "량주고국"으로 이름 불려야 하며,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예전의 하상주에 량주를 추가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실 분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역사관련 전공자들이 아니면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듯 합니다만...해당 사항에 상상력을 붙이면 :

1)현재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같은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간단한 반례가 될 수 있습니다.

2)홍산과 대비되는 중원 문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 문화의 시초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학설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동시에...잘못 이용되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3) 오히려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이 성립될 "상상의" 기초가 될지도 모르는군요. 홍산을 북방계열의 문화로 보고, 량주를 남방계열의 문화로 설정하면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고요^^::

대체 예술사는 어떻게 먹어야 될까? 간단히 말해서 이건 대체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림은 정확하게 유치원 수준에서 멈추었고, 붓글씨 고사하고 본인이 글씨도 알아보는 사람으로서 예술은 개뿔이 예술이냔 말이다.


예술사를 하려면, 일정 정도의 그림을 있는 감별력이 있어야 되겠지만, 본인은 없다. 고로 앞으로 이쪽은 돌아보지 않으련다. 무엇을 알아 먹어야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장님에게 모나리자가 인류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의 역사 학자들이 뽑은 중국에서 우수한 역사 학술지들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에서는 잡지를 우체국을 통해서 편하게 받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한국으로의 배송은 안됩니다.)

문제는 아래의 잡지가 모두가 정규적인 학술잡지가 아니고, 몇몇 것은 비정규적인 학술 잡지라서 우체국을 이용해서 구매하지 못합니다.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 잡지들은 사실상 우체국을 통해서 배송이 된답니다.


序号

刊物名称

1

历史研究

2

中国史研究

3

中国社会科学

4

近代史研究

5

文史

6

世界历史

7

考古

8

中华文史论丛

文物

10

中国经济史研究

11

考古学报

12

唐研究

13

史学理论研究

北大史学

15

史学月刊

16

国学研究

17

北京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18

清史研究

19

史林

20

当代中国史研究

中国边疆史地研究

22

文史哲

23

考古与文物

24

南京大学学报(哲学人文社科版)

25

历史档案

26

抗日战争研究

文献

中国社会经济史研究

29

燕京学报

中国农史

31

中国学术

32

史学集刊

33

中国历史地理论丛



이처럼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해 원인을 알고자 노력합니다. 그 원인을 알아야만 부정적인 상황 또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결국, 귀인은,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그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라는 통제감(Sense Of Control)을 얻기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측하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발생했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특 히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게 됩니다. 그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 사람들의 귀인 욕구는 아주 강렬해져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이나 추론보다는 그럴듯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게 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음모론의 대표적인 오류가 '대표성 발견법(Representativeness Heuristics)'입니다. '대표성 발견법'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따지기보다는 '얼마나 그럴듯한지'를 따지게 되는 오류입니다.

심리학으로 꿰뚫어본 역사, '누다심의 심리학 블로그' 중에서...

1차사료나 당시에 적은 글이 예전에는 대단하게 생각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1차사료는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되었었죠. 하지만 그러한 1차사료도 해당 글을 적은 사람의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절대적인 사실일 수는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1차사료가 인간의 삶의 일부분(보통은 정치에만) 편중되어있는 상황에서 정확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현대 중국사를 예로 들면, 당나라와 송나라 이전의 시기의 사료는 매우 희귀하며, 이른바 당송이전의 위대한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추론법을 씁니다.

한마디로 음모론과 같은 오류인 "얼마나 그럴듯한지"에 대해서 따집니다. 물론 사료나 고고학적자료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며 추론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지 아닌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미 역사가 진실이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다시 한번 비참해 지는 것이죠.



하.지.만. 모든 학문이 그런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는 심리학도 인간의 잠재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잠재의식이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있을 가능성이 높을 뿐이죠.

귀인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 곧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 속성입니다. 특히 인문학의 기본은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지요. 이것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고, 그것이 인간이 만든 학문도 당연히 이 속성을 가지고 있겠죠.

무엇보다 정확함을 따지는 것과 얼마나 그럴듯한가의 차이는 매우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한 정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집단이 뒤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라는 음모론도 어떤 경우에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음모론도 설득력이 있는 정황증거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단지 확고한 물적증거가 부족할 뿐이지만, 이러한 확고한 물적증거는 다른 학문에서 많고 적은 차이일뿐 100%의 정확도는 현존하는 어떤 학문도 제시하지 못합니다.이런 상황에서 대표적 발견법이라는 오류는 모든 학문이 이 같은 오류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더 비참해 보이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학문은 얼마나 정확한지" 따지지만, 그것의 정체는 '얼마나 그럴듯한가"의 다른 말일뿐이다.

모든 학문은 단지 음모론일 뿐이다.


.....감기에 걸려 있어서 그런지 우울함에 부정적 생각들의 폭팔이군요...

신묘님의 그 땅에 산다고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입니까?
http://sinaysi.tistory.com/4


---- 아래쪽은 제가 덧글로 단 사항입니다.
제 블로그에 트랙백을 걸으셨더군요. 와서 글 봤습니다. 죄송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그런 사실은 무엇이냐고 생각한다고 물으신다면 끝없는 진실의 탐구라고 하겠습니다. "라는 말만이 공감이 가는군요. 아마 역사학을 공부해보셨거나, 최소한 취미로라도 공부를 하셨던듯 싶군요. 하지만 위의 논리는 별로 끝없는 진실로의 탐구라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역사관은 흔히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지금 현재 님이 지적하신 중국과 일본의 소수의 학자들의 "만행"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다시 말해서 님의 말은 타자의 역사관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관만이 옳다고 외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세계에는 수 많은 역사관이 있습니다. 하나의 역사관만으로 과연 진실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님이 말씀하신 것을 간단하게 반박해 드리겠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누가 정했답니까? 그럼 고구려시기정도에 한반도로 건너온 섭씨나 제갈씨들은 한민족이 아닌가요? " 이것이 민족역사관의 문제점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19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것을 고대에 고대로 반영해서 설명하려 하면 쉽게 벌어지는 것이죠. 언어가 같다고 같은 민족인가요? 아니면 혈연관계인가요? 아니면 종교인가요? 아니면 민속인가요? 아직도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현대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로 "민족"의 개념을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민족역사관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님처럼 민족역사관"만"이 옳다고 하는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역사관을 기초로 생각하시는 것은 좋지만,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두가지 수정사항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금까지의 역사관은 전혀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혀 축소지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특히나 군정시절에는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예전 정신문화연구원을 통해서 수 많은 역사적 부풀리기가 자행되어왔습니다. 그리고 90년대부터 수 많은 학자들이 이제 그 그늘에서 벗어나서 예전에 고증없이 무조건 "민족정신의 고취"라는 것을 빌미로 자행된 푸풀리기를 수정하려 노력하니 축소지향으로 느껴지시는지 모르겠군요.

남은 한가지는 일면 "환빠"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건 간단합니다. 이 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들은 정확한 근거가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외의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거와 논증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주요 근거로 채택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역사학적으로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이미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고, 그 책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학자들이 사대주의이고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고 한다라는 말은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설득력이 있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예 중에서는 "경제"라는 단어와 "문화"라는 말의 사용이 있군요. 이 두 단어는 고대한어에 결코 등장하지 않습니다. 19세기에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라는 책에는 이 두 단어의 사용이 조금 많이 있군요. 이 외에 수 많은 반례들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0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환단고기를 근거로 거의 모든 말을 하는 일명 "환빠"들의 말도 당연히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근현대 한반도의 사상사나 민간설화차원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위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른 이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덧글 끝~

---------------------
좀 난폭한 말을 하겠습니다.

1) 동북공정 문제 별거 없습니다. 역사관이 다른걸 어쩌란 말입니까?

2) 그리고 한국에서 동북공정 난리치는 교수님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지식인들로서 적당히 체통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고들 있지 않으십니까? 이건 논쟁할 건덕지가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3)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동북공정이 무슨 거대한 일인줄 아십니까? 박사를 지도할 자격도 없는 연구원들이 모여서 사바사바하는데가 그넘의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소입니다. 어차피 그들 의견이 중국 역사학계의 주.류.도 아닌데 멀 그리 크게 부풀리는 건지...후..

4) 한국의 민족원류적 역사관이나 중국의 다국가일민족설이나 모두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강점이 있죠.

5) 마지막으로 민족....이 정말 대단한 겁니까? 그럼 전 지.구.민.족.입니다.



