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쪽에서는 최근 다시 한번 "환빠대전"이 발생한듯 하다. 솔직히 과거에는 이 블로그에서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위 "환빠"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학도로서의 사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역사학도로서의 부담감.
차라리 본인이 역사전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관련 글을 써내려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은 공개적으로 역사전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영역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비교적 많이 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증거자료들을 레포트 작성하듯이 일일이 찾아서 나열해야한다. 물론 관련 논문이나 저작을 비롯한 학계의 흐름도 나열해주어야 한다.

만약 본인의 전공분야라면 비교적 쉽게?!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최소 수십편에 이르는 관련 논문과 저작을 읽어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부담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럼 본인의 전공만 쓰면 되지 않냐고? 그쪽이야 말로 민감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점이기에 부담스럽다. 본인의 전공은 북방민족사이며, 한중간의 민감한 사안인 고구려나 발해도 다룬다. 본인은 지도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며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 보며, 고구려사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인들의 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짱깨로 매도되기 쉽상이다. 이런 부담감에 석사졸업논문도 중국인들에게도 생소한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라는 주제를 채택했다.


2) 환빠들의 사료적 문제.
흔히 "환빠"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료"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역사 연구에서 사료는 기본이다. 그 뼈대이다. 그 정수이다. 그런데 "환빠"라는 사람들은 이 사료부터가 엉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료 반박은 어렵다고 그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쉽다면 쉬운 부분이다. 물론 대부분의 환빠들의 헛소리는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고문 소양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고문을 모른다는 것은 마치 더하기와 빼기를 못하면서 수학을 하겠다는 것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최근에는 수 많은 현대 한국어 번역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접근성을 높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역사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연구자가 고문의 원문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병신이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한자가 나오고, 해석이 나오면 그냥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환빠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료를 비판을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환빠들이 "식민사관에 의해서 해석한 결과"라고 하면 그것을 믿어 버린다.  식민사관조차도 그나마 사료라는 기초라도 있었다. 환빠들은 고문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소설을 전개하거나, 고문을 언급하더라도 원래 고문을 마음대로 변조한다.

원문 : "갑은 을나라를 침략하였다"
환빠식1 : "갑은 을나라에게 침공당하였다"
환빠식2 : "갑은 을나라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체 어떤 "학문"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허용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백날 설명해도 기본적으로 고문을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결코 일반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무지를 이용해 먹는 환빠들의 문제이다.


3) 환빠들의 논리적 문제.
환빠의 논리는 언제나 결국 "한국 만세!"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식민사학에 세뇌당한 병신들"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어서 반박을 해주지만, 솔직히 이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시절을 정점으로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민족"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선전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학적 증거도 없는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당당하게 중고등학교 "국사"강의에 사용되고 있다. 아니 역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져서 "국사"라면 "대한민국사"를 공부해야지 그 이전을 공부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다.

역사학의 방법론은 이제는 세계 공통이다. 기본적으로 사료를 보고, 사료를 비판하고, 사료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없이 마냥 무조건 "식민사관"이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하다 못해서 본인 스스로 "탈민족주의자" 혹은 "인간사관"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식민사관"이라고 근거 없이 매도하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간략하게 말하면, 과거에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싶다는 역사학도로서의 열정과 의무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니 맘대로 사세요~"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에휴...싸워서 머하랴. 사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박정희식 우민정치의 희생량인걸.....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어떻게 보면 아직 정열이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해드립니다. 환빠에 대한 비꼼이 좀 더 많아 지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위의 지도는 클릭하면 확대되어서 크게 나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분은 클릭!

왼쪽의 지도는 한국의 환단고기빠들이 환국 혹은 대쥬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지도는 중국의 중화빠들이 만든 대중국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네요. "니들 대체 다른게 머냐? 웃기는 쉐리들 -_-"

둘 다 우리민족이 최고이고, 최고여야 된다는 발상에서 어떻게든 크게 만들려고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차이를 나눈다면, 중국의 중화빠들은 미래의 영토나 여기서는 소개를 안했으나 몽골의 원나라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한국의 환빠들은 증거도 하나 없이 상고시대에 자신들 마음대로 환국이니 대쥬신따위의 영역을 만든 것이다.

