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은 재위하는 동안 동서남북을 대상으로 전방위 정복활동을 하였고, 외교전을 펼쳐 고구려가 東亞地中海의 中核國家로 만드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생애와 업적 등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고,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왕의 활동과 정책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거나 군사전에 능숙한 정복군주로, 혹은 명분의 실현 등으로 평가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또한 백제 및 주변국가들과 맺은 정치 외교행위는 물론이고, 군사적인 행동도 국제적인 질서의 재편과정이라는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군사작전과 행동을 한반도 내부에서 통상적으로 활용되던 보병적 관점의 전략 전술이 아니라, 기동성이 강한 기마군단을 활용하였고, 심지어는 수군작전도 병행한 총체적인 전략과 전술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수군을 보유하고 대외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병신년 조항은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에서 '水' 자리의 글자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이 있음에도 대체적으로 수군으로 석문하고 있다. 따라서 대왕이 재위 년간에 시행한 수군작전의 분석을 통해서 고구려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구려가 국제질서의 전개과정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주도적인 역할과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해양활동을 어떻게 추진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북진정책과 동시에 추진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면서 왜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만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방전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고대국가들이 해양방어체제를 얼마나 중요시했고, 어떤 식으로 구축했는가를 확인하며 아울러 海洋力이 역사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도 인식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시대 고구려의 해양활동에 대하여 실체, 의미, 수군작전의 실상 및 해양방어체제에 대하여 글을 발표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압축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丙申年의 수군작전을 중심으로 전략의 구체적인 실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고 한다. 이를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일반을 전쟁의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의 수군작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미성 전투의 실상과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 전투의 전개과정과 수군의 진격로 및 그와 관련이 있는 해양방어체제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2 장.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고구려는 초기에 만주 내부를 흐르는 鴨綠江·松花江·渾江 등 큰 강을 활용하는 江上水軍과 수상활동은 있었다.태조대왕 시대에는 황해로 나가는 出海口를 확보하려고 西安平을 공격하였다. 또한 초기부터 동해가에 있는 東濊·沃沮 등과 교섭하고 통제하에 두었던 사실은 해양활동 능력을 흡수했음을 의미한다. 3세기 전반인 동천왕때 강남에 있었던 손권의 吳나라와 황해를 종단하여 외교는 물론 軍馬와 貂皮를 수출하는 등 교역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점령하여 黃海로의 出路를 확보하였다.4 세기에 들어서서 美川王은 요동과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시전략을 취했다. 3년(302)9월에 3 만 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에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방을 멸망시켰다.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을 흡수했으며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 유역의 일부를 영향권 아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명실공히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뿐 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사이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기본구도 상으로는 朝漢戰爭과 유사하며, 영토 팽창전 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특이한 성장과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전기에 추진한 해양활동은 주로 국가전략 및 국제관계의 추이 속에서 상황의 전개를 고려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황해로의 出海口를 확보한 다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 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백제는 해양활동이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국가의 발전과는 어떠한 함수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또 고구려와 백제 양국은 왜 경기만에서 충돌을 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사실들을 해양질서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는 지정학적 조건과 三韓의 경험 등 先占한 집단의 전통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해양활동의 능력을 가졌다. 沸流와 溫祖는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연안 및 근해항로를 통해서 경기만으로 상륙한 다음, 현재의 인천 또는 서울 지역에 정착하였다. 특히 비류가 정착한 지역은 인천인 彌鄒忽로 추정하고 있고, 때문에 비류집단은 초기부터 해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백제는 마한을 병합하면서,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던 소국들이 지닌 해양활동능력과 범위도 흡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古爾王 3년(236) 기사에서 西海大島 사냥은 해양활동에 대한 왕의 관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성황 속에서 4세기에 들어와 백제와 고구려의 팽팽한 대결로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낙랑과 대방의 잔재세력들은 해양능력을 가지고,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에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외교·경제적인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출을 시도했다.한편 백제는 북쪽으로는 樂浪·帶方 등과 대결하면서 성장하였으며, 304년에는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한강유역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중부 해안이 가진 경제·외교적인 잇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近肖古王이 등장하면서 화북지역과의 외교관계는 물론 교역망을 확충하려는 경제적 필요가 강했을 것이다. 대방지역을 확보하면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까지 연결시키는 황해연안 교역권의 일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東晉은 建康(현 南京)에 수도가 있었으므로 대방과 樂浪이 사용하던 항로를 탈취하고, 황해중부항로를 사용하기 위한 해양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다. 여기서 평양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원주의 法川里 등 한강유역과 그 水系에서 발견된 東晉系 陶磁器의 존재는 한강유역의 백제세력이 동진과 교섭하고, 교역을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황해도의 황주지역에서는 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對高句麗戰을 과감히 수행하는 일이 근초고왕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고국원왕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황해중부에서 '해양영역의 확보와 탈취'라는 공동의 목표로 인하여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경기만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로서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고대의 항해는 연안항해와 근해항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경기만은 이른바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遼東半島를 경유하여 山東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으로서 한중교통의 요지로써 후대에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경기만은 한반도 내부에서도 地政學的·地經學的·地文化的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각 국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경기만은 平壤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는 禮成江·臨津江·漢江이 河系網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 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다. 특히 강화도 북부는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으로서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하계망과 內陸水路를 통해서 내륙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물류체계를 원활하게 하여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잇점이 탁월한 경기만을 가운데 두고 양국간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故國原王은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13년에는 燕나라 慕容 의 침입을 받았을 때 東皇城에 머무른다. 369년에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雉壤전투에서 패배하였다.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쳐들어온 근초고왕의 백제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고구려와 백제는 경기만 북부지역과 해역을 놓고 대결을 시작되었고, 각 나라들은 존속기간 내내 생존을 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상륙작전 등 해양을 통한 침투를 시도하고, 해안선 근처에서 적극적인 공방전을 펼쳤다. 이렇게 경기만과 그 하계망들을 사이에 두고 격돌한 사실들은 지정학적인 조건과 전략상으로 보아 경기만 북부의 해상권 쟁탈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 수군의 침입방어와 국토의 보존이라는 원론적인 목적 이외에 수도방어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또한 외교통로 및 교역로를 보호한다는 다종의 의미를 가졌다.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양국의 충돌은 주로 浿河(예성강)일대에서 벌어졌다. 백제는 漢水 以北으로 진출하고 한강유역을 개발할 목적으로 서해안의 관방시설을 확충했다.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력권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 윗쪽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봄에 백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가 황해중부의 해상권 확보와 해양활동을 놓고 격동적으로 갈등을 벌일 때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고, 그로 인하여 경기만은 역사적으로 질적인 변신을 했다.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재위기간에 정치 군사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남과 북으로 군사적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인 대처를 통해서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아 국가 간에 형성되었던 역학관계는 4 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이때 廣開土大王은 군사적인 우위성을 활용하여 강공책을 구사하면서 동서남북의 전방위 정복활동을 감행했다. 군사전을 중시하는 대외정책은 재위년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대왕은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화전양면정책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남방에서, 광개토대왕은 2년(392) 7월에 4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 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예성강 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광개토대왕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한편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대왕은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면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장기 지속성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에도 광개토대왕의 즉위하기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장 관미성 전투 검토
광개토대왕은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령하고, 關彌城을 공함하면서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大王 17년(407)의 정벌 때까지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결국 광개토대왕은 수도인 한성의 攻滅과 더불어 西海沿岸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있음은 첫째,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과 국제적이면서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과 전술에서도 수군작전 등 해양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루어진 해양활동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辛卯年 조항, 丙申年 조항, 甲辰年 조항,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원년조의 關彌城 공함 조항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고구려가 주체가 되었으며, 직접 수군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군사작전은 병신년간의 상황이다.
그런데 병신년 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예비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관미성 전투이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수군작전의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먼저 관미성 전투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황해 중부해상과 對中國交通路를 고구려와 공유하면서 대치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백제의 수군활동은 常時體制로 운영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렇다면 사료의 기록과 전쟁 과정을 고려할 때 관미성 같은 성은 해양활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동시에 수도를 방비하고, 외교와 교역을 보호하는 전략적 가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고구려의 해양위협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기능을 위해 서해중부의 선대 등 수군력이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한다면 백제의 북변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1차 공격목표가 되었고, 백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탈환하고자 했던 關彌城은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는 백제의 해양활동을 분쇄하고 경기만 등 漢水 以北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관미성의 함락과 필사적인 守城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전투 이후인 병신년에 백제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가능했고, 그것이 해안지대에 국한되어 있었음은 관미성의 전략적 기능을 잘 알려주고 있다.
관미성은 백제가 대외교섭을 추진하는 發進基地와 적군의 水路侵入을 방어하는 1차 關門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한강수계와 직접 연관되고 고구려의 해양접근을 광범위하게 차단하기에 적합한 요충지에 있어야 한다. 더우기 관미성이 백제수군활동의 본거지였고 수군이 전투에 참여했을 경우에는 양 국 간에 海戰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가 수군활동을 했고 전쟁에서 수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광개토대왕릉비 14년 甲辰조에 나타난 왜의 대방계 침입 기사에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왜군은 백제군을 주력으로 하면서 수군을 활용하여 공격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관미성을 공격했던 병력은 육군 외에 수군이 병력의 이동이란 보조차원을 넘어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미성은 가능한 한 水系가 끝나거나 육지와 근접한 島嶼에 위치해야 타당하다.
관미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강수계와 이어진다는 조건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지역에 관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기존의 주장들에 이의를 제기하며 주목을 받은 견해는 김윤우 尹日寧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타당성을 인정받는 烏(鰲)頭山城說이다. 윤일녕은 관미성의 위치를 고구려 수군이 기동한 禮成江- 西海(喬桐島 延安 및 江華一帶를 포함)-祖江- 臨江 漢江交會地點-漢江-麻浦 등을 잇는 수로상에 있다고 하면서 烏頭山城의 주위지역을 치밀하게 답사하여 그 곳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합당한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두산성은 임진강 하구를 이용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적합한 지형이다. 반면에 예성강 하구를 통해서 내려오거나, 수군을 이용하여 경기만 이북지역에서 내려와 남진할 경우에는 전방의 防禦線으로서의 주요기능은 상실한다. 이미 적은 강화수로를 이용하여 진입하는 도중에 상륙하여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강화도에서 안정적으로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에 여러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전면적으로 한성을 공격할 수도 있다. 또한 예성강 이남과 임진강 사이의 내륙지역과 해안지방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방어망을 구축하기에 힘이 든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가 일어날 무렵에 국경선은 임진강이 아닌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없다.