제목에 대한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현재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루어냈다는 역사관입니다. 당연히 그 다양한 사람 중에서 인디언이 들어가며, 고로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미국이 건립되기 전, 콜롬버스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 전의 인디언의 역사까지 미국의 역사로 포함되는 것일수도 있고, 혹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식민지가 세워진 시기부터 일수도 있고, 혹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워진 때부터일수도 있고, 혹은 처음에 반미국적이던 인디언들이 결국 굴복하여 미국에 합류한 때일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각의 역사관마다 다.른.겁.니.다.
무엇 하나가 단정적으로 틀.린.게. 아.닙.니.다.




어차피 같은 북경대이고, 어차피 같은 선생님들에, 어차피 같은 중국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무지 막지 방심했던거 같습니다. 아니, 그나마 북경대학교 역사과에서 곧장 올라와서 그나마 이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은 분명히 무지막지 없습니다. 선택한 과목은 분명히 일주일에 총 9시간뿐입니다.문제는 그 외에 수업이 드럽게 많습니다. 인민대에서 듣는 수업도 있고, 그외에 지도 교수님이 진행하는 고문읽기(해석도 아니고 그냥 쭉쭉 읽습니다.-_)도 있군요.

더 골때리는 것은 언어이죠. 지도 교수님 제대로 맘 먹으셨습니다. 저와 저와 같이 올라간 친구넘이 둘다 민족사를 한다고 하자 나름 기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이 석박사시절에 외국에 못 나간 것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년내로 러시아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터키어 플러스 몽골어는...
쫌..무리가 아닐런지...후.....


사실 영어나 일본어는 대충 대충 하긴 합니다만....그래도 다른 언어가 문제군요.러시아어는..후....어떻게든 해야겠고...후...하...(언어중에서 극악 난이도의 어법 변화를 느껴봐야겠군요. 라틴어만큼 변한다는데...전 라틴어 하다가 죽고 싶었는데...말입니다..후...)

터키어와 몽골어는 같은 알타이 계열이라는 것으로 우겨봐야겠군요. 사실 발음수준에서는 매우 쉬운것이 느껴졌습니다. 역시 같은 언어 계열이구나라는 생각이 절실이 들더군요.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이유로 그 동안 블로그질 거의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이런저런 글 올리기는 힘들듯 합니다.
앞으로 대략 1년은...죽.어.야. 될.테.니.까.요. -0-


북경대학교 2005년도에 한국인 학생회가 새로 생겨났지만, 본과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석박사생은 제외되었습니다. 이번에 허욱씨와 박민정씨(두분다 법학과)가 석박사 모임을 만드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일시 : 2007년 9월 14일 금요일 12시
장소 : 작원(勺园)한국인 식당 2층

저는 일단 참가해볼 생각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것 자체가 이런 저런 타학문과의 교류가 필수적이라는 이유가 있죠. 철학-인류학-사회학-심리학분들 많이 많이 와주셔요. 전 소수민족사랍니다. -_-;;

개인적으로 모임 자체가 만들어지는 것에서는 찬성을 합니다. 물론 본과도 아니고 석박사들이 과연 제대로 모임을 만들 수 있을지, 만든다고 해도 실질적인 참여가 있기나 할지는 의문이지만, 하나의 단체가 있는 것이 나쁘지 만은 않죠.

혹시나 위의 석박사 단체가 친목 수준이 아닌 독립된 단체가 될 계획이라면, 저 개인적으로 반대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본과를 대상으로 있는 한국인 유학생회의 하위 부서 혹은 독립 부서로 들어가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회장이 되냐! 누가 실권을 잡느냐!!! 라면서....
몇 번 씩이나 개싸움 될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본과보다 더 살벌한 석박사쪽이니....훗-_  05년도 학생회를 만들면서 학생회 준비 위원회에 있으면서 몸으로 겪은 일들입니다. 제발...누가 회장 어쩌고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이미 있는 단체에 들어가서 친목이나 다지는 것을 희망합니다.

라고 하지만...과연..


부언으로 이번에 주도해서 만드시는 분 중에 박민정씨는 05년도 한국인 학생회에서 홍보팀장을 한 분이십니다. 머...05년도 학생회장과 웹팀팀장이 참가할 예정이고....05 학생회의 반수가 모이는군요. 05 학생회는 엘리트들 이였던 건가?!


레비-스트로스 안정남 <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2007년 1판 5쇄.
해당 중국어 번역판 : 列维-施特劳斯《图腾制度》世纪文景版, 2005



주술과 종교와의 관계를 종교라는 것은 자연법칙의 인간화이며 주술이라는 것은 인간활동의 자연화”- 자연의 의인화(종교의 성립 기초) 인간의 자연화(이것을 주술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항상 존재하는 두개의 구성 요소로서 구성비율이 변화한다.

--- 주술과 종교가 양극의 대칭 모델과 같지만, 지속적인 레빈-스트로스의 말대로 대칭-대립모델은 오히려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 그 같은 속성은 무엇인가? 주술과 종교 공통의 속성은 무엇인가?

 

언어 음성을 통해 분해해서 추출되는 요소의 하나하나는 기호가 아니고 기호를 만드는 수단이다. 그것은 변별적 단위이며 다른 단위와 바꾸면 반드시 의미가 변화한다. 그러나 단위 자체는 의미의 속성을 포함하지 않고 다른 단위와의 결합이나 대립에 의해서 의미를 포함한다.

 --- 언어학도 해야되는구나. 후....

 

유사의 개념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지 지각의 문제는 아니다.

 --- 지각은 외부에서 느끼는 자극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짠 맛을 짠 맛이라고 느끼는 것은 혀를 통해서 전해지는 전기 신호를 머리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짠 맛이 소금맛이라고 생각한 것은 유사의 개념이다.......먼 차이냐구!!

 

역사없는 민족 외의 민족을 구분하는 것은 서투른 구별

차가운사회와 뜨거운" 사회를 구별하는 것이 유리

차가운 사회는 역사적 요인이 사회의 안정과 연속성에 끼치는 영향을,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를 통해서 거의 자동적으로 제거하려 한다. 뜨거운 사회 쪽은 역사적 생성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토템 신화는 미미한 사건을 마치 대사건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특정 장소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역사로 치면 야사라고 있는 것들.

---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본 부분. 전공이 역사여서 그런지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 스스로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후자의 뜨거운 사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것도 아니고 둘은 서로 섞여 있다.  


 

인문과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용해하는

과학적 설명은 복잡에서 단순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난해한 복잡성을 이해 가능한 복잡성으로 바꾸어 놓는

--- .......하지만 용해가 가능할지는 정말 의문일 뿐이다.


 

역사는 항상 무엇인가를 위한 역사이다.

역사 인식의 변별적 특징은 부호의 결여라는 환상에 있지 않고, 부호의 특수성에 있다. 역사학의 부호는 연대이다. 

이해가능성 연구의 목적지가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것이며 역사야말로 모든 이해가능성 탐구의 출발점이다. 역사학은 어디로나 통한다.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조건하에서이다.

 --- 살짝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역사의 특징이 부호의 결여가 아니라 연대가 부호라니...충격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역사를 통해서 어딘가로 흘러가보자.    

 








한국에서 졸업식에서는 학부모님들이 모두 오셔서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고는 합니다. 학교 전체에 학부모님들이 넘쳐 흐르게 되죠. 그에 반하여 중국의 졸업식은 졸업생들끼리의 잔치에 가깝습니다. 학부모님들도 북경지역에 계신 부모님들중에서 몇몇 분만 오고는 하지만, 사실상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그와는 반대로 개학시때 난리가 납니다. 특히 북경대와 같은 경우는 지방에서 오는 경우가 조금 많이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집안이 조금 잘 삽니다. 여기서 조금 산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나름 상위권이고, 한국으로 따지면 3%안의 부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며, 어릴 때부터 영재교육 아닌 영재교육을 받은 아이입니다. 학교도 최고로 좋은 학교들만 다는 사람들이고 말이고요.

다른 쪽은 집안이 찢어지는 듯하게 가난한 쪽입니다. 대학교 올라오는 것도 국가의 전액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집안을 부흥시킬?! 어마어마한 부담을 가지고 올라오는 학생들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학생들의 학부모님들의 공통점은 학생에 대한 어마어마한 관심입니다.

그래서 입학을 하게 되면, 학부모님들이 거의 무조건 올라오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학교 주변의 모든 숙소가 다 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빈곤가정에서 학생과 같이 올라온 학부모님들입니다. 다행이도, 중국의 신학기는 9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자도 큰 문제야 없지만 아무래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북경의 한 대학에서 이러한 빈곤가정의 학부모님들을 위하여 체육관에 임시 무료 숙소를 만들어둔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자식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왜 졸업식은 참석을 안하는것인지....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_-;;



그리고.....저도 석사로 다시 시작합니다. 사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라서 신입생이라는 자각이 거의 없습니다. 중국 친구들과 농담으로 老新生이라고 하고는 하죠. 하지만 어찌 되었던건 간에 새로운 시작!