환빠들도 슬슬 "미래의 대쥬신" 지도나 그려보는 것은 어떠한가? 중화빠들도 "상고시대의 대중화"을 그려보고 말이다. 그리고 환빠와 중화빠가 손 잡고 그냥 세계는 우리꺼~ 라고 하지? 둘이서 참~~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정리 : 어느 나라에나 스스로의 자존심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것에 의지하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환빠나 중화빠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은 저런 길로 절대 가서는 안될 것이고,

상대국의 저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만으로 상대국을 평가하지 말고 그냥 "미친개에 물렸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덧 : 너무 시니컬하게 적은 듯하다. 나름 유머러스하게 쓰려고 계획했었는데 쓰다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간도소송이 철저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현실정치적인 면에 집중하여서만 들을 쓸 생각입니다. 백날 A라는 이성을 사랑한다고 생각을 하여도, 직접 고백을 하는 것이 다른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1) 간도문제의 발단 :
간도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간도협약"을 맺은 다음부터다. 일본제국은 당시에 간도지역에 철도부설권을 얻기 위해서 청나라의 땅이라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씨조선[각주:1]의 영토라기에도 애매한 간도를 국제적으로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을 했던 조약인 것이다. 그리고 국제법상의 관례로 100년이 지난 이후에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각주:2]. 그리고 2009년 9월 4일이면 정확하게 100년이 되는 것이다.

* 간도은 왜 애매한가?
간도는 한자로 间岛라고 쓴다. 중간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현재에는 영토의 분계가 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이 부분 때문에 간도에서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다. 간도는 이씨조선과 청나라의 "국경면"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은 서로의 영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토가 아닌것도 아닌, 지금의 예로 따지면 비무장지대와 같은 곳이다[각주:3].

* 당시 각 국의 생각
일본제국 : 아직 만주국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단지 철도부설권들의 경제적 실익을 얻어야 되는데, 그 소유가 애매하였고, 당시 이씨조선을 사실상 지배하던 일본제국으로서는 직접 영토분쟁을 해도 되지만, 그냥 영토를 주는 대신 경제적 실익을 선택.

청나라 :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제 1차 청일전쟁(갑오청일전쟁)에서 객관적으로는 분명 월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쪽이 나고, 조선땅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뺏겨서 짜증나는 동시에 조선외의 영토에 일본이 들어올까 불안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간도라는 조선땅과 청나라땅의 분계선을 자신들에게 준다고 하니, 경제적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것을 알면서도 덥썩!

이씨조선 : ...................................할 말도 없다. 이미 일본제국의 꼭두각시같은 존재일뿐.


2) 지금의 현실
1-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은 다른 나라다.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북한은 명확하게 다른 나라이다. 비록 한국의 헌법이 현재 북한의 영토와 주권을 포함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고, 한국전쟁이 단지 한국이 참가하지 않은 휴전형태[각주:4]로 끝나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바탕은 실질영유권이다[각주:5]. 그리고 북한에 대한 한국의 실질영유권은 모두가 알다 싶이 없다.

2- 북한은 이미 중국과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은 이미 중국과 소위 "백두산 조약"이라고 불리는 것을 체결하였고, 백두산 천지를 기점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기준점으로 해서 국경선을 그었다. 다시 말해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한국의 권리는 사실 없다. 실질 영유권이 없으니까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각주:6].

3-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을 자극해서는 안된다.
사대주의가 아니다. 북한의 경우 자국의 권리를 타인이 쓰려는 것에 당연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경우도 권리도 없는 한국이 자국의 영토에 대해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에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동북쪽에서 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끝내서, 남은 영토분쟁이 거의 남쪽으로 집중시킨 이 상태에서 다시 거론되는 동북쪽 영토분쟁은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왜 그렇게 북한과 중국의 신경을 써야하냐? 통일을 하려면 강대국들에 샌드위치 당해 있는 한국으로서는 알아서 설설 기면서 눈치를 봐야한다. 요즘 북한과 사이가 멀어졌다는 중국이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 막강하며, 자체 정치-경제-군사력만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다. 억울한가?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이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수 밖에 없다.

