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기댈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천방지축이어서 쉬이 잡히지 않는다. 만약 마음만을 생각하여 말을 하자면, 인생은 폭포처럼 매 순간 순간이 빠르게 변할 것이고, 쉬임이 없을 것이다. 당장 눈 앞만을 본다면,  모든 것이 별안간 지나가고, 컨트롤 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어떤 사람도 지금 눈 앞에 최선을 다하게 되면 이러한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당신의 마음이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얾매여 있다. 만약 당신이 전자를 희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기억이다. 인생의 급류는 마치 희망과 기억의 팽팽한 대결과도 같다. 당신이 만약 모든 기억을 없애버린다면, 당신 모든 인생을 없애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결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인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둘 사이에서는 분명히 약간의 편중된 쪽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것은 기억이 희망보다 강하고, 어떤 것은 희망이 기억을 지배한다. 이 둘 사이에서 중용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이 둘 간의 편중됨으로 인하여 다양한 인생들의 차이들이 만들어진다.

우리 잠시 이렇게 말해보도록 하자. 인생이은 앞으로(미래의 희망이 많음) 가는 것과 뒤로(과거의 기억을 중시) 가는 것이 있다. 뒤로가는 형의 특징은 역사를 좋아한 다는 것이다. 역사는 전부 인생을 기록한 것이다. 앞으로 가는 형은 역사를 매우 조급해 하며, 급하게 앞으로 갈려고 한다. 급하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로 내달린다. 그들은 현실이 아닌 이상을 원한다. 역사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이상을 만든다. 그에 반하여 미래로 급히 가려는 사람들은 이상 속에서 현실을 만든다. 문학중에 소설이나 극본은 바로 이러한 요구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을 묘사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적인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생이 어찌 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계속 그러한 방향으로 내달린다면, 운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힘을 만나게 된다. 당신을 밖으로 내쫒고, 당신을 놀린다. 그는 그렇게나 큰 힘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나 냉정하고 슬프다. 당신이 만약 과거는 전부 지나간 일일 뿐이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미래는 얼마나 요원하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가. 미래라는 것은 당신이 결정할 수 없고, 당신에 속해 있지도 않다. 당신의 미래가 점차 다가올 수록, 당신의 이상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거나 점차 변질되어 갈 것이다. 당신이 만약 개인의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고, 계속 앞만을 바라보며 달려간다면, 대부분의 비극으로 이어질 뿐이다. 모든 소설과 극본의 최고 경지도 반드시 비극이다.

쉽게 물이 넘치는 장강 강변에서 뽕나무를 심는 것처럼 너무나 불안정하다. 그래서 앞으로 가는 인생은 소설과 극본에서 종교로 빠져들기 쉽다. 종교나 소설의 인생은 모두가 미래의 희망을 기둥으로 삼는다. 단지 종교는 미래의 희망을 더 길게 늘려서 하느님과 천국이라는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 세계의 일 자체가 아닌 것을 당신의 미래의 희망으로 삼는다면 당신은 더욱 현재에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교 역시 비극이다. 단지 최후의 무대가 무한대로 뒤로 가는 것이다. 종교의 인생 역시 연극과 소설의 인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희망을 품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돌격하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앞으로 가는 사람들의 열정의 표시이다.

역사의 인생은 이와 같지 않다. 그는 과거를 회상함으로, 미래을 억측하고는 한다. 과거는 과거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어떤 기억을 남기지 아니하였는가? 이런 흔적들을 당신이 가지고 있겠다는데 어느 누가 뺏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당신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진실한 소득이다. 영원히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고,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인생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당신의 희망으로는 가지 않고, 당신의 희망과 심지어 점점 더 멀어진다. 희망은 점차 사글어들지만, 기억은 점차 늘어나서 계속 풍부해진다. 인생에서 얻는 것이라고는 기억 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활이 인생에 주는 진정한 선물이다. 당신은 이를 소중히 생각해야된다!