앞으로는 조금은 역사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군요. 블로그질도 조금 줄이고요^^

어느사이에 포스팅 숫자 1000개를 달성했습니다. 처음 포스팅을 한 것이 2004년 7월 26일 이군요. 지금이 2007년 7월 21일. 근 3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길다면 긴 기간이었고, 짦다면 짦은 기간이었던듯 싶습니다. 수치적으로 계산해 보면 하루에 글 하나도 못 올린 것이군요. 하하하^^::

그 동안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도 많이 변했고, 블로그바닥도 많이 변했습니다. 물론 저도 많이 변했고요.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북경대 역사과 본과생이었는데, 지금은 석사 입학을 앞두고 있는 노땅이 되어버렸군요. 제 초창기 시절부터 여기를 가끔이라도 방문해 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1) ....................(많은 말들)
어떻게 시작을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몰아치기 글 올리기를 자주하는 저로서는 고정 방문자가 없는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달이나 두달동안 몰아치기로 하루에 5개 이상씩 쏟아내다가, 어느 순간 잠적해서 2~3달을 보내는군요. 원칙도 본인이 재미있는 것만 올린다는 주의여서, 인기도 없고 힘들기만 한 중국만화 번역이나 하고 있고, 북경대학교 입시 문제나 올리고 있고, hsk나 올리고 있고....정말 비인기 블로그가 될만 하군요. 중국어 번역하기 귀찮다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올려버리고!

대체 3년동안 블로그 계속?!했는데 하루 평균 방문자가 500명을 살짝 넘기는 비 인기 블로그가 그리 많지는 않겠죠. 주제도 비인기, 주인장은 비호감, 글 내용은 주절주절! 이 모든것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하모니랍니다. -_-+



2) 테터툴즈에게...
설치형을 하면서 워드프레스를 할까 테터툴즈를 할까 나름 고민도 하다가, 그래도 나중에 as받기 쉽게 테터툴즈로 하자! 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으로 테터툴즈를 시작했는데, 그동안 테터툴즈가 많이 변했습니다. 어느새 당당한 오픈소스가 되어서 여러 개발자분들의 손에서 빛나고 있죠.

으로 테터툴즈의 딸인 티스토리는 딴 넘한테 시집가서, 조금 있으면 중국진출을 하겠고, 테터툴즈의 아들인 텍스트박스는 분가해서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나가겠죠. 그리고 미세하지만 초창기 중국어버젼에 도움을 드리고, 지금 플로그인을 중국어로 만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터툴즈라는 툴이 더 발전을 했으면 하고요. 그리고 이미 분가해 나간 텍스트 큐브 말고, 여성용 테터툴즈(레이디 테터)라던지, 어린이용 테터툴즈같은 자식들을 쑴풍 쑴풍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3) 올블로그에게...
제 블로그가 만들어지고, 막 블로그 코리아에서 이 블로그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블코는 매일 다운과 서버 에러의 연속이었고, 슬슬 짜증나기 시작하는 단계였답니다. 그럴때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것이 올블로그 였죠.

그때부터 올블로그를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3년이 되었군요. 조금 있으면 올블로그 3주년 기념식?!을 보게 될듯도 합니다. 초창기 맴버여서 성은이 망극하게도, 하늘이님과 해꼬님이 msn에 등록되어있고, 매일 이상한 아이디어나 풀어놓는지라 할 말은 없지만....그 동안 정말 즐거웠답니다. 특히 해꼬님은 지금까지도 제가 심심해서 불러내면 언제나 상대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하지만 이것으로 은근슬쩍 해꼬님이 일 안하고 저랑 놀았다는 것을 고자질 하고 있습니다. -_-;;)

단지 제의 얄팍한 중국어 능력조차 올블로그에 도움이 안되는것이 아쉽군요
대신 365에 살짝쿵 지원을 할려 합니다. 머....-_- 좋은게 좋은거죠.


4) 베이징 분들에게...
제 생각보다 많은 중국에 관련된 분들이 이 블로그를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의외더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겨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한번이라도 좋으니 방명록에 보고 있다고 말씀을 남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 남기신다면 별 수 없죠. 하긴 주위에 친구란 것들도 들어와놓고 덧글 안남기는데....후..-_

그리고 상당히 많은 뒷담화들이 제 귀에 들어오기는 한답니다. 특히 동북공정문제에 대해서 써 놓으면 왜 덧글로는 안 달리는데 뒷담화가 들어올까요? ^^  또 이 블로그를 통해서 제가 개꽝 이미지가 된 것이 중국 사우나 서비스 탐구 이었습니다.  전 완전 북경바닥에서 매일 음주가무를 즐기는 개새끼가 되었더군요. 정말 감사드리며, 위의 글은 원래 어떤 중국인이 쓴 글을 제가 아는 어떤 분이 한국어로 번역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 단지 그 분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드렸을 뿐이고요. 그리고 역사과 내부에서 저보고 공부 안하고 놀러 다닌다는 사람은 없답니다. 음주가무는....몸 꼬라지가 좀 아름다워서, 일정 이상 먹으면 입원해야됩니다. -_-;; 제가 미쳤습니까? 술마시고 쳐 돌아다니게?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수양을 쌓는답니다. 어제 친구넘이 부르지 않았으면 일주일 무외출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데 아쉽답니다. -_-;;

저에 대해서 악평을 하시는 북경분들에게 정중히 말해드립니다.
할말 있으면 온라인으로 덧글을 사용하시던, 아니면 오프라인으로 직접 만나시던간에 저에게 말해주시죠. 뒤에서 꿍시렁 거리는 모습 진짜 웃깁니다. 이 블로그에 올라오는 제 모습은 저의 수 많은 모습중에서 일부분 중에 일부분일 뿐입니다.


5) 앞으로...
지금도 모르는데 앞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하^^

앞으로 만화 번역
에 조금 신경을 쓸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처럼 귀찮다고 대충 번역하기 모드가 아니라, 포토샵을 동원해서 제대로 번역해야되지 않을까 고민해 봅니다. 아님 번역을 여친님에게 맡기고 전 포샵질만 하는 것도 생각해 보고요. 중국어 전용 블로그를 만들까고 생각해 보고....그 전용 블로그를 커플 블로그로 만들까도 생각해 봅니다. -_

그 외에 이제 본과도 아니고 역사과 석사가 되었으니, 슬슬 역사에 대한 심도있는 이야기를 올려야 겠네요. 솔직히 자료 첨부하기가 귀찮아서 그 동안 증거 논증도 없이 그냥 막나간 이야기가 많았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귀찮습니다.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고, 굳이 주석 붙이고 자료 논증해도 그걸 보시는 분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명색이 석사인데....해야죠....ㅠㅠ


그럼...포스팅 1000개 올라갑니다!!! 아싸!!!
(사실 비공개 포스팅까지는 예전에 1000개가 넘었답니다. 현재 1122개이군요. 비공개가 122개나 있군요. 호호호~ 대체 무슨 내용일까요? 저런것만 골라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지만, 지금은 귀찮고 나중에 텍스트큐브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분리되어서 나오니 그때 봐야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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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와 한국어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6~70%의 한국어 어휘가 한자에서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어휘들이 주로 고대 한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더 많은 어휘는 지금도 그대로 혹은 약간의 변화만을 거친 채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홍콩영화를

보 다 보면 한국어와 발음과 의미가 똑같은 어휘들이 자주 등장해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이는 북방유목민족의 남하와 관계가 있다고 하네요. 유목민족의 남하 전에 중원을 차지하고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을 벌였던 한족 왕조에서 쓰이던 언어가 현재의 남쪽에서 통용되던 언어인 거죠. 허나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원을 상실하고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레 한반도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끊기고 그 후로 북방계통의 중국어가 표준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어는 현 남방계열의 중국어와 더 비슷한 점이 많게 된 거죠. ( 중국역사 전공하신 바로님이 확실하게 알려주시겠죠...ㅋㅋ  )

아직 하얀눈님이 글에서 맘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_
http://www.oh-bang.com/11?TSSESSION=3550d39959032ac9108c6dab3ed2d15b


적으라고 적고 있는 나도 문제이긴 하다.후....-_-
그런데 본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중국 고대사라는 말이다!!
이건 언어학적 문제인데!!! 잘 몰라! -_-!
그냥 여기 저기서 들을 이야기를 종합해 놓은거니까 알아서!!! -_-