한편 李丙燾는 喬桐島의 자연지리를 약술하고, 그곳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양국의 수군활동을 전제로 하는 설로서 타당성이 있으나, 관미성이 백제의 북변 방어진지로 구축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기만 전체를 군사적으로 총괄하고, 수군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사령부를 설치할 조건으로서는 불리하다. 예성강 하구 남쪽지역에서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로 들어오는 船團,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의 수로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江華水路와 한강하류를 따라서 海岸防禦施設이 미비할 경우에는 오히려 배후에서 공격받을 전략적 취약성이 높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개풍군의 백마산 부근으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 江華島를 관미성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이 說은 강화도라는 지역을 선정한데서 1차적으로 타당성을 가진다. 강화도는 이러한 해양지리적인 잇점 때문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나 대방으로 出入하는 해양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검문소의 구실을 할 만한 지역이다. 백제의 10성과 관미성은 광개토대왕 원년에 고구려에게 넘어갔으며, 다음 해에 시도된 백제의 '관미성 탈환작전'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내륙에선 백제의 공격이 浿河線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광개토대왕의 초년공격이 海岸線一帶와 海岸地帶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大王 6년에 이르러 비로소 고구려의 수군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성을 취하고 수도를 공략한다. 그 때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등이 공함된 것은 그 이전까지, 즉 원년과 2년 전투에선 고구려의 공격대상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관미성은 丙申條에 공취된 성 이외의 성이고, 해안지역이면서 방어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강화도의 해안북부가 가장 적합하다.
필자는 강화도 북부의 봉천대가 있는 河陰山城을 주목한다. 이 지역은 강화도의 최북단이면서 제일 서쪽에 있고, 실질적으로 강화도와 황해도가 만나는 해역으로서 한강입구에 해당되고, 동시에 바다로 나가는 海口이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예성강과 경기도의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른바 해륙교통의 결절점이다. 이러한 조건때문에 4세기 후반 내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지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전술적인 유리함 때문에 이 지역과 교동도만 장악하면 경기도 황해도, 즉 경기만의 북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만의 북부지역을 감싸고 있는 황해도의 개풍군 연백군 해주군 등 등 까지도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예성강과 개성 등을 잇는 선에서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해양진출이 필요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지점에는 진출거점이며 해양방어의 요새로서 전력이 강한 산성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러면 관미성 전투에 고구려의 수군이 참여했을 경우에 수군의 발진기지는 어디였을까?
일단 현 평양성 이남지역은 제외된다. 平壤지역은 南浦灣 등의 良港이 있고, 大同江 水系로 인해 보급로 등 내륙과 연결하는 일이 원활하다. 지리적 조건을 보면, 장수산성 지역에서 나아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주만과 연결된다. 해주만은 경기만의 일부로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황해중부의 큰 강이 모여드는 곳이며, 어떤 지역으로도 접근과 상륙이 가능하다. 분만 아니라 강령만 옹진반도의 옹진만, 장연군과 옹진군 사이의 대동만 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로 연결된다. 더욱이 재령천을 거쳐서는 남포만과 연결되어 대동강과 만나고, 그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 평양까지도 쉽게 물길로 연결된다. 또한 이 지역의 만은 모두가 해양교통의 요지임은 물론 깊숙한 만과 만을 감추어주는 섬들이 앞을 막아주고 있어 해양군사활동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러니까 장수산성 지역은 황해도 중부 한복판에 있으면서 경기만은 물론 황해도 연안의 모든 만들을 연결시키면서 이 지역의 해상 활동권을 하나로 연결하고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해양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군사체제로서는 매우 유용한 지역이다. 이와 관련하여 손영종이 내세운 남평양설의 장수산성 지역은 의미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에는 고구려의 水軍이 활동하기에 위험 가능성이 많았다. 故國原王이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보면(평양이 장수산성 지역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평양지역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고, 남포만과 대동만, 강령만, 옹진만, 해주만 등의 황해도 지역은 취약지구였다. 小獸林王 7년인 377년에 백제가 평양을 공격하고, 故國壤王 6년인 389년에 생긴 백제의 공격 등은 평양지역을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됐고 전선이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대규모 수군함대가 대동강 유역이나 그 이남 주변에서 發進할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그러면 그 이북에서 적합한 해역을 찾을 경우에 청천강 하구와 압록강 하구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록강 유역은 수도인 국내성과 비교적 가까워서 兵力의 이동과 관리가 자유롭고, 對中交涉에 유리하다. 더우기 하구인 서한만에는 큰 섬들이 있어 선박의 정박과 수리, 그리고 造船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반면에 主戰線인 경기만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군사작전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淸川江 유역은 西韓灣을 가로막는 여러 섬들이 있고, 만 밖에는 身彌島가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한다. 또한 고구려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지구인 평양지구에서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지역이므로 전략거점으로서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략적으로 백제 북변과의 거리가 압록강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짧다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가 기습공격을 감행할 경우,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전략상의 차질을 가져온다. 관미성 전투가 20일이나 걸렸던 경험은 이미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그 같은 난이성이 충분히 반영됐을 것이다. 그리고 수륙양면 작전을 감행할 경우에 육군과 수군의 이동속도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 하므로 수군의 발진기지는 가능한 한 전선과 가까운 곳이어야 합리적이다. 따라서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한 발진기지는 청천강 유역이었으며, 중간거점으로서 비교적 안전성이 확보된 대동강 水系의 한 灣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초기에 고구려의 수군작전은 남포만 이북이나 압록강 하구인 서한만을 주요한 發進基地로 하였고, 관미성 함락이후에는, 즉 大王 6년(丙申)조에 전개된 수로군이 공격할 때에는 甕津, 海州灣, 혹은 禮成江口를 최종발진기지로 하여 경기만에 집결한 다음에 그 전에 탈취한 關彌城을 중간거점으로 삼는 형태였다.
4장 병신년 작전 검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至 南首攻取壹八城---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라고 하여 광개토대왕이 大王 6년(396)에 대규모의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村을 탈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해의 기사와는 달리 步騎를 사용한 사실과 海戰이 발생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水陸兩面作戰으로 공격을 했건, 군사를 운송했건 수군을 동반한 작전임은 틀림없다.
해양작전은 보병을 동원하여 면과 선 위에서 한정된 작전을 펼 수밖에 전과는 다른 특성들이 있다. 수군작전은 潛行性이 있다. 적군의 관측범위나 방어체제와는 무관하게 아군의 작전능력과 의도에 따라서 잠행한 다음에 적의 배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선단은 전방지대 멀리 우회한 다음에 후방 깊숙하게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야간작전을 즐겨 구사하면서 이른바 點의 작전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둘째, 機動性이 있다. 선단은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기마군단 보다도 유리한 점은 야간에도 계속 움직일 수 있고, 전투의 주력인 병사들의 동력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병의 기동성과는 전혀 비교의 대상이 안될 정도이다. 셋째, 反轉性을 갖고 있다. 즉 전투의 일반적인 흐름과 전세에 강한 변화 내지는 극적인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원거리이동 후방 상륙작전은 수군작전의 백미로서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광개토대왕은 당시의 상황과 경기만의 정치 외교적인 가치, 그리고 효율적인 전략과 전술을 고려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전광석화처럼 실행하였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兵力과 運送船이 상당히 많거나, 척 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海洋活動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水戰과 대규모 군사작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구려 수군의 편제, 군사력, 수송을 포함한 해전능력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과 해양전략의 특성, 몇몇 기록을 통하여 그 윤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병신년 수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규모의 兵船과 군사가 집결되었던 발진장소와 지역은 어디였을까? 다수의 병력을 운송시키고, 전투에 필요한 군수품을 보급하고, 적재하는데 적합한 장소이어야 한다. 또한 良港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많은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는 灣이 있으며, 목적지까지 최단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漢水 이북에서 이러한 조건을 비교적 갖춘 곳은 해주만과 예성강 하구 및 대동강 하구이다. 廣開土大王 元年의 전투로 인하여 漢水 이북의 10여 城을 점령하고 북변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했다면, 이 시기에는 이미 예성강 이북 및 북부 경기만은 안전성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릉비문 14년조는 王健群 석문을 보면 '十四年 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王躬率往討 從平壤□□□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殺無數.'비문을 판독한 결과에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해석하면, 백제와 왜의 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왜연합군은 대방계를 침입하였는데 이때 倭와 百濟 사이의 주도권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문장의 주어가 倭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비문 작성자는 倭를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 王健群도 동일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도 왜의 침입과 역할을 강조했고, 수군을 동원한 대방계 습격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역할 상으로는 왜가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역학구도와 전황을 보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방계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이 무렵에는 고구려로서는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된 장소이며, 해안과 가까운 장소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수군활동과도 관련이 있었고, 병신년에 수군이 발진할 수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병선과 군대를 어떤 방향으로 이동시켰을까?
광개토대왕은 일차적으로 백제의 북진을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대외교통의 출해구를 막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 상태에 빠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양능력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의 예비단계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본목표는 경기만을 장악하고, 궁성을 함락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대외교섭창구를 탈취하는 일이다. 이 목표를 완수하는 효율적인 전략이 바로 경기만 상륙작전과 한강수로 직공작전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기본목적과 당시의 전략전술 및 이 해에 점령한 성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수군의 작전범위를 재구성할 수 있다. 陵碑文의 永樂 6 년 조에는 공파된 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이병도의 주장 이후에 천관우를 거쳐 이들 성들이 한수 이북에 있었으며, 수군의 작전반경범위는 임진강 유역 및 한강 하류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58성700촌의 위치를 보다 남쪽, 예를 들면 충청도 내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酒井改藏를 비롯하여 박성봉은 이들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손영종은 충청도 지역을 중요시하여 396년에 수군을 동원하여 한강하류 이북뿐 아니라 그 이남지역에도 적지 않게 진출하였으며, 또 충청북도, 충청남도 일부지역에서도 군사작전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물론 이 작전은 한강유역의 서부 및 이남의 해안지대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전략과 전황으로 보아 한강 이남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백제의 해양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으며, 백제의 해안공격에 서부해안지대가 노출될 우려가 있다. 또한 한강 이남을 공취하지 못하고 水軍을 이용해 한강수계와 수도만을 점령하였을 경우에 백제수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끊길 가능성이 많았다. 고구려는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는데,이는 황해도의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이면서 동시에 백제수군의 기습에 대한 고구려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배천의 치악산성, 연안의 봉세산성, 해주의 수양산성, 옹진의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 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이다.