중국의 국민성은 대체적으로 뒤로가는 형이다. 그래서 역사가 발전이 문학의 발전을 뛰어넘었다. 문학 중에 소설과 연극은 가장 발달하지 않은 두 항목이다. 중국의 관념에서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은 욕망(欲)이고, 과거를 그리워 하는 것은 정(情)이다. 부부지간에는 정이 욕망을 이긴다. 중국의 문학에서 남녀는 그리 미래를 향해서 열애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 대해서 깊은 정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관념에서 이것이  덕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온화하고 후덕함이 시의 목표라 함(温柔敦厚诗教也)이다. 또한  부모뿐만이 아니라 조상들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함으로 사람들의 덕이 돈독하게 된다(慎终追远,民德归厚矣)라고도 하였으며, 다시 한번을 죽고 한번을 살아야 정의 깊음을 알 수 있다.(一死一生乃见交情)라 하였다. 당신이 과거를 잊지만 않으면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과 같이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감정 역시 매우 뜨거울 수 있고, 낭만적일 수 있다. 단지 문학이 아니고 논리와 도덕이 된다는 점만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의 사랑은  미래의 행복을 중시한다. 중국인들의 사랑은 과거의 정(情)과 의리(义)를 중시한다. 서방인들은 죽은 사람을 하나님에게 보내지만, 중국인들은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한다. 중국인들은 개인이 운명과 싸우는 것을 자주 무시하고는 한다. 편안히 운명에 맞추어 살라(安命)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단지 과거의 것을 보고만 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이다. 그의 기억 속에 어떤 것이 새겨지기만 한다면 온 힘을 다해서 보호하여 결코 모호해지거나 변색되거나 소멸되지 않게 한다. 이것은 또 다른 강력하고 힘 있는 인생이다. 모든 힘을 당신의 마음의 깊은 곳에 쓰게 된다. 그가 미래에 대해서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희망은 과거를 꽉 움켜잡고 그의 미래 생활의 기초로 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다. 만약 당신이 그의 기억에 침입 한다면, 그는 당신을 생명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충성이여! 효도여! 모두가 이 도리(道理)이다. 처음 이를 보면 너무나 한 곳에 얾매여 있다고 ㅅ보인다. 사실 아무곳으로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얻지 않을 수 있다. 그가 앞으로 나가는 것은 매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한걸음을 간다면 그 한걸음만큼의 얻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는 미래를 과거에 쌓아가고, 자신을 타인으로 전환한다. 죽은자와 산자 그리고 나도 모두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개인의 미래의 행복에 대해서는 별로 특별한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

뒤로 가는 형의 문화가 발달해 감에 따라서 종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가는 형과는 다르다. 앞으로 가는 형은 희망을 중시하고,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뒤로 가는 형은 회상을 중시하고 보답을 중시한다. 중국의 종교나 문학 역시 이러하다. 중국인의 관념안에서 정은 언제나 욕망을 이긴다. 은혜를 보답하는 것은 언제나 행복을 기원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앞으로 가는 형에서는 현실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앞에 있고, 그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 쉽게 자괴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악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뒤로 가는 형은 현재의 현실에 대해서 만족한다. 마치 하느님이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준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은혜에 보답하기만 하고, 단지 나 지신이 여기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마치 더 이상 하느님에게 기원할 게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의 자아의 지위를 높아지게 되었고, 성선론이 생겨났다. 우리는 전자의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후자의 하느님은 내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마음 속의 앞으로 가는 것과 뒤로 가는 것은 각 자가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인다. 결국은 각자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원망을 하던지, 부러워 하던지, 모두가 인성(人性)의 장엄인가?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을 장중하고 엄숙하지 않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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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으로 가는 것을 상당히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쳔무의 사상을 옅볼 수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단 당시의 시대 배경을 알아야된다. 당시에 많은 중국의 지식층은 서방의 것이 모두 옳다고 하면서 무조건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 중에 쳔무는 중국의 문화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중국자체를 중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위의 글 같이 조금은 극단적인 글이 나왔던듯 싶다.