일단 한글과 한국어의 언어체계는 기본적으로 알타이어족의 기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어족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 한국어와 일본어 속에서는 많은 "한자"요소가 포함되어있기 떄문이죠. 그래서 혹자는 알타이 어족에서 몽고계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분류하지 않고, 독립적인 한국-일본어 계열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북방 이민족의 유입과 한국과의 교역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전부터 황해는 강력한 교역수단이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유명한 것은 신라방, 고려방, 표해록등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더 궁금한 내용은 윤명철 교수님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황해를 환지중해로 설정하는 재미있는 책들이랍니다. 어찌 되었든, 한반도와 중국 남부는 지속적인 교류를 해 왔고, 현재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이 중국 남부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방계열이 한국어와 비슷하다기 보다는, 예전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활용해오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고대 한어의 단어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인데, 어법은 중국어와는 완벽하게 다른 알타이 어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의 교류대상은 중국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방 민족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하여왔고, 고대 한국어와 현대 한국에서도 이런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아직하얀눈님은 북방민족들은 낙후되고, 덜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교류의 가능성을 조금 무시하지만, 사실상 북방 민족들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 유산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곳에 전해주었던 전달사의 역할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물론 그 방법이 가끔은 약탈과 침입이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문화 전파의 한 모습이죠) 이러한 예시로는 한국어에서 "강"이라고 말하는 단어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강의 고대 한국어는 "가람"으로서(한가람 서점이 이것이죠^^ 한가람은 한강이라는 뜻이랍니다.), 표기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가람을 빨리 여러번 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강이나 가람이나-_-; 그게 그 발음입니다. 그리고 이 가람은 알타이어 계열에서 강을 의미하는 보편적인 발음으로 통용됩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어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북방계열 언어체계입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의 중국과의 교류로 인하여 많은 단어들이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지금 현재의 한국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교류를 무시하고, 가장 순수한 한국어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이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교류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이기 떄문입니다. 물론 단순히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하나의 문화가 사멸되는 것이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긴 합니다만...이건-_ 별로 이야기 안해도 될 말이라서.....패스~

선진시대와 그 뒤의 "동이족"개념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선진시대 혹은 시대를 조금 더 높여서 전국시대 전의 동이족은 현재 중국의 베이징과 산동반도에 있었던 동이족을 말하는 것이며, 그 뒤에는 요동반도 동쪽의 민족을 지칭하였습니다. 또 선진시대 전의 동이족은 진한시대를 걸치면서 모두 현재의 한족으로 포함되게 됩니다.

물 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선진시대전의 동이족은 산동반도와 현재의 한반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영역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오류가 있는데, 흔히 동이족이라고 말해지는 민족에게는 고서의 기록상에서도 9개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진시대 이전의 이 분파끼리의 공통점은 매우 애매모호한 수준입니다. 단지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현재 중국의(당시의 서안과 장안일대)의 동쪽에 있기에 묶어서 같은 민족이라고 말을 한 것 뿐이죠.

예를 들어서 저희가 그냥 유럽이라는 지역적인 구별단위로 유럽사람이라고 하지만, 유럽사람중에서는 터키종부터 게르만종 아리안인종등등 수 많은 인종이 얽혀서 민족을 구성하고 있죠.



지역적인 구별과 인종/문화적인 구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이유에서 중국학자들도 동이족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자유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선진시대 이전의 동이족은 화하족과 융합하여 현재의 한족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주류니까요. -_- 이것을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중국의 학자들도 별 수 없이 동이족의 위대함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물론 선진시대 이전의 동이족의 개념에서 새 토템에 대한 숭배가 나옵니다. 그것을 보통 화하족과 구별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삼고, 동이족의 실체를 밝혀 냈다고 합니다만....새 토템은 전세계에 매우 넓게 퍼져 있는 샤마니즘 신앙입니다. 심지어 아메리카의 잉카제국에서도 새토템(그것도 새토템의 전형인 태양 새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죠.

또 이렇게 말하면 위대한 동이족이 이를 전파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이것은 지금은 저물어 가는 이론체계인 전파론입니다. 어느 한 곳에서 문명과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현재 계속되는 인류학적 연구를 대표로 하는 다양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허구성이 들어나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냥 갑자기 어느 동이족 문명설을 토대로 전개시킨 글을 보고 써보았습니다.


우환乌桓과 같은 경우, 우환산乌桓山에서 시작하여 우군새외五军塞外, 연변십군沿边十郡(已经塞内), 사군(四郡)으로 점차 남쪽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점차 남쪽으로 가는 상황에서 문화와 정치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나 우군새외에서 연변십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급속적인 발전을 하게 한다. 그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 남쪽의 지식계층을 만나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정비되는 과정을 통해서 발달한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냈음에도 지속적인 남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환의 행동은 다른 북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흉노도 아래로 내려왔고, 몽고도 내려왔고, 청나라도 내려왔다. 더 좋은 땅을 원하는 것일까? 하긴 지금의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으려고 내려오고 싶어한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 역시 몇번의 수도 이전이 있었다.


그런데 이유가 애매하다. 정말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남하한것인가? 약탈을 위해서 남하한 것인가? 아니면 한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자 취향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좋은 땅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 문제에서도 생각해 것이, 다른 북방민족과는 다르게 축성(성을 쌓는 기술) 상당히 발전시켜놓았는데, 성이라는 것이 보따리에 싸서 이사할 수도 없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동을 했다라….수도를….그것도 몇번이나

 

나중에 생각해보자…….잡상 같아도나중에 고증해보면 좋은 주제가 될지도….하지만 지금은 아냐아냐저거 고증하면 인간이 죽어나갈거야~~~



음하하..그래그래! 난 졸업논문 초고를 끝냈어! 이젠 쌩~~ 고생은 당분간 사양이야. 음하하하;;


변방사라고 부르고 민족사라고 읽는 수업을 듣다가 선생이 말한 내용이다. 정확한 고증은 수업인 관계로 되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적어본다.


1)      전쟁

죽어라 싸운다. 끝까지 싸운다. 이유를 유목민족의 경제체계는 자체적인 생산으로만은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어찌하였든 싸운다!

2)      수렵

유목민족에게 수렵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몽고족의 원나라나 만주족의 청나라나 중국땅을 정복하고도 일정 기간에는 초원으로 돌아가서 수렵을 하였다. 또한 수렵이라는 행위가 사냥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군사연습의 성격과 같은 지라. 결국 전쟁을 위한 준비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3)      쿠리타이

후계자 문제를 비롯한 몽고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던 쿠리타이는 사실상 전쟁회의였다고 있다. 전쟁이라고 달려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회의와 정책 결정을 해야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몽고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전쟁전쟁이었다는 말인데 말이다..... 조금은 억측인듯 싶지만, 재미있는 의견이기도 하지 않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몽고의 문화무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는 하다. 물론 그건 아니다. 단지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가 사는 방식중에 북방 유목민들의 생활이야 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명이라고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소박함을 간직하고 어쩌고 라면서 말이다. 머....그렇게 볼수도 있다.  끙;; 날이 갈수록 양비론쪽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싫다.ㅠㅠ


흐음..王小甫 왕샤오푸가 신장 위구르쪽에서 와서 그런가? 다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일부 중국인들이 한족을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니다. 흐음...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 솟대에 대해서다. 사실 솟대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렇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패스하고, 중국의 고대에는 두가지 유형의 솟대가 있다. 한가지는 祭社라고 불리는, 유교의 전통아래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의 솟대와 개념이 유사한 솟대?!이다. 그리고 두가지는 외형적인 모습이 모두 나무에 대한 숭배여서 같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祭社는 땅에 대한 제사이고, 솟대는 하늘에 대한 제사이다. 그 본질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솟대와 개념이 유사한 솟대는 상나라때 유행했고(물론 한나라때 도교와 어울려서 변형된 모습으로 출현하지만 그건 너무 변형되서 패스) 祭社는 주나라때부터 그 사료나 유물들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본인이 사료를 모아서 결론을 낸 부분이다. 이 다음부터는 어디까지나 증거자료가 부족한 추론이다. 그러니 믿지 마라.그래서 논문에서도 적어 두지 않은 부분이다. 사실 논문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_-;;

 그런데 말이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상나라와 주나라의 중요한 풍습중에 하나였던 (샤머니즘적 숭배는 당시의 종교-정치 일체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두가지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변천으로 변했다고 하기에는 주나라때의 楚에서 발견되는 솟대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솟대의 분포범위는 잘 보면 일부 사학자 들이 주장하는 동이족과 화하족의 구분선과도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새를 숭배하고 하늘을 숭배한 동이족이라는 문화와 땅을 숭배하고 뱀을 숭배했던 화하족을 솟대의 시대와 장소적 분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상나라는 동이족의 주축이 되어서 세운 것이고, 주나라는 화하족이 주축이되어서 세워졌으면, 그 이후로 계속 화하족의 문화가 중국 문화의 주축으로서 내려왔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된다면 되고 안된다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주의해야된다. 동이족은 한국에서는 자신의 조상으로 치지만, 중국에서도 자신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중국의 역사관에서는 분명히 중국의 땅 위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 역사관에서는 분명한 진실이다.