그런데 릉비문에 기록된 점령된 성 가운데에 비교적 정확하게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일치되는 성들이 沸城(통진), 阿旦城(아차산성), 彌鄒城(인천), 牟盧城(용인) 등이다. 나머지 기록된 성들은 이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은 해양 전략적으로 보아 고구려군의 상륙지점 및 한성공격 방향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있다. 즉 백제가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의 한 부분들이었다. 그 시대는 이미 해양전이 전개됬고, 국가의 방어를 위해서는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해양방어체제들은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일개 단위의 해양방어체제 속에서는 소규모의 전술적인 방어망 외에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中心城이 있다. 이 성은 비교적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육지의 군사력과 공동작전을 펼 수 있는 지역에 있다. 중심성을 둘러싸고 규모가 작은 周邊城들이 포진해 있다. 해안 가까이에는 일종의 방어와 관측의 기능을 하는 前衛城들이 있다. 그리고 해안선과 섬에는 일종의 堡壘인 소규모 방어체제들이 있다. 그 외에 필자가 甕路라고 명명한 보조시설물들과 海岸烽燧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해양방어체제들은 삼국이 교대로 점령하였으므로 역사적인 상황과 용도, 전략에 따라 존속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보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으므로 축성양식이 혼재해 있고, 발견되는 유물도 섞여 있으며, 심지어는 축성의 주체 및 시대에 대한 사실기록에도 혼란이 있다. 특히 경기만 지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면서 점령을 했고, 특히 백제와 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러한 혼재현상이 심하다.
경기만 지역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해양방어체제의 연구와 당시에 전개된 전황 및 국제질서, 그리고 릉비문에 기록된 몇 몇 성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광개토대왕이 거느린 수군은 대략 3 개로를 택해서 상륙하여 백제의 전방지역과 한성을 공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 1로는 대동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예성강 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강화도는 古爾王 때 전렵을 한 서해대도이므로 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놓여 있었다. 만약 관미성이 강화도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이미 원년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통제권을 확보하였으므로 수군작전을 수립하기에 적합하다. 남북한강이 만나 최종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또한 연천, 파주 등 경기 이북을 흐르는 임진강이 김포반도에서 한강과 합쳐져 다시 내려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도 강화도이다. 특히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도 강화도 북부이다.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강화도로 직접·간접으로 이어진 한강의 河系網을 활용하면 한반도 중부 지역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한강은 경기만을 통해서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이다. 백제는 한강하류의 河岸都市國家로서 출발하였고, 수도를 내륙 쪽으로 이동시킨 후에도 역시 한강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수군의 한강수로직공은 한성을 공략하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수도방어라는 차원에서 한강하류 방어체제를 구축해야할 필요성이 강한데, 이는 해양방어체제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이루어야 한다. 백제는 責稽王 때에 한강강변방어체제를 쌓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을 공격하는 고구려를 저지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 후에 보복이 두려워 阿且城을 쌓고, 蛇城을 고쳐 쌓았다. 이 두 성은 현재 워커힐 뒷산의 아차산성과 건너편의 龜山토성 혹은 風納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수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강변방어체제이다. 그 이외에 외곽이나 한강수로 입구 부근의 강변에도 방어제제를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강수계의 하류에는 시대가 불분명한 河岸防禦體制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특히 한강과 면한 김포반도에는 산성은 물론 얕은 구릉 등을 이용한 방어시설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적인 환경과 백제의 방어체제를 고려하면서 제 1 로인 한강수로를 직공하기 위하여 주력군은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통과하여 김포반도의 북동쪽, 즉 한강 수로변으로 진입하고, 다른 군대는 직접 김포반도로 상륙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진격해야 한다. 이 때에 점령당한 성으로 릉비문에 나타난 沸城은 통진으로 추정된다. 한강 수로 주변의 즁요한 지점에 구축된 하안방어체제들 가운데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고, 공격수군이 제일 먼저 돌파해야할 방어선이 童城山城 지역과 烏(鰲)頭山城 지역이다. 황해도의 내륙을 흘러 내려온 예성강과 남 북한강, 서해가 만나는 강화도 서북부를 통과하는 물길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좁고 조류가 빠른 江華水路를 지나서 북상하는 물길과 만난다. 그 지점이 바로 현재 문수산이 있는 지역이다. 그 곳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포반도 쪽으로 애기봉과 祖江里가 있다. 이 좁은 물목은 한강의 양 안 간의 도강지점으로 사용되며, 수로로 직공하는 선단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원년(392년) 10월에 실현한 관미성 점령 당시에도 주요한 전장이었을 것이다. 丙申年에 감행된 수군작전에서 김포북부는 당연히 공격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건너편인 현재 황해남도의 백마산성은 豊德, 延白, 교동도, 강화도 등이 둘러싸고 있는 禮成江 하구를 거쳐 한강 하구인 祖江으로 들어오는 물목을 지키던 중요한 강변 방어성이다. 둘레가 7,5km에 불과하나 건너편 강화 북부지역과 애기봉, 동성산 지역 등을 샅샅이 볼 수 있다. 강 양쪽의 산성들이 세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이곳으로 비정한 사실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東城山城은 김포시 霞城面의 童城山의 정상부(113m)를 감싼 석축 산성이다. {大東地志}에는 '通津 本百濟平淮押(一云 別史波衣)'라고 하였다. 동성은 본디 백제의 童子忽 또는 仇斯波衣幢山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 16년 12월 童城으로 고쳐 長堤郡의 令縣으로 삼았다고 한다. {韓國의 城郭과 烽燧} 上에는 삼국시대 초기 유적이라 하고 백제시대의 성이라고 하였다.근래에 조사한 육사박물관보고서는 이 성이 백제성임을 시사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와있는 沸城을 이 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동성산에서는 동북으로 성동리의 오두산성과 그 옆의 검단산 봉수대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변 방어체제답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合水지점도 훤히 조망된다. 건너편에는 파주군 교하면의 深岳山(尋鶴山)이 있고, 현재 고양군일대의 들판과 한강변이 잘 조망된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한강수로, 한강 건너의 평야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동시에 공동작전을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런데 동성산 아래이면서 건너편의 두 지역과 마주보면서 삼각점을 이루는 한강변인 楊澤里에서는 회백색 연질토기의 구연부 등 각종의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건너편의 烏頭山城은 한강과 조강 임진강이 만나고 또한 曲陵川이 흘러드는 삼각 꼭지점에 해당하는 일종의 串城이다. 북쪽에서 돌출한 오두산(148m) 위에 쌓여져 있는 것으로 서울이나 개성의 입구를 지키는 요충지인데 석축의 길이가 약 500m 정도로 북문과 서문이 있다. 주변에서 붉은색 고구려계통의 기와가 수습되고 있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성이며 광개토대왕이 원년에 공격하여 점령한 관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될 만큼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金正浩를 비롯하여 근래에 尹日寧, 金侖禹가 주장하고 있다. 임진강 쪽 건너편인 성안지역과 함께 임진강 하구지역을 방어하고, 한강 쪽으로는 동성산과 함께 한강을 통해서 선박들이 오고가는 것을 관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특히 임진강 수로를 이용하는 세력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강변방어체제이다. 하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이곳을 함락 당하면 한성까지는 거의 거칠 것 없이 적군이 진공해 들어올 수 있다. 일산의 고봉산성, 심악산성, 행주산성, 기타 한강변의 방어체제 등, 그리고 몇 개의 보루성들이 일시적으로 저지는 할 수 있겠지만 대군의 공격을 전면적으로 막아내기는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전방에 위치한 중심성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지역을 통과해 상류로 더 거슬러오면 奉城山城과 深岳(尋鶴)山城이 한강 수로를 방어하고 있다. 봉성산성은 임진강과의 합수머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면 남으로 오다가 동쪽으로 진행하는 좁은 길목의 강가 남쪽에 있다. 한강 건너편의 심악산성과 마주보며 함께 수로를 통과하는 적을 지키는 강변의 방어체제이다. 한강하류와 임진강을 통해서 한강수로를 직공 해 오는 선단을 관측하고, 차단하면서, 한편으로는 양 지역간의 도강을 저지하던 보루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한편 그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 내부에 있는 가현산 및 수안산, 양릉포성 등과 시인거리에 있으므로 서해의 경기만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외에 김포에 있는 北城山城은 한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교하의 深岳山城, 일산의 高峰山城 등은 물론 선박들의 움직임을 샅샅이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다. 즉 검단 지역을 통해 들어온 적이 김포의 깊숙이 혹은 한강으로 붙는 것을 저지하고, 김포북단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강변방어체제이다. 이 지역을 지나면 강 양안의 주변지역에 있는 군소의 방어체제들을 공파하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중심에 있으면서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은 계양산성 지역이다. 桂陽山城은 부평의 계양산에 있는 석성이다. 富平은 {大東地志}에는 '本百濟主夫吐'였으나 新羅 景德王 16년에 長堤郡으로 바꾸었다. 라고 되어있다.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三國史記} 지리지 고구려편이나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主夫吐郡 으로 되어있다. 인천·서울·김포 등과 연결되는 중심에 있고, 바다와는 서쪽으로 14리밖에 안 된다. 이규보의『望海誌』에는 이 곳이 삼면이 물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도 해양방어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전망이 훌륭하여 仁州(인천)나 통진을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강서구의 開花山, 양천구 일대, 김포평야 일대가 보이고, 한강 너머로는 一山, 高陽, 幸州山城 등이 보이고, 마포구의 일대는 물론 북한산성도 보인다. 따라서 한강과 이 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경기만의 광범위한 해안지역에서 한성을 향하여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고, 해안 진성들을 지휘하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이 백제 및 고구려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가를 더욱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 그 외에도 한강에는 현재 고양시의 멱절산 보루, 행주산성 및 강서구의 宮山토성 등을 비롯한 소규모 보루들, 그리고 상류 쪽으로도 더 많은 군소의 하안방어체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강변에는 사람과 배가 건너다니는 나루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재 김포시의 검암나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甘岩津은 북쪽 8리에 있으며, 바로 고양 任意津의 小路이다. 라고 하였다. 양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강 건너 二山浦(巳浦임)와 연결되는 이 나루는 꽤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강강변방어체제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도강지점이나 수군의 상륙지점을 막기에 효율적인 장소를 택하였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짝을 이루는 형태로 구축하였다. 또한 주변의 다른 방어체제와의 관계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강변에 설치하였던 한계로 인하여 대성이 아닌 전술적인 소성이나 보루의 형태가 많았다.