아마 쳔무 본인도 알 것이다. 과거로 가는 형은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그는 이를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말았지만, 그 걸음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발걸음이다. 또한 쳔무는 어디까지나 상당히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서 이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인류의 마음 속의 미래과 기억은 항상 똑같지 않고, 언제나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특히 젊을 때에는 미래로, 늙어서는 기억으로 향하는 경향을 말이다. 인생의 시간에 따라서 희망과 기억의 비율은 계속 달라지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의 수필에서 그의 한계 또한 명심해야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양의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좀 명심해야될듯 하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우주는 크다. 이는 몇 권의 근대 천문학 책을 대충 봐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밤에 하늘을 올려다 본다면 몇 천, 몇 만의 별자리와 온 하늘을 채우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광활하다. 별들은 우주에서 대해에 떠 있는 몇 개의 범선이나 몇 마리의 비둘기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주간에서 공허가 실제보다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여러 별들이 그 빛을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만, 우리는 우주간의 어두움이 밝음보다 앞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 속에는 태양이 있고, 태양 계에는 지구가 있고, 지구 위에는 만물중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 중에는 인류가 있다.  모든 우주속에서 인류의 너무나 작기만 하다. 예를 들어서 어두운 밤의 끝이 없는 광야에 조그마한 불빛이 있다. 그 불빛은 그의 주변 몇 미터만을 비출 뿐이고, 조금만 멀어지면 칠흑만이 있다.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인류의 모든 역사의 이 조그만 불꽃은 비유하자면 반딧불이다. 비록 반딧불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지만, 그의 불빛은 그의 좁은 뒤편을 비추고 있다. 인류의 시직은 단지 이미 있었던 것을 알 뿐이다. 몇몇 이미 있었던 일의 지식과 기억들로 앞으로 달려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래로 달려간다.

당신이 만약 너무 자연계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마치 마치 어두움 밤에 광야를 가는 사람처럼, 계속 끝 없는 암흑을 바라보는 것이고, 곧 공포와 불안이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생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인다. 한 사람의 생명도 자연이고,  공허가 실제을 이기고, 암흑이 광명을 이기는 것처럼 광활한 암흑 속에 있게 된다. 인류의 지혜는 굳이 공허에서 실제을 구하려 하고, 암흑 속에서 광명을 구한다. 이는 인류군체가 쌓아온 역사문화 속에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군체의 역사를 통해서 쌓인 문화유산을 우리는 인문(人文)이라 하며, 자연(自然)과 대립시킨다. 이것인 실제이고 광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반딧불의 조그마한 불빛에 불과하다.

인류의 원래 생활중에서 쌓여진 어떤 역사문화유산은 어떻게 거대한 대자연인 우주와 맞서고 병립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럴수 밖에 없고, 이것이 소위 “인본주의”라고 불리는 생각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견해는 자연계는 하늘(天)이고, 인문계는 사람(人)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한 편으로는 인문으로 자연에 맞섰다. 인문을 높게 쳐서 자연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임(天人合一 천일합일)을 말하면서 서로 통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자연이 인문을 없애지 못하게 하고, 인문을 이용하여 자연을 이기게 할 생각이 없었다.

도가에도 하늘과 땅이 서로 이기지 못한다(天人不相勝)는 이론이 있다.(장자(莊子)를 참고) 그러나 도가는 역사문화의 군체가 이룬 일을 너무 무시했다. 하나 하나의 개인을 이야기 하면서 하늘은 많고, 인간은 적다. 한쪽은 높고 크고, 다른 쪽은 낮고 작은데 어떻게 하늘과 인간이 서로 이기지 못함인가! 그래서 순자는 장자가 하늘이 있음만을 알고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인류의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이것 역시 인류의 역사문화군체가 이룬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만약 한사람 한사람씩 분석을 한다면, 인류에게는 분명히 다양한 단점과 죄악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나 하나의 사람은 단지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인류 전체의 역사문화 전체로 생각해 본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선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심성이 악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서방의 기독교 역시 이처럼 하나 하나의 개인만을 중시하여, 역사문화가 쌓아온 것들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악하다고 하고, 또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여 인생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린다. 불교 역시 같은 경향성을 보인다. 역사문화가 쌓아온 것을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해서 비관적일 수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반만을 말할 뿐이고, 인류전체의 역사문화의 무한한 쌓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세 서방 사상은 중세 기독교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다시 고대의 그리스 관념을 회박하였다. 그리하여 인생을 긍정하게 되었지만, 너무나 개인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문학은 자연학을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고,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중세의 종교로 돌아가서 지금의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사람의 일을 말해보자면, 앞으로의 나아갈 길은 개인주의를 희석시키고, 역사문화의 업적으로 눈을 돌려서 다시 한번 중국전통의 “하늘과 사람은 하나다”라는 오래된 전통을 이야기 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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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그리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인간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심론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내 놓은 천일합일. 자연과의 화합. 지금은 모두가 중시하는 것이 되었지만,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이야기 하지만...그는 약 50년전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단지 앞으로 50년 뒤에도 인류가 나아갈 길도 자연과의 화합일까?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것이 현재까지는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뿐이고, 대자연은 인류에게 결코 패하지 않는다. 역사문화가 앞으로도 한참이 쌓이면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쳔무의 생각처럼 반딧불일 뿐이다. 솔직히 반딧불도 상당히 과장된 표현이다.