우리는 동이족이 니꺼니 내꺼니라는 말보다는, 중국이 진정한 다민족 국가였음을 인식시키고, 현재 화하족 중심사상을 누그러트리는 것이 중국의 유교제국주의로 가지 않는 길임을 생각해야 될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상주변혁설은 당연하게 성립이 된다. 아예 완전히 다른 민족이 정치을 잡았는데 달라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국가는 아직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약하였고, 동이족이 중심이 되어서 세워졌던 국가에서는 이렇게 솟대를 숭배하였고,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 祭社와 솟대가 동시에 나온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솟대가 과연 동이족만의 전유물일까? 그렇게 말하기 힘들다. 이것은 북방민족계열 뿐만 아니라 남방민족 계열에서도 많이 나왔으니까 말이다. 이번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본인 미치지 않았다. 본과 졸업논문에서 아시아 전체의 솟대 사상을 다루는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싫다. 어디까지나 한국 중국 북아시아로만 한정했다-_-) 남방쪽의 소수민족에게서도 솟대 사상이 발견된다. 이 남방민족은 무엇인가?

어떤 학자의 말대로, 동이족 중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한 갈래인가? 아니면 남방민족에게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인가? 고증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솟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솟대의 사상은 우주나무와 신성한 새의 생각이 모여서 만들어졌고, 그것은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해서 퍼져나갔다기 보다는, 각각의 민족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현재의 남방민족이 동이족중에서 남쪽으로 온 갈래라면, 솟대는 한군데에서 발생해서 퍼져나갔다는 학설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이상 이번 논문에 못 쓴 부분에 대한 중얼중얼이었다. 저것으로 석사논문을 쓰면 재미는 있겠으나, 안 할거다-_-;; 이번에 한번 하고 알았다. 짜증나서 죽는줄 알았다. 안해! 최소한 솟대는 안해!! 안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국가 기구 동북아역사재단이 정식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더하면 상기 역사재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연구회 주최 토론회에서 '요,금,원,청은 중국사가 아니며 여진,만주,한민족사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큰 목소리로 불거져 나왔다는 것이다.

--- 다음 대한신보의 인문학의 위기중에서...
http://blog.daum.net/hanmauom/9966874

이 말은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말이다. 본인도 다음 대한신보의 글이 일정부분 옭다고 생각한다. 학자는 어디까지나 "참"으로 향하여야 한다. 설사 그 참이 지평선과 같이 다가가도 다가갈 수 없다 할지라도 끝까지 미친듯이 바보처럼 지평선으로 향해 가는 것이 학자라는 종자들이다.

본인도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고, 개인 사정으로 어릴때부터 한국 인문학의 꼬라지도 잘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에도 동감한다. (일자리 정말 없다. 후... )문제는 진정 참이라는 것을 추구하신다는 위의 글에서 위험한 편견과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이 말하는 동북공청, 간단히 말해서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라는 것은, 중국의 기본 역사관인 다민족 일국가설에 의하면 분명한 "참"이다. 참말로님도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현대 역사학은 각각의 역사관에 대해서 인정한다. 각각의 역사관 마다 각각의 이론과 근거들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역사는 이미 해석자(역사학자나 기타등등)의 역사관에 따라서 변하는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주류 역사관으로 보면, 곧 민족설으로 보면 고구려는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요,금,원,청은 중국사가 아니며 여진,만주,한민족사로 보아야한다'가 너무나 당연한 참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한 문제가 된다. 그럼 중국은 자신의 역사관으로 한국의 역사는 "삼한, 신라, 백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고구려! 부여!는 한국사가 아니며 중국사! 중국사! 중국사!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해도 된다. 왜냐하면 똑같은 논리이기 때문이다.(이래서 현대 역사학이 서로의 역사관은 터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 자체에만 터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냥 각각의 참을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중국이 현재 전가의 보도인 역사관을 들이밀지 않고, 고구려는 속국이고 독립국이 아니었다는 식의 논리 전개는 중국의 역사관으로 보아도 분명한 오류이다. 그건 그렇게 대응하면 되는 문제일 뿐이다. 고구려가 독립국이어도 고구려가 중국사에 편입되는 것은 중국의 역사관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중국에 관한 것은 중국에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은 한국어로 적혀져 있고, 이 글을 보는 사람이 한국인이기에 이야기하고자 한다. 본인이 동북동정에서 어떠한 애국심이나 적개심이 생긴다면,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세뇌교육, 반공사상을 통한 지도층에 대한 불만 완화와 수단 확보,이 아닌가 되돌아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가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하는 말이 학문적으로 이야기 하자는 말이다. 살짝 빈정대면, 평소에 얼마나 역사책을 보시는지 궁금할 뿐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글의 쪼가리로 동북공정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문학의 위기다. 이 기회에 역사책 한권 사서 동북공정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학자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성과일 것이며, 경제적인 지지도 될 것이다.

추천하는 책 : 김한규 <천하국가>
개인적으로 이 동북공정에 대해서 한국과 중국 양측의 생각을 중심을 잡고 조명하고 있다. 책이 좀 두꺼운데...만사 귀찮고 동북공정만 보실 분들은 서론부분만 읽어도 대략의 동북공정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실 수 있으리라 본다.

부언하면 김한규교수님의 <천하국가>의 역사공동체이론이 가장 나의 생각에 근접한 학설일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금의 동북지방에는 그 동안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던 (한국이나 중국과는 독립된) 역사 공동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석하면 양쪽에서 싸움이 날 일이 없겠지만...이 이론은 한국과 중국의 양측에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그러니 본인이 생각하는 세계공동체론 같은것은 먼 훗날의 꿈일 뿐이다. 예수님이 꿈꾸던 네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조차 멀어져 가는 마당에 세계 인류 모두의 역사는 개꿈일 뿐이겠지.


민족주의로 철저하게 뭉쳐서 외쳐대는 한국...
신중화주의로 달려가는 고집의 중국...



历史试题(2006


一、单项选择题(每题
1分,共20题计20分)


1
. 有一位思想家,发扬孔子思想中仁的内容,形成以仁义为核心的思想体系。他倡导性善论,认为人性天然地存在着导向道德的善端,叫做“良知”、“良能”,它既 是人心、又是人性、还是天道。学习的任务就是反身而诚,即发现并扩大这些善端,叫做尽心、知性、知天,即思诚哲学。这位思想家是(  

A.墨子              B.孟子              C.庄子                           D.韩非子


2
.一位政治家为了巩固政权,下令求才,其政策是“唯才是举”。这位政治家是(  

A.汉武帝                        B.曹操              C宋太祖                        D.王安石


3
.官方修史制度非常发达,私人修史也空前活跃,史学家众多,名著选出,如司马迁的《资治通鉴》等,被称为古代史学的鼎盛时期,这个时期是在(  

A.唐朝              B.宋朝              C.元朝                   D.明朝


4
.中国古代有一个时期由于长期的战乱和饥荒疫病,生产遭到破坏,人口损失严重,经济凋敝。为了有效地恢复统治秩序,稳定社会,增加税收,当时的皇帝先后下达6次有关释放奴婢和3次禁止虐待奴婢的诏令,在一定程度上阻止了自耕农沦为奴隶的趋势,对解放生产力有积极的意义。这是发生在(  

A.文景时期       B.西汉末年                    C.东汉初年                    D.东汉末年


5
.奴婢在元朝被称为驱口,主要来源于(  

A.农民              B.手工业者                    C.战俘                            D.商人


6
.《佛国记》的作者是(  

A.鸠摩罗什       B.朱士行                        C.法显                           D.玄半奘


7
.皇太极建立清国之后,将蒙古衙门改为(  

A.军机处                        B.理藩院                        C.总督                           D.保甲


8
.在今鄂尔浑河、叶尼塞河流域发现很多碑文,是古代漠北第一个创造文字的民族所使用的文字,这个民族有火葬、嫠面、立杀人石等习俗,这个民族是(  

A.回纥              B.吐蕃                           C.突厥                           D.室韦


9
.以下不平等条约,哪一个不是在第一次鸦片战争时签订的(  

A.北京条约                    B.南京条约                    C.望厦条约                    D.虎门条约


10
.以下抵抗日本侵略军进攻的战役,哪一个不是在正面战场进行的(  

A.淞沪会战                    B.南京条约                    C.望厦条约                    D.虎门条约