4- 영토분쟁위에서 중국의 손을 들어준 다음은 어떻게 하실겁니까?
소송을 한다면 100년 기간 연장이라느니, 훗날 다시 주장할 때 근거가 된다는 분도 있다. 일단 소송을 하더라도 영토분쟁위원회에서는 사실상 중국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역사문서보다도 실질점령 혹은 실효점유을 더욱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각주:7] 물론 지금 중국이 가진 정치-경제-군사의 강력함도 한 몫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한국은 국제적으로 다시는 간도의 일을 언급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위대한 한국"을 꿈꾸는 몇몇 분들에게는 완전히 꿈이 꺽이는 것이다. 이 지점을 생각하지 않는 "위대한 한국"을 꿈꾸는 분들. 패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지금 소송을 해봤자 이득될 것 없다. 괜히 애국심과 같은 허망한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우리의 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투표를 하지 말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경제정책과 미디어정책에나 신경 쓰는 것이 100배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부록) 이 순간에까지 저를 너무 즐겁게 하는 환빠(유사 역사학)분들에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위의 내용보다는 이 것에 대해서 다 같이 즐겁게 웃자는 의미가 더 강할 수도 있다고 내 마음 속에서 외치고 있다. 미안하지만 잠시 시니컬모드로 들어가겠다^^
 
왜 주류역사학계, 강단에서 간도 문제를 다루지 않을까? 나는 그들이 진짜 역사를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간도 문제의 본질은 역사왜곡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역사조작의 장본인들이 극히 꺼려하는 것이다. 이는 발해사 전문가가 국내에 거의 없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발해라는 나라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크 등지에서 흔적을 찾아야 하는 나라인 데 그걸 한반도 북부에서 찾자니 난감하니까 연구자체를 안하는 거다. (중략)

만약 간도가 두만강 이북이 아니라면? 분명 간도는 전 조선땅이고 일본이 강제로 뺏어서 팔았다. 근데 간도가 두만강 이북이 아니라 구 만주.... 몽골 지역이라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지는 거다. 거의 100년 동안 작업해 온 날조사가 한 큐에 무너지는 거야.

출처 : 간도소송 급할 거 전혀 없다 (이런 글이 구글검색 최상위라니...)

이거 보고 웃겨서 배꼽빠질 뻔 했다. 장난하냐? 장난해?? 장난해????

1- 주류 역사학계와 강단에서 간도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KSI KISS - 학술 데이터베이스 검색사이트 에서 검색을 해보면 "간도"에 대해서만 78건의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간도에만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간도 내용을 언급했을 논문은 이에 몇십배는 있다는 소리가 된다. 이것이 간도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검색이나 좀 해보고 안한다고 하시죠.

2- 발해사 전문가가 국내에 없는 이유.
요즘에서야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며, 발해도 한민족의 범주에 넣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려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익숙한 용어가 "통일신라"이다. 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신라"인가?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남북국시대"이다. 그러나 통일신라라는 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을 정도이다.

관심이 없었고, 한국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발해사 전문가가 소수일뿐인 것이다. 본인의 지금 쓰는 논문은 소그드이다. 이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한국연구가는 본인이 알기로 한명도 없다. (물론 간접적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지만.) 좀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하던가 ㅋㅋㅋ