인류가 자주 쓰는 말들 중에서는 그 뜻을 쉽게 말하기 곤란할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정신(精神)이 그러하다.

정신은 물질(物質)과 대립된다. 먼저 물질의 뜻을 거칠게 표현해보자. 물질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피부와 손발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정신은 물질과 반대개념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피부와 손발로 만질 수 없는, 오직 사람의 마음에 의한 감응과 경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단지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는 감응 당하는 것도 비물질이고, 감응하는 것도 비물질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마음이란 사실 생각하는 것일 뿐이고, 사유하는 것은 사유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물질적인 요소도 없다. 그리하여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아래쪽에서 다시 자세하게 말하도록 하겠다.

생명과 물질은 반대된다. 물질은 지각이 없는 것이고, 생명은 지각이 있는 것이다. 사실 풀과 나무들도 지각이 있다. 단지 그들의 지각은 마취된 상태에 있을 뿐이다. 동물의 지각은 풀과 나무보다 선명하다. 마비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 하지만 동물도 지각이 있을 뿐, 마음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인류만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각은 외부에서 온 인상들로 생겨난다. 그에 반하여 마음은 자신 스스로 생각하여 성장한다. 그래서 동물은 지각 속에는 물질계만 있을 뿐이고, 정신계는 없다. 정신은 인류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과 정신이라는 두 단어를 자주 혼용해서 쓰는 것이고,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인류의 마음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인류 역시 최초에는 지각만이 있고, 마음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인류는 동물과 같았다. 단지 외부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계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외부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사라지면, 그러한 물질에 대한 지각도 사라지게 된다. 반드시 다른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그의 귀와 눈과 몸에 내놓아야지 다시금 새로운 지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대체적으로 피동적이고,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지각들이 인상이 되고 사라지지 않을 수 있어야 지각이 기억으로 전환 된다. 기억은 단지 그가 이전에 했던 지각을 지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외부에서 온 구체적인 물질로 인해서 생겨난 지각이 아니라, 이전의 지각을 다시 지각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의 기능은 인류 속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기억이 발달함에 따라서 마음이 생겨났다. 묵경(墨經)에서는 "앎은 이어가는 것이다.(知,接也)"라고 하였다. 인간의 지각은 외부 물질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지각은 인상이 되었고, 쌓여나갔다. 그리하여 마음의 지각은 점점 물질계와 떨어져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계와의 접속 없이 스스로 지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은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있고, 지각은 남겨두었던 인상을 지각할 수 있었고, 이것이 곧 기억이다. 우리는 감히 인간정신현상의 시작이 바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또 어떻게 외부물질계의 지각이 만들어낸 인상을 남겨두어서 추억과 기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중요한 도구 하나가 있다. 바로 언어와 문자이다. 언어의 기능은 외부에서 온 인상을 더욱 정확하게 식별하여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다양하게 만든다. 몇몇 고등동물들은 추억과 기념이 있다. 단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고,  뚜렷하지 않아서 단순하고, 확대하지 못하고, 다양하지 못하다. 왜 그러한가? 바로 그들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외부 접촉을 통해 얻은 인상을 분별하여 분리하고 구조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에게 수 많은 일들과 물건들이 있는데, 만약 따로 기록할 수 없다면, 끝내는 모호해지고 잊어버리게 된다. 인류는 언어를 만듬으로서 외부에서 온 모든 인상들을 분류하고 구조화하여 하나 하나를 정한 소리로 불러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물질의 이미지를 점차 지각 내부에 쌓아놓고 이미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은 점차 정신계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지가 소리를 통해서 객관화된다고 할 수 있다. 문자는 언어의 부호화이다. 여러가지 부호로 이루어진 문자가 있음으로 하여 마음은 더더욱 멀리 나가게 된다. 인류는 소리(언어)을 통해서 인상을 배치하고, 다시 부호(문자)을 이용하여 소리를 대신하였다. 언어는 마음을 외부에서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문자는 마음을 외부에 기억하게 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마음의 식별과 기억의 기능이 객관화되었다. 그래서 언어문자는 마음의 기능을 밖으로 폭로하고, 의지하게 하여 마음의 기능을 객관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각(마음의 기능의 초보단계)가 천천히 언어(문자 포함)를 만들게 되었고, 언어(문자 포함)로 인하여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마음이 곧 정신이며, 마음의 기능 역시 곧 정신이다.