11
7日一星期的制度,用日、月、火、水、木、金、土7颗星作为星期日至星期六的名称,起源于(  

A.古代埃及                    B.古代希腊                    C.两河流域                    D.伊朗高原


12
.“线形文字乙种”属于(  

A.巴比伦                        B.克里特文明    C.迈锡尼文明   D.荷马时代


13
.英国学者罗林生在19世纪发现了“贝希斯敦铭文”,并先后释读成功其中的古波斯文、阿卡德文,但没有认读出(  

A.线形文字甲种                          B.象形文字

C.楔形文字                                 D.埃兰文


14
.提出以“功利”为依据修改宪法、以“最大多数人的最大幸福”为立法原则的是(  

A.洛克                                        B.耶利米·边沁

C.约翰逊·密尔                          D.邦雅曼·贡斯当


15
.领导20世纪五六十年代美国黑人争取自由平等、反对种族歧视的民权运动领袖是(  

A.肯尼迪                        B.约翰逊         C.马丁·路德   D.马丁·路德·金


16
.斯大林模式的特征是政治上一党制和高度的中央集权制;经济上单一的公有制经济,指令性的计划经济。斯大林模式形成的标志是(  

A.大清洗运动                 B1936年宪法

C.战时共产主义政策      D.新经济政策


17
1936年二·二六事件后,广田内阁的成立标志日本法西斯专政体制的初步建立,占据其统治地位核心的是(  

A.皇道派                        B.青年军官                    C.统制派                        D.民间法西斯


18
193777,日本帝国主义挑起卢沟桥事件,发动了全面侵华战争。面对日军的侵略行为,英美特国的态度是(  

A.对日绥靖                    B.反对侵略                    C.援助中国                    D.对日宣战


19
.上个世纪80年 代后期,由于没有找到适合本国特点的现代化道路,东欧各国经济普遍陷入困境,人民不满情绪激增,政局动荡,领导层出现分化。在前苏联“新思维”和西方国家 宣传的影响下,东欧各国普遍经历了实行多党制、共产党失去执政地位并解散或改名、实行议会民主制度、推行私有化等过程,其中动荡最为激烈的国家是(  

A.民主德国                    B.南斯拉夫                    C.罗马尼亚                    D.捷克斯洛伐克


20
.伊朗和伊拉克两个邻国由于长期存在着边界领土、民族以及宗教教派等矛盾,最终爆发了两伊战争,给双方造成巨大的损失,后在联合国的调解下,这场战争结束于(  

A1980       B1988       C1990       D1991


二、填空(每题
1分,共20题计20分)


1
.孔子讲学,教授的内容是“六艺”,即《书》、《诗》、《乐》、《易》、《春秋》,对待六艺的态度是“            ”,即遵循六艺的精神实质,加以发扬,而不另辟蹊径,妄作新意。


2
.魏晋南北朝时期,随着佛教道教的盛行,无神论思想也在辩论中发展,最著名的代表性著作是范缤的《            》。


3
.清朝政府厉行禁教,起于            末年。罗马教廷禁止中国教徒祭天、祭孔子、祭祖先,引起了清朝上下的不满,于是严禁西方传教士传教。


4
.鸦片战争后,中国思想文化领域的有识之士继承和发展明清之际特别是嘉道以来讲求“            ”的思潮,反对脱离实际,反对崇尚空疏,注意研究现实问题,主张向西方学习,倡言改革,以达到强国御侮的目的。


5
.进入天京后,太平军面临的形势是:要巩固天京大本营,必须西征;要断绝清政府财源,充实自己经济力量,必须东征;要推翻清朝统治,必须           


6
.训练新式陆海军是洋务运动的主要内容之一,北洋水师是由            一手创办和管辖的,也是他经营最久、用费最多、最为得意的一项洋务事业,其兴衰不仅和淮系集团势力的消长密不可分,也与整个洋务运动的成败相始终。


7
.光绪初年,慈禧太后又扶持“            ”反对洋务派,洋务派与顽固派争论的实质,是统治集团内部开明与守旧的不同政见之争。


8
            运动既是一次爱国救亡运动、政治改良运动,也是一次思想启蒙运动。它在思想上、干部上为辛亥革命做了准备。这场运动的失败既有客观原因,也有主观原因。客观原因是封建势力过于强大,新兴的维新派缺乏实力。主观原因是维新派把变法看得过于简单,且严重脱离了民众。


9
            年,“黄埔军校”建立,其特点是政治教育和军事训练并重。


10
.《上海停战协议》签定后,蒋介石立即正式宣布“            ”的政策,在这一政策指导下,国民党对日实行不抵抗主义,对中共领导的红军和革命根据地发动了一次次围剿。


11
.法国的自由主义是在反对            的独裁统治、尤其是在反对复辟时期的极端派王党的过程中发展起来的。


12
.德国哲学家费希特于1808年发表《对德意志民族的演说》,提出:成为一个民族的根本,在于民族精神,他被看作是明确表达            思想的代表人物。


13
1920年正式成立的            ,是世界上第一个政治性国际组织,反映了20世纪世界整体化的趋势。它又是凡尔赛一华盛顿体系的组成部分,被少数战胜国所操纵,成为维护帝国主义战后新秩序的工具。


14
.面对1929年经济危机的严重打击,新上任的美国总统罗斯福采取通过国家干预经济生活和改良的方法,调节缓和资本主义的矛盾,仅在193339616日期间,就制定了70多个应急方案,史称“            ”。


15
1948年联合国大会通过《            》,宣布“人人生而自由,在尊严和权利上一律平等”。


16
19473月,美国总统杜鲁门发表国情咨文,宣称世界已经分裂为两个阵营,美国必须支持“自由世界”抵抗“极权主义”,表明美国在全球范围内推行遏制苏联、全面扩张的外交政策,被称为“杜鲁门主义”。杜鲁门主义的出笼标志着            正式爆发。


17
19485月,            国建立,第二天周遍的            国家宣布对其进行“圣战”,史称第一次中东战争。


18
19554月在印尼召开的亚非会议,是历史第一次没有西方殖民国家参加,由亚非国家自主召开的会议,是第三世界开始兴起的标志,会议产生的团结合作、反帝反殖、维护民族独立、争取世界和平的“            ”推动了民族独立运动的发展。


19
19638月由美、英、苏三国签订了《禁止在大气层、外层空间和水下进行核武器试验条约》即《部分禁止核试验条约》。1968年,三国又签订了《            》。


20
1982年上台的中曾根康弘首相宣称进行“战后总决算”,第一次明确提出日本要从    大国走向            大国。


三、名词解释(每题
5分,共6题计
30分)

1.四谛

2.保甲制度

3封君封臣制度

4.行会

5.人文主义

6.西进运动


四、回答问题(每题
10分,共3题计30分)

1.简述二战后日本经济及其迅速发展的原因。

2简述宋元时期的商业与城市状况。

3.简述德国工业革命的突出特点及其成效。




역사는 외우는 것!!!
이해하는 거 라고 태클 걸지 말기//누가 뭐래도 외워야 해+_+



출처는 사랑스러운 기생수!! -0-  

历史试题(2005


一、单项选择(每题
1分,共20分)