제 2로는 황해와 이어진 김포의 守安山 지역, 인천의 여러 지역 특히 孔村洞·한진·제물포·소래 등의 해안을 통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부평의 계양산성이나 문학산성으로 추정되는 인천의 미추성을 점령한다. 이는 백제의 중요한 대외교통로 끊어 고립시키려는 목적 외에 수군을 격멸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 전력을 강화시킨 다음에 현재의 서울 서부지역으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상륙군은 현재 김포의 서해안 지역인 대명, 검단의 오류동 등에 접안 한 다음에 인천지역에 상륙한 군대와 합세하거나 한강 수로를 직공해 올라오는 수군과 연합작전을 벌였을 것이다. 김포지역에는 역시 삼국시대의 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양방어체제들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한강강변방어체제의 가능을 겸하고있었다. 다만 수안산성, 계양산성 등은 인천지역의 해양방어체제와 더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廣開土大王陵碑文}에는 병신년에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인천시 남구 문학동과 청학동의 경계인 문학산 위의 문학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仁川府邑誌}에는 '彌趨忽古城이라고 하였다. 문학산 근처에는 沸流井이 있었고, {仁川府邑誌} 墳墓條에 따르면 이 근처에 彌鄒王陵으로 전해진 고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군은 인천지역에 상륙한 것이 틀림없다.
인천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 곳으로서 약 8,2m에 달하기도 한다.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인천만의 안쪽에는 月尾島 芍藥島 등이 있고, 바깥에는 永宗島 靈興島 등 큰 섬이 있어 파도의 흐름을 안정시키고, 항구로서의 양호한 조건을 갖추게 한다. 반면에 물길이 매우 복잡하여 현지의 해양민들이 아니면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천은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해구의 기능을 하였다.
고조선의 末王인 準王은 남천할 때 서해연안을 따라서 航進하다가 남부에 상륙하였는데, 그때 인천만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백제가 점차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중국지역과 교섭할 때 인천지역은 교통로로서 중요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는 彌鄒忽에서 건국하였다.미추홀을 인천으로 비정한 것은 삼국사기의 지리지이다. 즉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이라 하였다. 그런데 본디 고구려였음을 밝히고 있다. {大東地志}에는 仁川은 本百濟買召忽(一云彌鄒忽國)라고 하여 본디 백제였다고 하여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미추홀인 인천지역은 백제의 영토였다가 후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교셥을 활발하게 하였는데, 4세기에 들어와 근초고왕은 고구려전을 과감히 수행하여 북쪽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황해중부 해상권 혹은 對中航路의 확보와도 관련이 있다. 이 시대에 바다를 건너 建康(현 南京)에 수도를 둔 동진과 교섭하였다. 그 때 사용한 주요한 항구는 항로나 해양환경으로 보아 2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강화도 지역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지역이다. 현재 인천시 남구의 玉蓮洞에 있는 凌虛臺밑인 한진(大津)이 백제인들이 중국을 향하여 배를 출발시켰다는 곳이었다.
이렇게 대외 교통로로서 중요한 인천지역에는 해양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린 외부침입자가 상륙하기에 적합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인천만에는 濟物浦,월미도, 永宗浦鎭 등 진과 토축의 고성이 있는데, 이 군사시설은 주안 등 내륙과 연결되면서 일련의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군사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개토대왕의 수군은 인천만의 여러 지역으로 상륙하여 해안방어체제들을 점령한 후에 彌鄒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구려군은 이곳을 전지기지로 삼고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한성에 접근하는데는 몇 개의 군사통로가 있다.
하나는 인천시 延壽洞과 安山 사이의 만으로 진입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는 蘇來浦口를 이용하는 길이다.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소래산 바로 밑에까지 蛇川(대동여지도, 현지에서는 뱀내천으로 부름)이 이어졌다. 蘇定方이 상륙해서 '蘇來'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외교통의 요지였고, 해양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에 상륙하면 安養 혹은 始興을 통과하여 한강 주변의 서울권으로 진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인천만에서 朱安으로 상륙하여 시흥과 부천사이로 빠져나가 光明을 지나 한강 이남의 서부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방어시설들이 문학산성을 비롯한 인천지역의 성들이다. 세 번째는 북부에 해당하는 통로로서 검단과 가까운 孔村洞 지역에 상륙하여 '장명이 고개'를 지나 현재의 강서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통로를 막기 위한 방어체제가 許岩山城, 桂陽山城, 지양산성, 新亭洞土城 등이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통로들을 동시에 활용하였거나, 전술적으로 필요한 정도로 선택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천지역에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관측하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곳이 문학산성이다. 미추성으로 추정되는 문학산성은 해안 가까이 있으면서도 중앙에 있었으므로 삼국시대부터 인천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군소 海岸防衛城과 주변에 부평의 桂陽山城 孔村洞의 許巖山城(시대불명), 黔壇의 노고산성(시대불명) 및 기타 永宗島 등 다른 섬방어체제를 거느렸다. 또한 해안방어 뿐 만 아니라 내륙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성의 역할도 하였으며, 특히 공동작전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는 한성에서 인천해안으로 통과하는 길목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데서도 확인된다. 인천지역은 병신년 이후에 계속 고구려에 점령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장수왕 시대부터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다. {三國史記}에는 齊次巴衣縣, 買召忽縣을 각각 一云 彌鄒忽이라고 하였다.
제 3로는 비교적 원거리를 항해하여 안산만과 남양만 등으로 상륙한 후에 현재의 수원·용인·과천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기습하는 것이다.
남양은 조선시대에는 부의 서쪽 54리 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남양반도와 朝岩반도(현재 雨汀面)를 끼고 있어 경기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남북이 좁고 동서 폭이 넓은 지형이다. 특히 남양반도는 해양교통을 고려할 때 경기만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가장 중요하고 넓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내부에 몇 개의 작은 만과 串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안산만, 남쪽으로는 평택만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오고가는 교통로로서 중요했고, 삼국이 접전을 벌였던 경기만의 남부에 속했다. 남양만은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성곽, 봉수 등 방어시설물이 많이 있으며, 그것을 축성한 나라와 시대 역시 다양하고 복잡하다. {東與備考}의 [新羅百濟高句麗肇造區域之圖]에 남양만은 현재 남양읍으로 들어가는 물길만을 가리키고 있다. 중요한 포구와 항로가 상임만이 아니고, 개죽포 일대가 도착 항구였음을 의미한다.
남양만 지역에는 많은 산성이 있는데, 특히 당성은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안산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성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높고 험준하며 폭이 넓은 지역으로서 즉 포구의 진성(鎭城)이 아닌 남양반도의 中心城이며, 일종의 해양방어사령부의 역할을 한 곳이다. 唐城, 古唐城, 黨項城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옛 지형을 보면 당성은 해안가에 있었으며, 남양반도의 전해안과 가장 짧은 거리로 연결되고, 어느 지역과도 한 번에 연결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다와 4개의 만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安山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당성은 해안군사 수비성으로서 몇 가지 한계도 있다. 성목쟁이 지역만 막히거나 점령당하면 완전히 포위가 될 수 있는 허점이 있다. 유일한 육로에 적이 있고, 바다에는 포위된 삼면에서 선단이 압박을 가하고, 군사 등을 상륙시켜 공격을 가한다면 방어에는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성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성들과 길게 펼쳐진 장성, 소규모의 초소 등 방어시설이 축차시스템을 이루면서 포진하고 있다. 바깥바다에는 濟扶島가 있는데 해양 전략적인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해안가에는 장성으로서 南陽長城이 있고, 청명산, 백곡리토성, 성목쟁이성 등이 연결되어 방어체제를 형성되었을 것이다. 백곡리성(白谷里城)이 있는 백곡리에는 백제 고분군이 있는데 4세기대의 것들이다. 때문에 이 지역의 성들이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해안 전위성(浦·津城)들이 포진되어 있다.
고구려의 수군은 경기만의 제해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안산 인천지역을 남방에서 압박하며, 한성을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야 했다. 이때 백제의 해양방어체제들은 상륙작전을 방어하는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당시의 전황으로 보아 고구려는 그 방어체제들을 공파한 후에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점령기간 동안에 고구려의 전략전술과 축성법, 그리고 남양반도에 대한 국가적 활용전략에 맞춰 해양방어체제들을 개축하거나 신축하였을 것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南陽都護府 古跡條에는 이곳을 古唐城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구려 때 당의 학자 8인이 건너와 머물렀다.는 기록처럼 당성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高麗史}에서 고구려의 당성군이라고 언급한 이후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당성을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다. 명칭도 당성현(唐城縣), 당성군(唐城郡)으로 되어있다. 한편 백제는 남양만을 빼앗기면서 해양활동은 물론 대중국 교통로를 잃어버려 정치 외교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심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蓋鹵王의 죽음과 한성을 상실한 이후에 백제는 熊津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의 병신년 수군작전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향을 통해서 이루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점령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릉비문에 기록된 50여 성은 山城 내지 治所 등 지역중심이었을 것이고, 700여 촌은 주변의 영농생산지였을 것이나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로서 海岸防衛와도 관련된 시설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98년에 阿莘王이 반격을 가하고 漢山北柵에 도달했다는 기사를보면 396년의 전투 때에 적어도 내륙지방은 한강선을 경계로 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이렇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볼 때 이보다 5년 전에 벌어진 관미성 전투는 성 자체의 함락과 함께, 백제가 가진 황해중부의 수군활동을 무력화시킨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관미성의 함락이 실패했었다면 6년에 발진한 고구려의 水軍은 백제의 해양방어망과 수군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후방 깊숙한 해안으로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고구려는 百濟를 韓半島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했다. 때문에 水軍을 동원하여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병신년 전투 이후에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백제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뜨린다. 광개토대왕의 海洋封鎖를 통한 연결고리 차단전략이 현실성이 있음은 백제의 대외정책이 변화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폭풍같은 공격에 대하여 백제는 계속해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아신왕은 雙峴城을, 뒤를 이은 전지왕은 沙口城을 축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들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가 되버렸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추진한 수군작전을 통하여 그 당시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질서의 재편과정과 해양활동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은 꾸준하게 추진되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기존의 경계선이 아닌 그 이남지역은 물론 해양이라는 새로운 역사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진해오는 백제의 예봉을 분쇄하고, 남진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기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악하여 황해중부 해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아울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거시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추진된 남진정책 및 경기만 공격은 고구려의 북진정책 및 국제질서의 재편 전략과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추진된 것이다.