3- 발해라는 나라가 무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라고....ㅋㅋㅋ
그래. 니가 짱이다. 음하하하...그래서 증거가 먼데? 증거는?? 님하 증거는?! 이런 사람들의 예시를 보면 언제나 증거나 사료는 전혀 없이 무조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있었다고 한다. 그럼 상식적으로 서아이사와 북아프리카에서 관련 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맞다. 또한 관련 사료가 이를 증명해주어야 된다. 그런것 본인이 무식한지 본적이 없다. 반대로 서아시아의 것들이 발해에서 영향을 받아 변형된 형태로 발견된다. 그런데 저쪽은 그따위 것 없이 무조건 있었다고 말한다. 어쩌라고-_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서 찾기 힘들다고? 수 많은 발해관련 유물과 유적이 쏟아지고 있다.아. 이렇게 말하면 거대한 발해제국의 동쪽 끝에서 남아 있는 조금의 유물일뿐이라고 하려나? ㅋㅋㅋㅋ 후..작작해라. 중국학계에서도 점차 초기문명단계에서 서역 혹은 서쪽으로부터의 문화전달이 큰 영향을 행사했다고 인정하는 판에 왜 굳이 거대한 한국을 우기실까나?


4- 100년동안의 조작...
크하하하...음모론이구나. 음모론...킥킥...다시 말하지만 증거는? 당신은 학자라는 사람을 개뿔로 알고 계시나본데, 수 많은 어용학자들이 있지만, 끝까지 학자의 고집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학자들이 사실과도 다른 내용을 같이 숨겨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 양심있는 학자들은 다들 환단고기를 통해서 진실된 역사를 연구한다고?! 우습게 보지 마! 학문이라는 것은 거짓의 토대에서 세워질 수가 없다. 만약 그런 거짓의 토대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한 비판과 반박을 했을 것이다. 또한 본인도 성격상 그런 꼬라지는 결코 보지 못하기에 이미 예전에 그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규모 역사조작은 없다.

덕분에 아침 공부 전에 실컷 웃었다. 감사하옵나이다. 그리고 이제 작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다 보고서도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곳에 투표를 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본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송은 국가적으로 한국에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 투표를 반대하며, 그 시간에 정치-경제-미디어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아고라의 투표쪽 링크를 올릴까 하다가 올리지 않도록 하겠다.)



추가 :
제 글은 따지자면 국제관계식 분석이었습니다.(나...사학전공인데...난 왜이럴까..큭...) 역사적인 분석을 보고 싶으시면 슈타인호프님의 어째 올해가 2009년인데 이 떡밥이 안 나온다 했어.을 추천해드립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슈타인호프님의 몇몇 해석은 저의 해석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훼손될 정도는 아닙니다. 역사학쪽의 분석을 보고 싶으시면 위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1. 이씨조선은 어디까지나 정확하게 왕조를 밝히기 위한 표현일뿐. 어떠한 비하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역사에는 수 많은 "조선"이 있습니다. 명확한 구별을 위해서는 이씨조선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2. 어디까지나 관례이고, 마카오를 비롯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례의 힘은 의외로 무서운 것이다. [본문으로]
  3. 백두산 정계비에 의하면 정확하게는 청나라 영토이다. 그러나 사실상 청나라도 관리 안하던 곳이었다는 것은 사료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고....개인적으로 역시 "국경면"과 "비무장지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물론 근대화의 영향으로 간도협약쯤 되면 이미 청나라 영토인증.) [본문으로]
  4. 휴전협정은 북한과 미국간에만 맺어져 있다. 한국은 휴전협정에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이렇게 하지 않으면 A라는 나라가 갑자기 B나라를 먹고 싶어서, 저기도 내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실질영유권부분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약소국을 지키는 무기인 것이다. [본문으로]
  6. 간도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9월4일 당시 청나라가 일본과 '간도협약‘을 맺고 이 지역의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조선땅 간도를 넘겨주었다. 당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상태에서,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사용, 그 자체가 무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1965년 일본 정부가 간도협약을 무효로 한다는 국제사회에 선언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7. 같은 이유로 한국도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제소를 한다든둥 국제사회에 따져보자는둥 하여도 그냥 살포시 무시해주는 것이다. 그냥 냅두면 실효지배권 인정으로 끝나는데 왜 싸우는가? [본문으로]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기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똥을 싸고, 어떤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어떻게 싸움박질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문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이라는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신을 가진 이념과 한자라는 문자가 전래된 덕분에 일찍부터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사료는 믿기가 힘들다. 왜곡과 과장은 기본이고 삭제도 심심하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남자들이 허풍을 치는 것 중에 한때 10대 1로 싸웠냐느니. 100대 1로 싸웠냐느니. 내가 툭 치니까 옥수수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가 생각나시는가? 아니면 군대에서 북한에 넘어갔다 왔냐느니, 태권V가 국회의사당이 열리며 출동한다느니 하는 이러한 헛소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처절하게 깨지고 돌아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허벌나게 쪽팔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깨지고 돌아왔다."라고는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1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와 같이 서술해 버리는거다. 참~~~ 쉽죠?~~잉~