1.以下不属于春秋五霸的是(  

A.齐桓公   B.宋襄公  C.晋厉公      D.楚庄王


2
.佛教最早传播到中国的时期是(  

A.秦朝      B.西汉      C.东汉       D.魏晋


3
.清朝决定实行“摊丁入亩”的皇帝是(  

A.顺治    B.康熙      C.雍正      D.乾隆


4
.以下不属于“戊戌六君子”的是(  

A.谭嗣同   B.林旭    C.康有为      D.杨深秀


5
.袁世凯政府被迫与日本签订丧权辱国的“二十一条”是在(  

A1914      B1915     C1916       D1917


6
.以下不平等条约中,割让辽东半岛、台湾全岛及所有附属各岛屿和澎湖列岛给日本的条约是(  

A.《南京条约》  B.《北京条约》      C.《马关条约》        D.《虎门条约》


7
20世纪20年代,中国共产党提出最高纲领和最低纲领的全国代表大会是:(  

A.一大      B.二大       C.三大      D.四大


8
1926年,造成骇人听闻的“三一八惨案”的政府执政者是:(  

A.张作霖       B.段祺瑞      C.蒋介石      D.吴佩孚


9
1927年南昌起义的领导者不包括:(  

A.贺龙       B.叶挺      C.周恩来         D.叶剑英


10
.中国共产党确定建立抗日民族统一战线策略的会议是:(  

A.遵义会议   B.洛川会议   C.瓦窑堡会议   D.中华苏维埃第一次全国代表大会


11
.古代埃及第18王朝进行宗教改革的法老是:(  

A.阿蒙霍太普三世      B.图坦卡蒙 C.埃赫纳吞            D.图特摩斯三世


12
.罗马共和国末期的“三头政治”中,不属于“前三头”的是:(  

A.恺撒     B.克拉苏        C.安东尼        D.庞培


13
.奥托一世创建的神圣罗马帝国的领土不包括以下哪部分:(  

A.德意志        B.奥地利        C.彼希米亚     D.意大利南部


14
.罗马帝国时期,希腊人与罗马人对非希腊、非罗马人(其中包括克尔特人、日耳曼人、斯拉夫人和匈奴人)称之为:(  

A.雅利安人     B.达萨       C.蛮族       D.原人


15
16世纪德国宗教改革的领袖马丁·路德撰写的著名宗教改革三大论著不包括:(  

A.《九十五条论纲》         B.《致德意志民族的基督徒贵族书》

C.《关于基督教的自由》     D.《教会的巴比伦之囚》


16
177674,标志着美国独立的《独立宣言》是在以下哪个城市发表的:(  

A.纽约      B.费城        C.华盛顿      D.约克镇


17
1815年“神圣同盟”的参与国家不包括:(  

A.普鲁士        B.俄国        C.英国       D.奥地利


18
.德国古典哲学的创始人是:(  

A.谢林     B.康德      C.费希特      D.黑格尔


19
.欧洲战场的反法西斯战争胜利结束后,美、英、苏三国首脑着重讨论战后世界的安排的会议是:(  

A.德黑兰会议     B.开罗会议      C.雅尔塔会议        D.波茨坦会议


20
.实行“新保守主义”的美国总统是:(  

A.杜鲁门       B.里根     C.肯尼迪      D.克林顿


二、填空(每题
1分,共20分)

1.隋唐时期所实行的三省六部制度中,设于宫外,直接领导六部的省为       


2
.宋仁宗在位时期,以范仲淹为主要领导者的政治改革历史上称为            


3
.太平天国天京政变后,得到洪秀全重用并被封为“干王”的是       ,体现他改革方案的代表作品是         


4
.“府院之争”实际反映了英美帝国主义与日本帝国主义在侵略中国利益上的矛盾,其中代表前者利益的是以            为首的政治集团。


5
1921723,中国共产党第一次全国代表大会在         召开,大会通过了党的纲领,并确定以共产主义为自己的奋斗目标。


6
1922年五月,元培、胡适等在《努力周报》发表《我们的政治主张》一文,主张组织一个             作为改革中国政治的最低限度的要求。


7
.“新三民主义”之新,首要表现在它确定了孙中山所提出的          的三大政策。


8
1936年在抗战形势的逼迫下,以张学良、              为首的国民党爱国将领发动“西安政变,”逼蒋抗日。


9
19403月中共中央发出《抗日根据地的政权问题》的指示,提出了         政权建设的原则。即在政权的人员构成上共产党员、非党的左派进步分子、中间党派各占1/3


10
19489月至19491月,中国人民解放军对国民党反动力量相继发动的三大决定性战役是辽沈战役                 


11
.目前所知世界上最早的成文法典是乌尔第三王朝的         


12
.古代印度孔雀王朝的国王         在位时,佛教成为南亚次大陆最具影响力的宗教。


13
14世纪的文艺复兴首先产生于意大利的城市        ,随后发展到更多城市,并在1516世纪传播到欧洲其他国家,形成高潮。


14
16世纪英国在国王         领导下进行了一次脱离罗马教廷的宗教改革,并颁布了《王权至尊法令》,使英国教会称为国王统治的“国教”。


15
1598年,法国国王亨利四世颁布意在促成天主教与新教和解的       ,成为欧洲历史上第一个宗教宽容法令。


16
17世纪英国革命中,“新模范军”的领导是        ,他在英王查理一世被处死后独揽大权,成为资产阶级和新贵族维护自己统治的一把“宝剑”。


17
184711月,马克思、恩格斯共同起草的        的发表,成为科学共产主义诞生的标志。


18
1942年,英军在北非的          战役中将德意军队赶出埃及,成为二战北非战场的转折点。


19
.联邦德国成立后,按照被称为“德国经济奇迹的设计师”        提出的“社会市场经济”理论进行经济改革,推动经济发展。


20
.二战后,在       的领导下,埃及爆发反抗英国的1952年“七月革命”,并于翌年建立了埃及共和国。


三、名词解释(每题
5分,共30分)

1.改土归流

2.《水经注》

3.一二·九运动

4.阿维农之四

5.门罗主义

6.不列颠之战


四、论述(每题
10分,共30分)

1.新文化运动的勒内容及其意义

2.从“公平施政”到“伟大社会”的改革措施及其实质

3.凯末尔改革及其评价




난 역사 싫어-_-외우는거 싫어-_-
근데 대학교까지 와서도 또또또 매일 외우고 있다는거-_-
모땍똥/등소평........난 중국 정치가들이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나봐ㅜ_ㅜ


출처는 사랑스러운 기생수!! -0-  

中国人必须掌握的常识(2

历史

【四大文明古国】古巴比伦、古埃及、古代中国、古印度

【五代】后梁、后唐、后晋、后汉、后周

【五贡】恩贡、拔贡、岁贡、副贡、优贡

【六朝】吴、东晋、宋、齐、梁、陈

【六家】阴阳家、儒家、墨家、名家、法家、道德家

【六部】礼部、户部、吏部、兵部、刑部、工部

【六历】《黄帝历》、《颛顼历》、《夏历》、《殷历》、《周历》、《鲁历》

【六法】规、矩、权、衡、准、绳

【六礼】冠、婚、丧、祭、乡饮酒、相见

【六艺】礼、乐、射、御、书、数

【六义】风、赋、比、兴、雅、颂

【八旗】镶黄、正黄、镶白、正白、镶红、正红、镶蓝、正蓝

【十恶】谋反、谋大逆、谋叛、谋恶逆、不道、大不敬、不孝、不睦、不义、内乱

【九流】儒家、道家、阴阳家、法家、名家、墨家、纵横家、杂家、农家

【四大发明】造纸术、印刷术、火药、指南针

【四大美女】西施、王昭君、貂蝉、杨玉环

【十大名医】秦越人〖战国〗、华佗〖汉末〗、张仲景〖汉末〗、孙思邈〖唐代〗、刘河间〖金代〗、李东恒〖金代〗、张子和〖金代〗、朱丹溪〖元代〗、李时珍〖明代〗、王肯堂〖明代〗

【中国历史十大猛将】项羽〖秦〗、霍去病〖西汉〗、英布〖西汉〗吕布〖三国〗、马超〖三国〗、冉

闵〖南北朝〗、斛律光〖南北朝·北齐〗、史万岁〖隋〗、杨再兴〖南宋〗、李文忠〖明〗

【隋唐名将】〖四猛〗罗世信·来忽尔·尚师徒·辛文礼、〖四大锤〗李元霸·裴元庆·秦用·梁士泰、〖十三杰〗李元霸·宇文成都·裴元庆·雄阔海·伍云召·武天锡·罗成·杨林·魏文通·杨义臣·秦用·梁士泰·秦琼+尉迟恭

【名将十哲】田穰苴〖春秋〗、孙武〖春秋〗、吴起〖战国〗、乐毅〖战国〗、白起〖战国〗、张良〖汉初〗、韩信〖汉初〗、诸葛亮〖三国〗、李靖〖唐初〗、李绩〖唐初〗

【满清十一帝】太祖[]高皇帝·天命〖努尔哈赤〗、太宗文皇帝·天聪〖皇太极〗、世祖章皇帝·顺治〖福临〗、圣祖仁皇帝·康熙〖玄烨〗、世宗宪皇帝·雍正〖胤禛〗、高宗纯皇帝·乾隆〖弘历〗、仁宗睿皇帝·嘉庆〖颙琰〗、宣宗成皇帝·道光〖旻宁〗、文宗显皇帝·咸丰〖奕詝〗、穆宗毅皇帝·同治〖载淳〗、德宗景皇帝·光绪〖载湉〗、逊帝·宣统〖溥仪〗
【建国十大元帅】朱德、彭德怀、林彪、刘伯承、贺龙、陈毅、罗荣桓、徐向前、聂荣臻、叶剑英

【建国十大将】粟裕、陈赓、徐海东、罗瑞卿、许光达、肖劲光、黄克诚、谭政、王树声、张云逸

 

유목사회의 구조 - 서울대학교동양학강의총서 10
하자노프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지식 산업사

출간일 : 1990-03-01 | ISBN : 8942329446
양장본 | 484쪽 | 210*148mm (A5)
정   가 : 15,000원


1. 서론:유목, 그 신화의 문제점
2. 식량생산 경제의 독특한 형태로서의 유목
3. 유목의 기원
4. 유목민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의 사회적 전제조건들
5. 외부세계에 대한 유목민의 적응양식
6. 유목민과 국가
7. 외부세계와 유목민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인류학자가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연구방법을 빌려서 만든 인류학책이다. 많은 부분에서 사료의 인용과 적용의 흔적이 보이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인류학에 기인하였다. 또한 이 책은 다양한 역대 유목에 대한 저작들을 망라하고 그 주요 논점들을 설명 비교 해 주어서 유목에 대한 입문서로는 최고라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에반스 프릿차드가 말했다 싶이. "결국 인류학은 역사학이 되느냐 아니면 무가 되느냐는 선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명언이 새삼 생각이 난다. 인류학은 종합적인 학문이라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이 되는 연구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숨겨져 있다. 현지 조사라는 것 자체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그럼 역사학자는 현지 조사를 아예 안한다는 말인가?!