대왕은 공격 및 점령 대상이 해양과 관련이 있으므로 수군을 직접 간접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보다 확실한 작전은 병신년의 수군 공격이고, 아울러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선이며, 수군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관미성은 강화도 북부의 봉천산 지역으로 추정된다. 대왕은 해양활동을 활용한 본격적인 백제공격을 위하여 예비단계로서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어 6년에 수군을 친히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수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으며,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기본복표, 해양작전의 특성, 경기만의 해양전략적 환경, 그리고 해양방어체제의 배치와 구조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군은 경기만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외곽포위작전을 펼쳤다. 수군은 3개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다음에 해안의 중심지역을 점령하고 일부는 한성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제 1로는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관미성을 선대의 출발기지로 삼아 한강수로를 직공하여 왕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제 2로는 인천만을 중심으로 김포 소래 등의 해안지대에 상륙한 다음에 현재 문학산성으로 추정하는 미추성을 점령한 다음에 한성의 서부지역을 경유하여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제 3로는 남양만을 중심으로 안산만 평택만 등의 해안으로 상륙한 다음에 당성 등 몇 개의 중심성을 근거지로 삼고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병신년 전투는 삼국시대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고구려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해양력이 직접 이용되고,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 후에 장수왕 시대에 들어와 427년에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중부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남진정책의 성공과 경기만의 장악을 토대로 동아지중해 중핵국가의 위치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바로 아래쪽 글에 중국유학을 비판하고, 곧장 이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술이 나를 죽이고 있어..ㅠㅠ
위염(그냥 만성위염)
장염(정확하게는 조그마한 혹 몇개-_;)
간기능저하
이미 내장쪽이 종합병동상태이건만, 친구의 기분이 드럽다는데...
같이 마셔주지 않는것 역시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게 폐인이었다. 결국에는 아침해를 보면서 집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인생이란 말이었던가.
8시, 한참 라틴어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본인 이번학기의 최대늪지대가 라틴어이기에 상당한 정신적소모를 견뎌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지주머니에서 바이브레이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살짝 받고
"나~ 지금 수업중이야..." 라고 속삭였다. 딱 한마디 하더군...
"사랑방" ......뚝....
어쩌란 말인가! 사랑방이라고 딸랑 한마디 하고 끊어버리면 안 갈 수도 없고, 미치게 한다.ㅠㅠ
결국 수업 끝나고 사랑방이라는 곳에 갔다. 여자1만이 나와있었다. 나머지 애들도 곧 온단다. 먼저 술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으니 여자 2가 왔다. 잠시 후 그 여자2와 사귀는 남자1도 왔다.
인물소개-_-
여자1 : 민증뒷자리는 2로 시작하지만, 가끔 1로 시작하는거 같다. 원래 내 인생이 그렇지만, 이 애 역시 나보다 술을 잘 먹는다. 라고 말하면 본인이 술을 잘 못 마시기에 비교가 안될 것이고...이녀석과 거의 1년 반정도를 알았는데 술취한 모습 딱 한번 봤다. 그 옆에는 소주병 15병이 쌓여있었고-_ 그 앞에는 여자2가 있었다.ㅠㅠ
여자2 : 여자1에 비해서는 그나마 술을 잘 못마신다.(....역시 나보다는 잘 마신다.) 남자1과 사귀는데, 연상연하커플이다. 그것도 4살차이인데........문제는 여자2가 동안이어서 별로 티가 안난다. 그것을 한탄하면서 사는 녀석이다.
남자1 : 대충 3년여를 안 인간이다.-_- 더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다. 서로 볼꼴 못 볼꼴 이미 다 본지 오래인 인간이다.
이제 모였으니 달려야 될거 아닌가?! 아니다.-_-;;내일 수업문제도 있고, 여자 2과 남자1은 청화대에 다니는데 좀 있으면 종합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부해야된다. 그렇다는 말은 12시까지 반드시 헤어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런 약속은 언제나 그렇듯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그러져갔다.
9시반무렵부터 시작된 사랑방에서의 술자리는 맥주였다. 본인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맥주는 배가 부르고 화장실 가야되서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그넘의 맥주를 25병을 마셨다. 그리고 겨우겨우 2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_; 여기서부터 말리기 시작했다.
사실 중간에 일어날 수 있는 타이밍이 있었지만, 안타깝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ㅠㅠ 본인 돈없어서 택시 못 타고 다닌다.-_-;;
무조건 자전거로 밟아야되는데 비오는날 산책과는 다르게 비오는 날 자전거는 정말 삶이 싫어진다. 고로....제자리에 계속 앉자 있을수밖에....
그리고 레드락이라는 곳을 갈려고 했는데, 좀 있으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집에 갈려고 했다!! 이떄 갔어야 됬다!!
노래방간다고 블루라는곳을 가다가 옆에 있던 태백산맥으로 빠졌다. 또 술마셨다.-_-; 간단하게 버드아이스 몇 병 비워주고..ㅠㅠ 4시에 노래방으로 갔다.
노래불렀다.-_-;;; 졸려죽을려고 하는데 내가 자면 욕이란 욕은 다 하기 때문에 꿋꿋이 참았다. 결국 6시 반까지 불렀다. 괴로웠다. 안 그래도 체력바닥에 중국와서 근 2주동안 오랜만에 사람들 보느라 술행진이었는데 오늘은 그것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이었으면 좋겠다. 문제는 어머니 오시는데...어머니도 술 좋아한다.ㅠㅠ (...맥주였던게 다행이지.ㅠㅠ 소주였으면 난 죽었다.)
집에 오는길에 집근처 단골집(가계이름 아님-_)에 들러서 계란탕하고 빠오즈를 먹고 집에들어와서 잤다.
결국 잠에 든 시간은 7시 반 일어나 보니 11시. 4시간도 못 잤다. 학교가야 된다. 괴롭다. 뒤끝이라는 것은 없기에 속 뒤집히는것도 있을 턱이 없지만, 잠을 못 잤다는 것은 나에게 타격이다. 8시간 안자면 보충할때까지 괴로운데..ㅠ.ㅠ
학교갔다 와서 곧장 잘 수도 없다.
내일 어머님이 오신다.
집안대청소해야되는것이다.
크어어!!! 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ㅠㅠ
중국 현지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다음카페 "북경대학교qna"에서 운영자를 맏고 있어서, 중국유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대답해주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른바 기술적인 부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입시, 시험, 생활에 관한 내용들이었을 뿐이고, 정작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유학이란 무엇인가?!"는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듯 싶습니다.
1. 중국유학은 꿈이 아닙니다.
중국유학을 결정하시고, 이곳으로 오시는 분들에게 "왜 중국을 오셨어요?" 라고 물어보면 대답이 천편일률적입니다.
"중국이 발전하고 있어서....."
이 말을 제 마음대로 풀이해보면, 중국에 와서 중국말 배우고 대학가서 공부를 하면 어떻게 취직은 해서 먹고는 살겠지, 혹은 이 곳에서 장사를 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라고밖에 해석을 할 수 없더군요.
이런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중국에는 고속도로가 없습니다.이곳에 있는 것은 단지 거대한 땅덩어리와 지도 한장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곳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꿈을 향한 도로를 혼자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도로가 고속도로가 될지, 자갈길이 될지, 아니면 영원히 도로공사중으로 남아있을지도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중국의 명문대학들(북경대,청화대,복단대)에서 현재 공부하는 있는 학생들도 취직자리가 막막합니다. 차라리 한국의 대학은, 설령 지방3류대학일지라도,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사회에서 취직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중국대학에서 졸업한 일세대들이 이제 겨우 취직하고 3년을 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유학에서 이른바 대학명판값으로 취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 도망은 다른 도망을 낳을 뿐입니다.
솔직히 저도 중국에 있습니다만, 이 곳에 있는 60% 이상의 유학생들은 이른바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자기정체성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PD수첩이나 VJ특공대와 같은 고발성프로그램에서도 많이 나왔다 싶이, 이곳의 생활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 프로그램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비율로 생각해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 옮은면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가기는 힘들겠고, 그렇다고 대학은 가야겠는데, 어디선가 중국에서는 대학가기 쉽다라는 소리를 듣고 중국땅으로 오신, 혹은 오시려는 분들은 이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단지 유학생의 수치가 될 뿐입니다.
지금 자신은 다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제가 카페를 운영하면서 유학준비생분들은 물론 유학생부모님들까지도 많이 접해보았습니다. 처음 이 곳으로 올 준비를 하시며 모두가 자신은 열심히 할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분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혹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방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한국을 떠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는 한국보다 괴롭고 쓸쓸한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 순간 중국으로의 도피를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3. 당신은 한국인입니다.
위에 사항을 보시고도, 아직도 중국유학을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오시겠다는 것, 제가 어떻게 막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단지 유학선배로서 한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중국은 외국입니다. 한국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한국에서 사고를 친다면 부모님이 욕을 먹겠지만, 이곳에서는 한국인이라는 한 민족집단전체가 욕을 먹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중국인들 혹은 이곳에 유학와있는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마주치게됩니다.