인류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기억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 자체는 동물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고급기억과는 다르다. 당신이 기억을 할 때에, 그것은 분명 당신 마음의 “소리 없는 말”이다. 기억이 있음으로해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기억은 사상(思想)의 재료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당신은 어떤 재료를 이용해서 사상을 만들 것인가? 인류의 사상 역시 일종의 마음속의 “소리 없는 말이다” . 만약 언어가 없다면, 사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상은 단지 “소리 없는 말”일 뿐이다. 다른 동물들은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마음 속에서 사상을 만들고, 사상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표현한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그 시작을 생각한다면, 인류는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이 있음으로 해서 마음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 생리학에서의 마음은 단지 혈액의 움직임일 뿐이다. 생리학에서의 뇌는 지각과 기억의 중축이다. 이것은 모두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생리학에서의 뇌는 진화하여 정신계의 마음을 만들었고, 이것의 최대 공로는 언어문자에 있다.

언어와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류는 지각은 서로 소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창고가 되었다. 인류의 협소한 마음이 거대하고 영원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미 육체를 초월하여 외부에 존재한다. 가령 당신이 마음의 기능을 하늘에 있는 전기라고 한다면, 언어와 문자는 곧 전선과 축전기이다. 마음대로 돌아가니는 전기는 축전기와 전선이 있음으로 하여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나의 마음이 이처럼 거대하고 영원하며, 육체를 초월하고, 모든 인문이 발달해가는 것은 모두가 이 마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계를 보아야 한다.

이 정신계의 마음은 개인을 초월하였고, 또한 비물질적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인류에게 언어와 문자가 생김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 외부의 다른 사람의 기억과 사상을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 처럼, 기억과 사상이 원래 언어와 문자에 기생하는 것이고, 언어와 문자가 발달함으로서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면, 언어와 문자는 인류 공통의 것이다. 결코 내것 니것이라며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기억과 사상 역시 본질상 인류 공통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니 것 내 것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류의 뇌와 손은 생리방면의 것으로 물질에 속해있다. 그래서 너와 나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생리적인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본질상 예전부터 모두의 것이었고, 너와 나를 강제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은 여러가지 기억과 사상이 쌓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러 기억과 사상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함에 따라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와 문자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한데, 어찌하여 마음이 나 혼자만의 것일 수 있겠는가? 단지 당신이 당신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문자를 안다면, 당신은 당신 사회의 다양한 기억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두껍고 다양한 지식들은 역사가와 철학자들에 의해서 세심하게 다듬어 지는데 이는 일단 언급하지 않겠다. 글을 모르는 사람 역시 그가 말할 수만 있다면, 수 많은 그가 속한 사회의 다양한 기억들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들은 자연적으로 그의 뇌 속에 가득차며, 그의 마음을 만든다. 만약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귀먹어리라서 결코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래서 그가 언어를 배울 수 없다면, 혹은 태어나자마자 장님이어서 인류가 발명한 다양한 문자와 부호들을 배울거나 사용할 수 없다고 하자. 이런 사람들은 단지 뇌만이 있을 뿐이다.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단지 지각이 있을 뿐이지, 기억과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설사 기억과 사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고급동물과 같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는 단지 외부 물질계를 지각할 수 있을 뿐이며, 외부의 정신계와는 접촉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계와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여 그는 단지 뇌만 있고, 마음은 없는 사람이다. 단지 동물처럼 정신생활을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우리의 정신은 결코 자연계에서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사회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정신에서는 나의 객관적인 존재는 너무나 미약하다. 다른 말로 하여, 정신은 선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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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와우~ 죽어라 길더군요. 아마 그의 문장 중에서 제일 긴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충 40분 걸렸군요. 퇴고...일단 할 생각 없습니다. 모래 올릴 것을 미리 번역한 것인데, 과연 모래 올리기 전에 이 글을 퇴고할까요? 아님 그냥 올리려나요? 기대해 주셔요. (나름 퇴고했다 -_-;;)