삭제도 비일비재하다. 당신이 피임을 잘못 해서 임신을 해버렸다. 혹은 임신을 시켜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정말 친한 주위의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물론 속도위반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수도 있다.) 물론 먼 훗날에 자서전에 한 줄 정도 언급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평생동안 마음 속 깊이 묻어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했다고 하자. 모두가 알다 싶이 나중에 신라만이 살아남아서 신라 사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게 된다. 김부식이 볼 때 위의 사실은 무지막지 쪽팔리다. 해결방법은? 그냥 해당 사실을 삼국사기에 쓰지 않으면 된다. 참~~~ 쉽죠?~~잉~

이렇게 문제가 많은 역사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료와의 교차분석과 고고학 및 다양한 학과의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역사자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A라는 나라가 있었고, B라는 나라가 있었다 정도는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분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사료조차 쓰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소설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이미 근대에 작성되었다고 "확정"된 환단고기를 기반으로 온갖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이다. 본인 얼마 전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이병화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을 다운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대체 어떤 고대사 역사논문에 역사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그의 말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증거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 써 놓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야되나? 그냥 자신의 말이 진리다라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사료는 분명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사료조차 쓰지 않는 사이비들아.
................그만해라. 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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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본인의 주변이 역사학도들이다보니 공자가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없다. 그런데...본인과 친하지는 않지만, 알기는 아는 한 사람이 이런 바보였다. 더 문제는 그 사람의 선배가 선진사(공자가 살던 시대) 전공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은 대체 멀까?

덧2 : 여전히 논문주제발표 준비중.....핵심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욕심에 나를 맡기고 있다.

아래글을 심심풀이로 씹으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점점 취미가 이상해져가는 것은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졸저 『신시본토기』의 378쪽 원문에서 인용.
(원문)
桓公問管子曰, 吾聞海玉幣七莢
可得以問乎, 管子對曰 陰山之유혼一莢也
燕之紫山白金一莢也, 發朝鮮之文皮一莢也

(풀이)
환공(桓公)이 관자(管子)에게 물었다. "나는 천하에 일곱 군데의 보물이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보물을 어디서 구할수 있겠습니까? 그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자가 대답하기를, "첫번째 보물의 위치는 월색(月色)의 보물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요 두번째는 은이 나는 자산산맥입니다. 그리고 발조선에서는 반점(斑點)이 있는 모피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세번째 보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항 외에도 같은 책 속의 경중갑(輕重甲)이라는 항목을 통해서 조선과의 거리가 8천리라느니 조선의 문피를 교역하는 일에 말을 잘 듣지 않으니 많은 돈으로 잘 대접하면 표범가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다시피 호피(虎皮)라는 단어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호랑이 가죽이란 해설이 등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로 호(虎)를 범이라고 하고 표(豹)를 표범이라고 하며 바다에 사는 해표(海豹)를 물범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원문에서 볼 수가 있는 "문피(文皮)"라는 단어의 뜻은 무늬있는 가죽을 통틀어서 한 말이므로 확실히 구분이 되지 않지만 경중갑에는 "豹之皮容金而金也"라는 말이 등장하므로 문피는 표범가죽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豹는 海豹, 즉 물범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이 정답이었다. 호랑이 가죽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선 가죽과 털옷이라면 추운 지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위시한 만주대륙을 연상하게 되고 따라서 고구려의 수렵도를 상상하게 되면 물범 생각은 아예 달아나고 만다.
그러나 호피를 주요한 수출품으로 다룰만큼 많은 양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고 더욱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시는 풍속이 있어 두려워하며 당시의 사냥술로는 포획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물범이라는 짐승이 우리 조상들의 귀중한 옷감이 되고 또 수출품으로서 외화를 흭득하는 효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뒷날 발해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품목 중에는 약간의 호피도 있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도 있다.
본래 이 물범이라는 짐승은 북위 42도 이상의 추운 지방인 추코트해나 베링해협에서나 볼 수 있는데 북위 38도 근방인 발해연안에 둥지를 마련하고 서식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였다고 한다. 같은 물범 중에도 이곳 발해연안 묘도군도에서 서식하는 종류는 얼룩무늬 물범으로써 베링해의 물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큰놈은 크기가 1.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60kg으로써 근래에는 백령도 근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대략 3,000마리 정도가 묘도군도를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범 이야기만 가지고도 고조선은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물범이라는 짐승이 평양이나 갈석산 근처에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물범의 활동한계는 요동만에서 백령도까지라고 KBS는 밝힌 바 있다.