지금 현재 북경에서 중국인들, 혹은 다른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도 같이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싶으십니까?
열심히 공부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부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자각한다면, 절대 스스로 부끄러워할 짓은 하지 않을거라 생각됩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유학에 대해 쓴 글이 상당히 무겁고, 또 중국유학 절대 오지 말라는 글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오는 유학이라면,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끝에 오는 유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바보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글이 조금은 냉정하고, 이곳의 나쁜면을 많이 반영한 것 같습니다. 다음글은 조금 희망적인 내용으로 적도록 해보겠습니다만...... 저도 장담할 순 없군요^^::>
본 글은 CDHAGE님과의 덧글놀이?! 중에 일부분입니다. 무슨 덧글을 거의 글처럼 쓰면서 놀기?! 때문에 이번 글을 쓰던 중 왠지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홈피 만들면서 게시판을 안만든것을 절실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게시판까지 있었으면 이넘과 대체 뭔 짓을 했을지.....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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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로의 블로그가 쓰레기가 된다면서 계속 반대했던 그 분이 이제 트랙백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묻고 싶은것은 본인이 여기에 계속 리플을 달면서 점점 망가지는 본인의 블로그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망가질려면 같이 망가지자 입니다!!
무엇보다 그 분은 저보다 분명히 나이는 어리신데, 평소 저를 대하는 것은 동생대하듯이 하는 분이십이다. 그러면서 "형을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뼈를 깍는 심정"따귀의 가증스러운 말을 하는군요. 푸훗-_
그리고 혹시나 해서 적습니다.
이 글은 싸우는거 아닙니다. 그냥 말장난이며 배부른?!자들이 하는 탁상노름과 별반 다를게 없는 심심풀이 땅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짜 싸우면-_;; 피 튀깁니다...쿨럭..
빈부격차에 대한 너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수긍하는 바이다. 하지만 어느나라를 가던지 빈부격차라는 것이 크고 작음에 차이로, 혹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음의 차이만이 있을 뿐 현존하고 있다는 것도 주지하여야할 사항일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빈부격차가 커졌을지도 모르지만, 그와 동반되게 이른바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세력도 많이 성장을 하였고, 그들은 아직 이렇다할 소비패턴 및 소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같은 반에 여자반장과 같은 경우, 그 그지같은-0-; 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차를 끌고 다닌다-_;;
이런 한국적으로 생각했을때 언발란스한것이 지금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너가 말한대로 돈만 내면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 어느나라를 가나 똑같은 사실을 재 확인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봐야할 사실은 이 성장한 중산층계급이 단지 양이 아닌 질이라는 패턴으로 변할 때가 언제인가하는 문제이고, 난 그 시기를 올림픽으로 잡을 려고 하는 것이다.
2. 중국은 넓어서 파급효과가 한국과는 다를 것이다.
너의 말대로 중국이라는 대륙이 한국과 같이 면적이 작은 나라와 동일한 조건으로 비교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 하지만 중국이 가지고 있는 한가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무리가 아니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이른바 중앙통치?!라는 것에 길들여져왔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지금 현재의 사회주의체계도 모양와 형식이 다를 뿐 하나의 제국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물론 가설일뿐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이 제국체계는 현대에서 가장 유효한 문화무기라고 할 수 있는 방송매체를 손에 아우르고 있으며, 이것을 잘 이용할 경우 생각보다 무서운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실질경제지표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지표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주머니가 비어있어도, 비어있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마치 한국에서 신용불량자가 다량으로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뱀꼬리 : 이건 농담인데...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를 보고 중국에서 정부에서 조작선동한거라고 했었었지-_;;; 이넘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생활이 그거니까-_;; 쿨럭..)
3. 돈된다는 것을 인식...
완벽하게 동감이다.-_-;; 이것들은 그것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로는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앞으로는 완벽?!하게...그것도 순식간에 변할거 같다.....무서운 넘들-_-;;
4.한국과 중국의 경제사정이 다르다.
88년도 당시에 우리나라의 소득불균형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금의 중국과도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정도였지. 그러니까 일단 이 증거는 제외해라. 우리나라는 그 당시 어떻게 생각해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시기가 아니었다.(지금은 안정되었냐는 질문에는 노코맨트-_;)
나도 위의 증거라기보다는 너의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 올림픽이후에 중국이 발달할 거 같다는 논리를 세워보았다.
이제부터 완전 비논리로 전향함 해보자.
얼어죽을! 중국이 올림픽이후에 왜 발전을 하냐! 이것들은 쪽박쓰게 망해버려야 돼! 이것들의 정신상태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욕이라도 안 먹으면 무지막지하게 칭찬해줄거다! 일주일에 머리 두 번 감기캠페인이나 벌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무슨 넘의 얼어죽을 국제적감각이냐?! 유학생을 받아서 중국애들과 억지로라도 교류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유학생에게 돈이나 받아서 쳐 먹을려고 하는 이딴 넘들이 무슨 세계경영이냐?! 다 웃기고 자빠지고 있는 소리야.
그것이 이번 08년도에 절실히 드러날거다!!
중화사상에 썩어빠져서 외국인들에게 불쾌감만 안겨줄것이고, 심판의 편파판정문제로 역사상 가장 더러운 올림픽이 될 것이다. 국가이미지추락과 동시에 경제침몰이다!!!!
.......라면 좋을까? 한국의 발전에? ...........휴...모르겠다....더 생각해 봐야지.
그렇다. 챠오동쉔군의 의견처럼 지금 현재 발전중이다. 발전중이라는 소리는 곧 아직은 모자란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트랙백으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중국에서 생활하는데 서비서업이 나쁘다는 것은 많이 짜증나는 문제이며, 어떻게 보면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중국이 빨리 발달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중국의 발전모습(서비스업을 포함은 전반적인 사항)에서 한국의 80년대를 느끼고 있다.
한국도 비슷했지만 80년대부터 점점 좋아지면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른바 시민의식이라는 부분이 획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중국역시 같은 8년^^:: (2008년)에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문제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빠른 시간에 자란다면, 이미 과도한 중화의식을 통한 자만심이 또 얼마나 더 커질것인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물론 약소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주변열강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미국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어느정도 성장해 주어야 사다리외교를 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중요한 문제이다.
뭔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고 느끼시는가?! 정답이다-_-;;
본인 중국이 싫다. 이것들이 빨리 크는 꼬라지는 절대 보고 싶지 않다!
중국의 서비스업?! 본인이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08년도 올림픽을 기점으로 거의 완벽하게 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안 됐으면 정말 좋겠다-_-+++
만약 북경올림픽이 망한다면,
국가적 이미지는 생각 하지 않더라도,
시민의식과 정신쪽에서 10년은 퇴보 할것이다.
제발 그렇게 되라!!!
뱀꼬리 : 흐음..서비스 업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상한 이야기로 끝났다. 알아서들 이해하시라-_;;
[중앙일보] 최근 아시안컵 축구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보인 노골적인 반일감정으로 중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상이 크게 나빠졌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1일 보도했다.
아사히가 지난달 28~29일 전국 유권자 1939명을 전화조사한 결과 61%가 "아시안컵 이후 중국에 대한 인상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바뀌지 않았다"는 34%로 낮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각료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는 '컸다'(21%),'어느 정도'(61%)라는 응답자가 많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아시안컵인지는 축구를 어느정도만 좋아한다면 다 아실거라고 생각됩니다. 중국때넘들이 상당한 삽질을 했죠.
여기까지는 일단의 상황설명이었습니다.
----때넘에게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화사상을 버려라."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최고이며, 서양인들에게 지는건 그렇다고 해도, 동양인들이 자신보다 잘하는 모습은 상당한 시기심을 가지고 반응을 합니다. 어느정도 서양숭배사상이 그 속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런 중국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결승전까지 올라갔는데, 홈그라운드에서 일본에게 진 것이 많이 분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평소에 말하는 것이 이것도 사실 많이 어이없지만 "너네 한국인들은 좋아. 일본인들은 정말 싫어-_-+ " 입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왜 일본을 싫어하고,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그렇게 불확실한 기사로 비방보도를 했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열등감"입니다.
공부를 잘 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보이는 열등감과 같은 정서가 사회정서에도 반영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인들은 본인들이 말하는 "대국정신"이라는 것을 행동함은 물론 정신체계에도 심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 한국인에게...
사실 제가 한국인이라서, 중국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고쳐나가야되고, 그런것이 중국에 얼마나 이득이 되고 따.위.는. 전.혀. 관.심.없.습.니.다.위의 말을 한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모습과 앞으로의 최선의 길을 알면, 그것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한국의 입장으로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한국에게 가장 이득이 될까요?
여러분들이 자주 혼동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이득이라고 하면 보통은 금전적 이득을 말하지만, 이 경우에는 민족적 자존심를 포괄하는 전반적인 국가이득개념입니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아직도 숭상하는 한나라(딴나라당과는 관계 없습니다.-_;)의 시조인 유방은 자신이 힘이 없을적에, 다른 사람의 가랑지사이를 통과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이 되는것이죠.
(솔직히 이야기를 많이 축약시켰군요-_;; )
중요한것은 자존심문제입니다. 물론 저희 나라가 숙이고 들어가자는 의미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이든, 반드시 지켜야될 자존심 - 신념 없는 남자는 죽은 것이죠. - 은 반드시 지켜야겠지요.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진정한 "대.국."다움으로 살포시 웃으면서 넘어가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요즘에도 시끄러운 고구려사문제와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저희는 학술적으로 논하자고 하면 됩니다. 그네들이 자기나라 내부에서 교육을 그렇게 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주권침해행위입니다. 저희가 항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수준이 거의 한계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학술계에서 논리적으로 나가고(이건 특별히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_; 중국학계의 논리는 헛점이 너무 많아서 이제 겨우 본과의 역사학도인 저도 깰 수 있을 정도죠.)