인간의 모든 사상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의 사상은 어떻게 해야되는가? 역시 우리 모두의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본인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을 쓰게 된 것은 올해 봄부터 시작된 한 친구의 종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약 4개월 간 만지작 거려 30편의 문장을 책으로 엮었다. 사실 본인의 생활을 그렇게 한가롭지만은 않다. 그래도 언제나 태호(太湖)에서 유유히 자연과 하나됨이니, 어느 정도의 한가로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사상들은 이러한 한가로움 중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던 것이다. 사실 본인의 생각은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 이는 지금 현재의 실제 인생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도움을 줄 생각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본인에게 현재의 실제 인생 속의 다양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 있다고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방관자처럼 한 구석에 서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한가로운 사유들을 펼칠 뿐이다. 본인은 이 20편의 문장으로 본인의 잡상이 모두 쓰여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이 잡상을 3~4개월간의 한가로운 생활에서 만들어 한가롭게 기록한 것 뿐이다. 본인이 볼 때,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3~4일 혹은 3~4시간내로 서둘러서 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본인이 원고들을 오래 동안 발표하지 않고, 오래 동안 쌓아올려서 발표한다면, 독자들이 너무나 급하게 나의 <한가로운 생각>을 읽을까 두렵다.

속독은 "한가로운 생각"의 맛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먼저 30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급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앞으로 또 다시 한가로운 시간들이 주어진다면, 얇은 한 권 또 한권을 출판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한가로이 독서할 수 있게 하고 싶다.

본인은 이 <한가로운 생각>을 통하여 고대의 선진제가들(유가,묵가, 도가, 법가)처럼 일가를 이루어서 세상에 뜻을 펼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송명의 이학자선생님들(정호, 정이, 주희, 육유, 왕양명)처럼 절학을 계승하거나 하나의 학파(道统)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본인은 결코 서방 유럽의 철학자들처럼 계통적이며 조직적일 뿐 만이 아니라 엄격하고 정밀하게 논리적인 진행을 통해서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계시받기 위함이 아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한가로운 생각을 한 것일 뿐이다. 본인은 첫 문장을 쓰고 있을 때, 결코 그 다음 문장을 생각하지 않았고, 두번째 문장을 쓰고 있을 때에는 처음 문장을 생각하거나 보충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한가로운 시간에 내키는대로 생각하고 쓴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리라는 것도 없으며, 단지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한가한 생각>을 쓰기 전에 본인을 종용한 친구는 이미 일정한 제한을 걸어왔다. 장편의 연속적인 글보다는 한 문장이 2~3천자를 넘지 않기를 원했다. 그리고 본인은 계속 그렇게 써내려갔다. 본인이 느끼기에 일정한 글자 수의 제한이 있는 것이 오히려 번잡하게 만들지 아니하였다. 마음 속에 무엇을 써야겠다고 미리 생각을 해버리면, 처음 펜을 잡을 때의 한가로움이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2~3000자는 불현듯 흐르듯이 써버린다. 또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동상처럼 반드시 어떠한 이론을 만들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떤 때에는 위에서 길게 말하고, 아래쪽에서는 조금만 말한다. 또 어떤 때에는 위에서 조금 말하더니 아래쪽에서 길게 써버린다.

그리고 본인이 글을 적을 때에는 미리 어떤 제목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복잡하고 심도있는 것도 3~4000자안에 있고, 간단하고 평범한 것도 3~4000자 안에 있다. 글을 다 쓰고 난 뒤, 문장 속 한두자를 뽑아 제목으로 걸어놓는 것이다. 어떤 내용은 앞의 글에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을 다음 글에서 보충하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중복하기도 한다. 어떤 글은 다른 글의 예시일 뿐일때도 있고, 어떤 것은 두 글 간에 모순이 있고,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것은 더 많은 말을 해야되나 귀찮아 그대로 펜을 멈추어 버린 것도 있다.

