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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