출처 : 누르시면 날라갑니다~



토론 준비 때문에 글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문장이다. 얼핏 들어보면 말이 되는듯 하지만 솔직히 원문부터 엉터리로 해석한 부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문에 유혼은 礝碈이며 옥과 비슷한 류의 보석이다. 월색의 보물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모르겠다. 본인이 미숙한 탓인지 출처를 모르겠다. 그외의 해석도....왠 산맥이 튀어나오는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반쯤 기분풀이로 하는것이니 패스--


일단 표豹를 물범으로 해석한것.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로 표범이 당시 아시아에 특히 동북지방에 많이 생존했었다는 것은 사료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표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표범 가죽일 가능성은 배제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물범의 가죽보다는 표범의 가죽이 반점이 있는 가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표범도 가죽에 줄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반점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한 열심히 발해만에서만 나는 물범으로 고증을 했지만, 가장 간단하게 명대에 쓰여진 <朝鲜国治>을 보면 "鴨綠江爲大產, 金銀銅鐵水晶鹽細苧布細花布龍文簾席白硾紙狼尾筆紫花硯果下馬長尾雞貂豽海豹皮八稍魚昆布秔黍麻榛松人參茯苓薏苡,其餘不能殫載云." (표점 무시. 알아서 찍으시길--) 물범가죽을 이씨조선의 특산으로 소개해놓고 있다. 고대 전국시대야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이씨조선시대에는 분명히 한국의 영역이 발해만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범가죽이 특산품이 될 수 있을까? 분명히 한반도 내, 당시 이씨조선왕조 범위안에서 물범이 잡혔다는 말이 된다.


이로서 위의 주장은 대충 깨진듯 하다.

아....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런 쓸데 없는 글이나 적고 있으니...후..이제 즐거운?! 자치통감의 세계로 출발-_-! 이제 슬슬 前秦전진의 천하통일이구나! 전진! 전진하라!!! (...차라리 한국에서 이주일에 한단락 나가고 싶어.ㅠㅠ 무서븐 중국애들 속도로 읽어내려가야되다니.....가능할리가 없잖아!!! )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년 11월 29일 량주고성 북쪽 성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성벽의 절단면이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年11月29日,량주고성의 북쪽성벽 절단면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고대의 도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돌들이다. 대략 40-60미터의 폭이어서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도로가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동쪽 성벽에 위치한 발굴지

 

절강성 고고학연구소를 어제 18개월 동안 발굴활동을 해오던 량주유적의 발굴보고를 하였다. 해당 량주 유적은 290만 평방미터의 4000년전의 최대크기의 성이다.(290만 정도면 대략 여의도 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막지하게 큰 크기인 것이다.)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언원밍 교수는 량주 유적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동시대 고성중에서 가장 큽니다. 저는 이 성을 "중화제일성 中华第一城" 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원래 학계에서는 량주문화는 그다지 발달 되지 못한 문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당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하여 매우 발달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량주유적의 발견은 지난 세기의 하남 안양 은허 발견에 비견할 만한 중국 고고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견입니다.