또한 역사학-인류학-민속학-사회학은 각기 너무나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다. 그 뿌리가 과거에 대한 분석를 통한 미래 제시라는 점이 이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듯하다. 이미 이 학문은 서로간의 연구 대상, 연구 방법, 연구 목표등에서 매우 유사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서로 모두 흡수하였다. 이제 앞으로 이 학문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것인가는......나와는 상관없다. ㅋㅋㅋ -_-;;

그리고 이 책의 번역자인 김호동씨는 머랄까...한국 중앙아시아학에서 거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유목사회에 대한 책을 구하고 싶다면 다 필요 없이 김호동이라고만 검색을 하여도 양질의 책들이 있다. 대단한 분+_+;;





책에 밑줄긋기

과거는 낯선 나라다.
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1985)

데이비드 로웬덜 지음
김종원, 한명숙 옮김 
개마고원

출간일 : 2006-06-20 | ISBN : 8957690441
양장본 | 877쪽 | 223*152mm (A5신)

정   가 : 38,000원





역사는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해석일 뿐이다. 역사라는 것을 공부하면 공부 할수록 마치 "오언절구"와 같이 일정한 규격속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는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해 질 수도 없다. 마치 지금의 우리 현재도 완전히 구현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로웬덜은 완벽한 역사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런것은 환상이며 오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되도록 완벽한 역사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제시한다. 신이 죽고, 더이상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시대에 영원히 닿지 않을 지평선을 향해서 나아가나는 것이 옮은 것일까?

또한 일반인이 역사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서, 역사에 대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인 존재가치를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하는 로웬덜 자신도 말했던 역사학의 치명적인 단점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야 된다는 말인가? 역사가 역사 이상의 것이 되었을 때, 민중을 선동하는 도구가 될 뿐인데 말이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서 접근을 금지하고 있는 듯한 책. 그러나 역사학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우리의 애국적인 국민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환단고기를 즐겨 보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으나, 역사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하고 다시 한번 환단고기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진실이라는것은 있긴 있는건가?




책에 밑줄 긋기

요즘 또 언론에서 중국이 역사 왜곡을 한다고 난리법썩을 떨고 있고, 여론에 편승하여 자신이 애국자임을 만방에 알리려는 열혈 애국 네티즌들은 더욱더 열기를 내뿜고 있는 와중에 한마디 해야겠다. 역사 왜곡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중국에게는 안 통한다. 역사 왜곡이 아니기 떄문이다.

본인 북경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두면 "짱꺠 새끼들한테 배웠다고 옹호하냐? 세뇌됐군"따구의 소리가 나올거 같지만 할건 확실히 해야되니까 언급해 둔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본인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해서 대단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자! 왜 역사 왜곡이 아닌지 썰을 풀어 보겠다. 재수없는 전문 용어 썡깐다.-_-


1. 역사관이 다른거다.

한국의 역사관은 무엇인지 아는가?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다. 지금 살고 있는 "한민족"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의 조상이 세운 나라라고 여겨지는 것을 싹다 자신의 역사로 생각한다. 그래서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 발해등등으로 내려오는 나라의 역사를 한국사라로 하고, 은주,춘추전국,진, 한으로 내려오는 역사를 중국역사로 정의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이해가 되리라 본다.

근데 중국은 아니다. 중국은 지금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지들 중국의 역사로 본다. 예를 들어서 원나라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몽고족이 세운 나라지만, 중국의 역사관에서는 중국의 땅 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중국의 역사다. 얼핏 이해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사학에서 이거 틀린거 아니다-_- 정치 사회적인거 제외하고 엄격하게 역사 학문적인것으로만 따지면, 한국처럼 민족주의 역사관을 채택할 수 있는것이고, 중국처럼 지역주의 역사관을 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것도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같고 다를 뿐이다.

한국이 중국의 행위를 역사 왜곡이라고 한다면, 중국도 똑같이 역사 왜곡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둘다 학문의 영역을 떠나서 정치 외교의 구렁텅이에서 찌질대는 것이다.

정리. 중국 역사관으로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중국거 맞다.



2. 백두산이냐? 장백산이냐?
이것 가지고 열을 토해내는 사람들 때문에 굳이 뻔한 말을 한다. 중국정부가 백두산을 "천"두산이라고 부르던 "일"두산이라고 부르던 "장태백"산이라고 부르던 한국 정부가 뭐라고 할 권리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백두산은 북조선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경계선에 위치해서 양쪽 국가 모두에 속하는 영토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위의 사항에 해당됨이 전혀 없는 별계의 국가일 뿐이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백두산이라고 채택하느냐? 아니면 장백산이라고 채택하느냐다. 마치 "동해"로 읽으냐? "일본해"로 읽느냐와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각 국어로 된 인터넷 싸이트를 만들어서 직접 전세계 네티즌들에게 홍보를 해라. 물론 대한민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면 가하고 말이다. 서명운동과 같은 것이 효과적일것이다.

웃기는 건, 그동안 중국 유학생들이 중국에서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고 그렇게 말을 하고 말을 했건만 그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호응도 없다가 갑자기 난리를 치는 분들이여...후...좋다 난리쳐라! 하지만!!!

리플로 중국 욕하는 것이 압박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실제적인 해결책 두가지 다 말했고, 그것을 스스로 실행하라. 난 애국심이 거의 남지 않아서 못하겠다. 난 말뿐이고 싶지는 않기 떄문이다. 하지만 리플로만 열정적인 애국자분들은 안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잘해봐라.


3. 중국 학자와 한국 보도
한국 보도를 보다보면, 중국의 사학계가 합심을 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웃기는 짜장짬뽕되겠다. 학자는 것들은 원래가 위에서 뭐라고 찌질되도 아닌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북경대만 봐도, 위에서 언급한 역사관의 차이로 인해서 발해를 중국사로 보는 선생님과 아닌 선생님이 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누가 틀리고 누가 맞고는 없다. 제발 착각하지 마라.

중국의 학자중에서도 역사관의 차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다. 그러니까 생각없이 보도만 대충 보고서 중국 내부 사정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주전자의 뚜겅을 열어버리지 말자. 신문이나 뉴스도 상업적으로 돈 받아 먹으려고 어느정도 자극적으로 기사를 편집해서 100%공정성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라는거다. 후...



4. 민족주의...
물론 중국의 이런 역사적 노림수가 정치 외교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며 그에 대한 영향을 어떤 것일지는 고민해봐야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내 현실이 싫다. 역사라는 학문은 왜 맨날 그 잘난 정치 외교에 이용당해 먹는가? 아니 마치 첩 처럼 따라다니면서 똥구녕을 핣아서 살아가는 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잘난 민족주의다. 내 민족만 잘난거다. 그런 민족의 민족국가. 난 무섭다.

앞으로 인간은 얼마나 서로 죽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이 올까?
지금의 민족주의가 없어지면 다음은 어떤 사상이 우리을 분리시킬까?
아니 작금의 민족주의가 없어지기나 할까? ....후....


중국의 역사왜곡은 없다. 만약 중국의 역사관을 부정한다면, 중국도 역시 한국의 역사관을 부정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은 붕괴시킬 수 없는 건 아니다...후..하지만 학문적으로 존재한다면 둘 다 하나의 가치관이면 철학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존립의 근거는 모두가 있다. 단지 현실 정치와 외교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난리 부르스가 나기 시작하며, 역사라는 것을 역사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회상적인 사유와 감상으로 인하여 역사에 그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고...후....더 이야기 하기도 싫다.

젠장할 역사학...정치 외교의 똥구녕이나 평생 핣아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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