우리 나라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정확한 역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열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이건 쫌 딴 애기지만)
고구려사가지고 지금 열변을 토하시고 계시는 분들....잘 들어보세요^^;;
그렇게 역사가 중요하다면, 왜 역사학과라고 하면 평소에 무시하시죠? 본인에게 아들이 있다면 역사학를 시키시겠습니까? 돈도 드럽게 안되는-_;;;
열 받으시는 것은 제가 어쩔 수 없지만, 그 뒤에 있는 문제도 생각해 주십시오. 단지 역사가 좋아서 역사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답니다. 평소의 행동과 이런 상황의 행동에 형평을 맞추어 주십시오.
---> 외교에 대해서 많이 혼동되시는거 같아서 올리겠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성명서가 외부적으로 공개된것이라면,
이것은 어느정도 밀실외교처럼 (특히 msn을 이용해서) 외교를 하는 방법의 한 예시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 외교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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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는 매 차례 발생하는 놀이의 주요 부분입니다.
2.1 외교 시작
진행자가 외교 단계의 개시를 명령하고 동시에 종료 일시를 공지합니다.
2.2 외교의 실행
차례의 종료까지 전자 우편, 전화, 대화방 등을 통하여 서로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 주십시오. 내용, 회수, 상대 등에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앞에서 DF에서 추구하는 것은 ‘분위기’와 ‘연기’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공들여 별명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제대로 써먹는 것이 좋겠죠. 그렇다면 교섭-주로 대화방을 통한-에서 칭호를 말머리로 한 채, 그에 따른 연기를 하는 겁니다. 다음에 그 예가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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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안녕하시옵니까, 휘 노리아 전하. 저는 영국의 수상 로버트 세실이라고 하옵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알고 있네. 유명하지 않은가.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는가?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제가 전하의 알현을 청한 이유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의 나라와 우리나라의 강화를 위한 것이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저희 빅토리 쩡 여왕님께서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계속 하게.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귀국과의 동맹을 원하고 계십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Queen Victory Jung...^^)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큭큭...^^ 대단한 이름이야)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알겠네. 생각해 보지.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자, 유럽의 판도를 생각 해보십시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우선 귀국과 우리나라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하여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음. 근데 여왕. 너무 쎈거 아닌가 싶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수많은 국가들의 침략에 놓여 있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물론 반대로 저희가 침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저희가 주의할 것은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 / 오스트리아, 러시아, 터키의 동맹.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등이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영국과 프랑스 중 1개국,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러시아와 터키 중 1개국을 반드시 동맹을 맺는 것이 좋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그리하여 귀국과 우리나라가 불가침 동맹을 맺고.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제가 영국과 손을 잡아 프랑스를,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일단 이들과도 회담을 나눌 터이니 성급히 결정짓지는 말게.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귀국이 터키 혹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오스트리아를 들이친다면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반드시 유럽의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이해하시겠습니까?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의 현명한 선택을 바라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저희의 제안을?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좋소, 그렇다면.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나한테 친서 같은 거 줬나?)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아니.)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음, 생각해 보리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오래 걸리십니까?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오늘은 그대의 환영회가 있을 터이니 참석해 주기 바라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답변은 내일 줄 터이니 성급하게 굴지 마시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 잊지 마십시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서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지금 오스트리아로부터 동맹 제의가 저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만약 영국-독일-오스트리아-터키 동맹이 완성되면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상황은 역전이라는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빙긋 웃으며) 협박이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무슨 말씀을...^^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제가 드리는 것은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빅토리 쩡 여왕 전하께서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귀국과의 동맹을 바라고 계신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세리스 (수상) ...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알겠소.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시지요.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거참.--;)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고개를 끄덕끄덕)
세리스 (수상) [로버트 세실 경] 전하의 안녕과 귀국의 평안을 비옵니다.
snowtou (여왕) [휘 노리아 2세] 오늘은 편히 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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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다면, 일반적인 교섭과는 색다른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즐겨주십시요. 이 분위기와 연기를.
외교과정은 이렇게 진행되게 됩니다.
물론 이 것은 성명서로 외부적으로 이렇게 공개가 된다는 것이고, 뒤에서 은밀하게 밀실외교를 해야되는것입니다^^
대충 감을 잡으시라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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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영국 성명서 >>
짐과 우리 대 러시아로서는, 이번 겨울에 귀국이 노르웨이에서 군단을 편성하려고 한 일에 대하여 심각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소. 비록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짐은 노르웨이에서 생산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군대의 목적이 우리 러시아에게 총구를 들이대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우리 제국이 귀국에 대해 적대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스웨덴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대 러시아의 군대가 이제까지의 많은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영토인 노르웨이를 존중해 왔다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에 짐은, 만약 귀국이 북해와 노르웨이 해역에 군단을 전개시킨다면, 우리 러시아로서는 이를 러시아에 대한 귀국의 도발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음을 알리는 바이며, 또한 귀국의 도발과 동시에, 우리 러시아는 스스로의 자위를 위해 귀국에 대한 선전 포고와 함께 노르웨이로 진군할 것임을 여기서 미리 선언하오.
짐과 우리 러시아는 귀국의 현명한 판단을 바라며, 동시에 전 유럽의 제왕들의 이해와 동의를 함께 구하는 바이오.
- 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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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러시아 성명서 >>
귀국 러시아의 성명서는 잘 보았습니다. 일단 귀국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일말의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만 생각을 하시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우리 대영제국과 귀국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음은 유럽의 모든 제왕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귀국과 우리 제국의 영토가 맞닿아 있고, 현재가 힘에 의존하는 열강의 시대인 만큼 우리는 우리 영토의 안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생산에 관한 것은 우리 대영 제국의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침략에 대한 의혹은 우리가 현재 대부분의 군대가 서유럽쪽에 편중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기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단지 단 하나의 해군으로 몇 개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동양의 제갈공명이라는 유명한 병법가가 이곳에 나타난다 하여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곳에 군대를 배치하려고 했던 것은 그곳이 만일의 경우 점령당한다면 우리 대영 제국의 본토까지도 충분히 위협받을 수 있기에, 우리 대영 제국의 당연한 방어적 조치였음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 대영 제국 수상 숀 라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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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분쟁 성명서 >>
비록 역사에서 일반화될 수 없는 우연한 사건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없으나, 자고로 역사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실로 미비한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되새길 때, 현재 영국과 러시아의 분쟁은 경계하지 아니할 수 없다.
불과 수년 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유럽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신민들로 가득하였으나, 하늘을 대신한 지상의 군주로서의 자격을 갖춘 독일, 러시아, 영국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참주들을 처단하고, 이 유럽에 천년 왕국을 앞당겼다.
그러나 작은 실수로 양국에 우애에 금이 가게 되었으니, 신민들이 평화 시대를 막 맛보려는 이 시점에서, 실로 슬픈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짐은 양국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비무장 지대화를 제안하는 바이다. 짐의 군대는 물론, 영국 또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아니하며, 현재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러시아는 군대를 철수하길 권고하는 바이다.
이는 유럽이 다시금 평화를 되찾아, 고대 로마의 번영을 구가하기 위함이니,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며, 눈 있는 자는 볼 것이라. 지혜로운 자의 선택을.
- 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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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호 DIPLOMACY TIMES 1903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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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분기의 헤드-라인 뉴스
1. 영국-러시아, 심각한 외교 분쟁! 전쟁으로 발전할지도...
2. 이탈리아와 터키, 내란에 빠지다.
3. 프랑스, 패전!
4. 오스트리아의 왕궁, 피난을 계속...
* 영국-러시아, 심각한 외교 분쟁! 전쟁으로 발전할지도...
[런던-연합] 노르웨이의 군대 주둔 문제는 우호적이던 양국의 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현재 양국은 거듭 자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일, 크레믈린의 공식 대변인이 노르웨이에 제국 해군을 전개하려 한 대영 제국의 시도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대변인은 황제 표트르 I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에서 대영 제국의 시도가 “우호적인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자국의 스웨덴 주둔군은 “그간 수차에 걸친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대영 제국하의 노르웨이를 존중했다고 부연했다. 마지막으로, 제국의 대변인은 대영 제국이 끝내 북해와 노르웨이에 군대를 주둔시키려 한다면 “양국은 그 순간부터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며 외교적 관례가 허용하는 최강의 표현으로 경고했다.
그 다음날, 대영 제국의 정부 대변인 역시 수상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을 통해 제국령인 노르웨이에 방어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자국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대변인은 “러시아의 전쟁운운 발언은 본 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내정 간섭”이라며 “강대국의 횡포라 아니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크레믈린은 한 발짝 물러나 “북해에 함대를 전개하는 것은 허용하겠다.”며 “그러나 노르웨이는 절대로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제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노르웨이에 영국군이 주둔하면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위험하며,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떨어지면 모스크바도 함락되고,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제국은 끝장.”이라며 소위 도미노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영 제국은 다시 한 번 “자국내 군대 배치 문제는 자국의 고유한 권리”임을 역설한 후 러시아측의 타협안을 거부했다. 한편, 의회 내의 보수당 매파 의원들은 이날 러시아 제국의 성명 내에 포함된 “허용”발언에 극도로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매파 중진인 디즈레일리 의원은 “우리의 호수인 북해에 해군 전개를 ‘허용’하겠다니, 저들의 오만함이 끝간데를 모른다.”며 응징을 부르짖었다.
[모스크바-연합] 한편, 러시아 제국도 이번 노르웨이 문제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 대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I세는 어제 페테르부르크의 해군 기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연설을 통해 “서쪽으로부터의 어떠한 도발에도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하였다. 제국의 외무 대신은 “대영 제국의 무장된 군대를 압도할 수 있는 러시아 제국군의 힘을 신뢰한다.”며 전쟁 가능성도 염두에 둔 발언을 하였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설치된 러시아 제국군 총참모부는 영국과의 전쟁시에 대비한 전략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집중 분석/ 양국 전쟁 피할 수 없나?>
러시아-영국간 외교 분쟁이 양국간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은 채 성명전이 계속되자 국제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20세기 국제 전략 연구 재단’의 이사장인 모 씨는 ‘전쟁 불가피론’을 제창하는 대표적 인사. 그는 이번 분쟁은 예견된 것이며 전쟁은 피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그 근거로 이미 유럽 지역의 대부분이 영국-러시아-독일에 의해 분할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세 강대국이 충돌할 차례임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만국 평화를 기대하는 모임’의 회장인 아무개 씨는 ‘한바탕 쇼론’의 제창자.