 

해당 고성은 동서 1500-1700미터, 남북 1800-1900미터이며 남북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은 대략 4미터정도의 높이이며, 폭이 40-60미터 정도 됩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으리라 생각되고 이습니다. 성벽에서 나온 도기 파편으로 고증해 보면 해당 고성은 량주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약 4000년전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궁전터로 보이는 곳들과 제사용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구덩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항은 발굴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 해당 고성으로 인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량주고성이 하나의 국가였냐 아니냐는 점입니다. 어제 엄원밍교수는 량주고성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미 "국가" 시기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량주고성이 사실은 "량주고국"으로 이름 불려야 하며,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예전의 하상주에 량주를 추가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실 분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역사관련 전공자들이 아니면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듯 합니다만...해당 사항에 상상력을 붙이면 :

1)현재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같은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간단한 반례가 될 수 있습니다.

2)홍산과 대비되는 중원 문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 문화의 시초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학설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동시에...잘못 이용되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3) 오히려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이 성립될 "상상의" 기초가 될지도 모르는군요. 홍산을 북방계열의 문화로 보고, 량주를 남방계열의 문화로 설정하면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고요^^::

신묘님의 그 땅에 산다고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입니까?
http://sinaysi.tistory.com/4


---- 아래쪽은 제가 덧글로 단 사항입니다.
제 블로그에 트랙백을 걸으셨더군요. 와서 글 봤습니다. 죄송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그런 사실은 무엇이냐고 생각한다고 물으신다면 끝없는 진실의 탐구라고 하겠습니다. "라는 말만이 공감이 가는군요. 아마 역사학을 공부해보셨거나, 최소한 취미로라도 공부를 하셨던듯 싶군요. 하지만 위의 논리는 별로 끝없는 진실로의 탐구라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역사관은 흔히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지금 현재 님이 지적하신 중국과 일본의 소수의 학자들의 "만행"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다시 말해서 님의 말은 타자의 역사관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관만이 옳다고 외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세계에는 수 많은 역사관이 있습니다. 하나의 역사관만으로 과연 진실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님이 말씀하신 것을 간단하게 반박해 드리겠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누가 정했답니까? 그럼 고구려시기정도에 한반도로 건너온 섭씨나 제갈씨들은 한민족이 아닌가요? " 이것이 민족역사관의 문제점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19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것을 고대에 고대로 반영해서 설명하려 하면 쉽게 벌어지는 것이죠. 언어가 같다고 같은 민족인가요? 아니면 혈연관계인가요? 아니면 종교인가요? 아니면 민속인가요? 아직도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현대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로 "민족"의 개념을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민족역사관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님처럼 민족역사관"만"이 옳다고 하는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역사관을 기초로 생각하시는 것은 좋지만,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두가지 수정사항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금까지의 역사관은 전혀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혀 축소지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특히나 군정시절에는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예전 정신문화연구원을 통해서 수 많은 역사적 부풀리기가 자행되어왔습니다. 그리고 90년대부터 수 많은 학자들이 이제 그 그늘에서 벗어나서 예전에 고증없이 무조건 "민족정신의 고취"라는 것을 빌미로 자행된 푸풀리기를 수정하려 노력하니 축소지향으로 느껴지시는지 모르겠군요.

남은 한가지는 일면 "환빠"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건 간단합니다. 이 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들은 정확한 근거가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외의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거와 논증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주요 근거로 채택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역사학적으로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이미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고, 그 책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학자들이 사대주의이고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고 한다라는 말은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설득력이 있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예 중에서는 "경제"라는 단어와 "문화"라는 말의 사용이 있군요. 이 두 단어는 고대한어에 결코 등장하지 않습니다. 19세기에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라는 책에는 이 두 단어의 사용이 조금 많이 있군요. 이 외에 수 많은 반례들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0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환단고기를 근거로 거의 모든 말을 하는 일명 "환빠"들의 말도 당연히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근현대 한반도의 사상사나 민간설화차원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위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른 이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덧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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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난폭한 말을 하겠습니다.