이 문장들의 순서는 모두 쓰여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고, 다시 재배치 하지 않았다. 중간의 한두편은 예전에 쓴 글도 있는데, 고문체여서 간략하게 고쳐 썼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것은 본인 한 사람에 의하여 4개월동안 쓰여진 것이니 만큼 분명히 어떠한 체계가 있다. 이 체계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단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한가로이 만들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럼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될 것이다.

본인을 종용하여 이 책을 쓰게 한 사람은 씨에요우위이(谢幼伟)이다. 그는 션 신문(申报)의 부간(副刊)인 쉬에진(学津)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는데, 본인이 원고를 시작하자 폐간되고 말았다. 본인이 흥미을 이끌어 내어서 결국 이 조그마한 책을 있게 한, 씨에선생의 종용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올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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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머...어떻게 보면 이 한가로운 생각중에서 가장 한가롭지 않고, 가장 어려운 문장들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 큭....사실 지금에야 말하지만 中国思想通俗讲话가 번역하기에는 더 쉽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연집이고, 또한 본인의 전공은 아니지만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 내용인지라....그런데 여친님의 최종 결정에서 이 글로 선택되었다. 흑...앞날이 끔찍해라.

번역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시리오. 문학작품의 번역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흑..ㅠㅠ

이 책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쳔무(钱穆)의 수필집이다. (쳔무에 대해 더 궁금하시면 쳔무(钱穆)는 누구인가?) 그는 역사학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철학자였고, 문학자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시대의 풍랑 속에서 학자다움을 잃지 않은 위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매우 얇다. 전체 글자수가 9만여자에 불과하다. 한국어로 번역을 하여도 잘해봐야 30만자가 되지 않을 아주 얇은 책이다. 하지만 그 글자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내용은 그렇게 얇지 않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도 같이 물결조차 없는 호수에서 한자에 10번 생각하고, 한 문장에 100번을 생각하면서 한가로이 날아오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과거 동양의 조상들은 관직에서는 유교의 딱딱하고 절제된 예법에 충실하였지만, 그가 퇴근한 뒤 혹은 퇴직한 뒤에는 도가에 빠져서 삶을 향유하였다. 자연과 노닐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움과 한가로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알지 아니한가?

이 책은 쳔무(钱穆)가 1948년 봄에 그의 고향인 쟝수(江苏) 우시(无锡)의 지앙난대학(江南大学 - 강남대학) 의 교수로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작성한 글이다. 본 책은 1960년 5월 홍콩련셩출판사(香港人生出版社 홍콩인생출판사)을 통해서 최초로 출판된다. 그리고 1980년 그의 나이 86세에 실질적으로 점차 눈이 멀어가는 상태에서 산민(三民书局 삼민서국)을 통해서 다시 한번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본 번역에서 이용한 책은 싼리엔 출판사(三联书店)의 2005번 제 2판이다. (ISBN 번호 : 7-108-02242-7)

본 글의 번역은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대로 최대한의 의역을 구사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읽을 정도의 수준을 추구할 것이며, 원문에서 한국어적 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중국어만의 표현일 경우, 원뜻을 최대한 해치지 않게 생략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야될까? 이 책을 완벽한 직역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이 책의 핵심 자체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핵심이 머냐고? "한가로움~" (너 원래 의역파였잖아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군요. 하하^^)

본 글에 대한 어떠한 번역과 맞춤법 상의 조언과 비판을 환영한다. 단, 근거도 없이 단지 자신과의 번역 원칙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쏟아부어지는 비난이나 악플에는 방긋 썩소와 함께 그 분의 영혼을 위하여 옆차기를 날려겠다.

본 글의 번역은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건만을 보도하는 미디어성 기사의 인기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한 중국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건이나 내용은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그 동안 오랜 세월 번역일을 하지 않았던 본인이 앞으로 소개할 전공책을 번역하기 전의 몸풀기 과정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정도 분량은 왠만하면 30분내로 끝이다. 잘난 척이 아니라 본인의 중한 번역속도은 좀 빠르다.-_-;;) 앞으로도 이런 대중성인 내용은 계속적으로 조금씩이나마 번역하면서, 한국의 학계에 도움이 될만한 중국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갈 예정이다.


중국어 원문 인터넷 주소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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