1) 동북공정 문제 별거 없습니다. 역사관이 다른걸 어쩌란 말입니까?

2) 그리고 한국에서 동북공정 난리치는 교수님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지식인들로서 적당히 체통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고들 있지 않으십니까? 이건 논쟁할 건덕지가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3)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동북공정이 무슨 거대한 일인줄 아십니까? 박사를 지도할 자격도 없는 연구원들이 모여서 사바사바하는데가 그넘의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소입니다. 어차피 그들 의견이 중국 역사학계의 주.류.도 아닌데 멀 그리 크게 부풀리는 건지...후..

4) 한국의 민족원류적 역사관이나 중국의 다국가일민족설이나 모두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강점이 있죠.

5) 마지막으로 민족....이 정말 대단한 겁니까? 그럼 전 지.구.민.족.입니다.



제목에 대한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현재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루어냈다는 역사관입니다. 당연히 그 다양한 사람 중에서 인디언이 들어가며, 고로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미국이 건립되기 전, 콜롬버스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 전의 인디언의 역사까지 미국의 역사로 포함되는 것일수도 있고, 혹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식민지가 세워진 시기부터 일수도 있고, 혹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워진 때부터일수도 있고, 혹은 처음에 반미국적이던 인디언들이 결국 굴복하여 미국에 합류한 때일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각의 역사관마다 다.른.겁.니.다.
무엇 하나가 단정적으로 틀.린.게. 아.닙.니.다.






명색이 UCC라는 곳에 "愤怒!小日本是这样对待中国运动员的" (분노한다! 쪽발이 새끼들이 이렇게 중국 선수를 대접다니!) 라는 재목이 있다. 본인 그냥 또다시 반일 운동의 시작일까 생각해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시 보았다. 몇번이나 다시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반대 상황이었다. 일본 선수가 중국에 와서 경기를 하다가 중국 관중이 던진 무엇인가에 맞은 것이었다.

잠깐 중국어!
한국에서 일본인을 비하하여 쪽발이라고 부르듯이 중국에도 쪽발이의 용어가 있다!
小日本(XIAO RI BEN 샤오를뻔)이 바로 그것이다. 직역하면 조그마한 일본이라는 말인데, 문제는 일상적인 용어 수준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쪽발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잘 쓰지 않지 않은가?!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하다 못해서 명색이 대학교수도 앗차하면 내뱉는다. 그리고 스스로도 일본이라고 제대로 불러봤거나 들어본적이 없다고 농담을 한다. 이것이...중국이다.-_



....장난하냐-_-;;;
더 웃긴것은 이 동영상이 모 UCC의 메인에 당당히 있고, 아직도 제목이 수정되지 않았다. 이건 해당 UCC 운영자들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해당 유저에게 경고나 혹은 수정 조치를 내리지 않은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바보같은 민족 주의에 놀아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다. 아래쪽에 있는 덧글을 보면 我在这里向这位被砸的日本运动员以中国人的身份表示道歉-----对不起,我们国家也有垃圾! (저는 중국인으로서 일본 선수에게 사과 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쓰레기가 있습니다!)

음-_- 그런데 사과를 하는데 독이 들어가 있다. 그외에도 덧글로 남경학살부터 시작해서 온갖 반일의 글도 있고, 그것에 반박하는 중국인도 있다. 하지만 역시 대세는 반일인 것이다.


전에 한 "이성적인" 중국인에 의하면, 이러한 중국 젊은이들의 반일 정서는 어려서부터 죽도록 보아온 반일영화 혹은 반일전쟁을 묘사한 영화의 영향이며, 이는 중국 정부의 교육 문제라고 진단하였다. 개인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그것에 놀아나는 중국인을 보면서....환빠(환단고기 신봉자)들이 눈에 비친것은 왜 일까?

환단고기....미안하지만,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 제로이다. 그러나 환빠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성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무조건 적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 속에 장착되어있는 국수적이고, 민족이기주의적이고, 자민족주의적인 독소들을 뱉어낸다.....어차피 그들에게 이야기 해도 듣지 않기에....더이상 말하진 않으련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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