그는 러시아-영국의 외교 분쟁은 한바탕 쇼이며, 독일의 입장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두 강대국 영국-러시아가 정면 충돌을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아무개 씨는 현재 막후에서 독일과 좀더 확실한 관계를 맺기 위한 양국의 외교전이 한창일 것으로 보았다.
심지어 ‘외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사무 총장인 무명 씨는 ‘가면론’을 주장하기도. 무명 씨는 영국과 러시아가 일부러 서로 싸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특정 시기에 동서에서 협공, 독일을 분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영국-러시아가 서로 싸우는 것보다 가운데에 낀 독일을 협공하는 것이 전략적인 관점에서 유리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무명 씨의 주장이 비약이 심하고 황당하다며 “저 친구, 너무 디플로머시에 빠지더니 결국은...”하며 혀를 찼다.
한편, 양국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의 우리 주지사가 제시한 ‘비무장 지대론.’ 지사는 노르웨이 등을 포함한 양국 국경 지역 전체를 비무장 지대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서로 믿지 못하는 시대에서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 프랑스, 패전!
[파리-연합] 한때 당당한 강대국의 일원으로 세계 질서의 한 축을 구성했던 프랑스는 이제 더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 국왕의 급사로 야기된 이탈리아 왕위 계승 내전에서 이탈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던 프랑스는 유럽 정상 회담에서 열강들의 결정으로 시도가 무산되자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이다.
* 오스트리아 왕궁, 피난 행렬...
[트리에스테-연합]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치욕적인 피난을 경험했던 오스트리아의 황실을 끝내 세르비아에서도 피난. 그러나 영-러 관계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도 줄을 잘 설 경우 다시 중위권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유학을 한다고 모든 면에서 좋은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언어의 압박이라는 것이 한국에 계신분들보다 100배 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 같이 중국을 유학하고 있으면...
중국어는 당.연.하고 거기에 영어도 잘 할 거라는 착각을 합니다.
사실과는 절대! 다르다는 것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중국어 자체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에 영어라니....인생 괴롭습니다.ㅠㅠ
솔직히 그래도 외국인들을 그마나 많이 접하다보니 실용?! 영어는 대충 할 줄 알게 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실용-_;영어입니다.
(...논문같은거 전공 아니면 보기 참!! 힘들정도의 수준입니다.ㅠㅠ)
그래도 하긴 해야겠죠.ㅠㅠ
그럼 유엔이 정한 이른바 공용어중에서 반만 마스터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대충 생각나는돼로 적어볼려고 합니다.
영어
---> 한국에서 영어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_-;;
참 많이도 들었을 이 말......ㅠㅠ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안 좋은 기억때문에 영어가 정말 싫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고로 생활에 필요할 정도의 회화는 어느정도 된다고 생각하고..-_;;
남은 것은 독해인데.....전공서적읽을 수준이면 만족할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주위에 이른바 영어특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고통을 모릅니다. 이것들은 저 놀리려고 지들끼리 영어로 대화합니다. 주구장창~~~ -_++
그런거 근 3년간 당해보시면 영어가 정말 싫어지게 됩니다.
노력해서 공부하지라고 하시는 분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 인간들은!! 현지에서 5년이상 있었던 넘들입니다!! 크어어엉!!!
거의 현지인인 넘들인데 어쩌라고요!!!
아랍어
--> 솔직히 제일 배우고 싶은 언어입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코란이라는 것을 원어로 읽고 싶어서 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슬람교도는 아닙니다. 단지, 불경의 경우, 한자를 배워서 그럭저럭 읽었고(거기에 이모중에 한 분이 비구니스님이십니다.-_-;) 성경의 경우, 한글로만 완독해봤고, 라틴어로 읽고 싶어서 이제 공부를 할 생각이지만....
코란의 경우, 한국번역판은 있지만, 역시 원어로 하고 싶죠.
어학연수비용도 싸다고 하니까....어떻게 할까?! 생각중입니다.
근데 여기 유학정보는 어디에도 없더군요.ㅠㅠ 크흑..ㅠㅠ
중국어
--> .........뭐...현재 배우고 있다기 보다는....
현재 생활이 그것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절대 배우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요?!
.....이미 알고 있는거 어떻게 할 수도 없고.ㅠㅠ
크어어어!!!!
프랑스어
--> 아는 동생 녀석이 배우고 있고, 대학 졸업하고 유학간다고 하더군요. 이번 유럽여행때에도 대충 보았습니다만...-_ 그넘의 물가라는게 장난이 아니어서...그 동생넘이 좀 정착을 하면 빌붙어서 한번 가볼까-_;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어
--> 차라리 프랑스어보다는 이것저것으로 많이 쓰임이 있을거 같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쓸 일이 없기에...-_-;; 전 중국역사, 혹은 아시아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스페인어는....좀 거리가 멀죠?!
러시아어
--> 유학비용은 싸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중국유학 처음에 만난 룸메이트가 러시아애여서 인연은 있는거 같긴 한데......그 룸메이트와의 경험이 참~~ 아름다워서 말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넌 왜 방 안 바꾸고 개기냐? 라고 물어봤으니까요-_-;;
일단 룸메이트는 남자넘이었는데, 그넘은 같은 러시아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친구는 저희 기숙사 바로 뒤에 있는 여자기숙사에 방이 있었는데....-_-;;;
매일~~ 주구장창~~~ 저희 방에 있었습니다. 저보다 방에 더 오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ㅠㅠ
그것까지야 뭐 별로 신경도 안 쓰니까 상관은 없지만, 제가 좀 저혈압이어서 밤에 잠을 못 자는 성격이죠. 잔다고 누워서 아침해를 본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러시아애들은 그 사실을 알리가 없고, 덕분에 전 매일 밤마다 썡라이브로 응.응. 을 봤다는거 아닙니까? ㅠㅠ
하지만...여자애가 흑해쪽에 사는 애여서 캐비어도 먹었으니..헤헤..
좋습니다여~~~
결론은, 제가 공용어 6개중에서는 배울 생각이 있는건.
1.중국어
2.아랍어
3.러시아
4.영어...
거기에 모국어인 한국어를 합치면 5개국어군요.
하지만 5개국어 하면 왠지 폼이 안나는 이유로.....일본어 추가!!
내년 여름쯤에 일본에 사는 동생에게 신세지면서 알바하면 어떻게 버틸수 있을듯 싶으니, 그럼 6개국어가 되는 것이죠^^
폼~~ 날꺼 같네요~~
....................하.지.만. 과연 할 수나 있을지-_;;
지금까지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할 수도...ㅠㅠ
.....하지만 할 수 있다면 폼...날거 같은데..-_;;
(인생이 폼생폼사...쿨럭..)
자주가는 아주 정.상.적.인. 모 싸이트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매우 궁금해졌다. 본인의 경우 한자이름과 한글이름이 모두 있지 않은가?!
그 뿐만 아니라, 이넘의 특이한 이름덕에 지금껏 아름다운 학교 생활을 해 온지라...-_-;;
(자네들은 아는가?! 조회시간마다 바로! 본인의 이름이 불린다.ㅠㅠ)
자...결과는?
순수한글 이름
한자이름
둘다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쿨럭! 어차피 내 인생은 아무래 삽질을 해도 그거 그거란 말이냐!!
발음오행
이 이름은 하늘에는 나무가 자리하고, 사람에는 물, 땅에는 불이 배치되어 있는 오행이다.
하늘의 나무와는 서로 돕고 살지만, 땅에 있는 불과는 상쟁하니, 능력 부족으로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따라서 이 오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성격은, 예민하며 민감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섬세해서, 신경질이 많은 성격이 되기 쉽다.
모든 일에 조급하고 순간적인 승부를 원하는 성급함 때문에, 갈수록 어려워진다.
사회생활도, 윗사람에게 예의 바른 행동으로 큰 덕은 못 보지만, 평범한 인간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시적인 발전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초가 불안한 운명으로, 수하에게는 신경질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에, 반발을 사서 충돌이나 배신을 당하여, 노력한 기반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게 된다.
이 이름은 부모형제 덕이 없고, 실패 운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기복이 심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재물이 모이지 않고 안정된 생활이 매우 어렵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하지만, 배우자와 조그만 감정대립이 잦아, 가정의 불화가 상존하는 운명이다.
아내도 처음에는 남편의 독선적인 성격을 잘 인내하지만, 한계에 부딪혀서 남편과 대립하니, 별거 내지 생리사별의 수가 보인다.자식은 머리도 좋고 착하지만, 부모로 인한 가정불화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구렁텅이로 빠지기 쉽다.
만약 힘이 들어서 문제가 생기면, 자식과 별거하여 생활하면 자식이 대성할 수 있다.질병으로는 순환기, 비뇨기계통의 질환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나의 인생은 무었이었단 말인가.ㅠㅠ
크어어!!!
본인이 볼 줄 아는 타로점으로는 이렇게 안나온다는 말이다!!!
점은 점일뿐 믿거나 하지 말자^^::::
위의 점뵤는 싸이트 주소는!!!
http://sajucyber.com/name/dindex.php3
(난 너가 싫어!!)
특정 국가가 18개의 보급지(Supply Center)를 차지하게 되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한 것으로 간주하여 게임의 승자가 됩니다.
2. Starting Position
게임 시작 시,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각각 3개의 보급지와 전투유닛들을 갖고 게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4개) 이건 외울 필요는 없으니 그냥 참고만 해 두십시오. ^^;
오스트리아 (Austria) - 붉은색 - A Vienna, A Budapest, F Trieste
잉글랜드 (England) - 진한 청색 - F London, F Edinburgh, A Liverpool
프랑스 (France) - 하늘색 - A Paris, A Marseilles, F Brest
독일 (Germany) - 검정색 - A Berlin, A Munich, F Kiel
이탈리아 (Italy) - 초록색 - A Rome, A Venice, F Naples
러시아 (Russia) - 흰색 - A Moscow, F Sevastopol, A Warsaw, F St. Petersburg (SC)
3. 게임의 기본
모든 유닛은 동등한 전력 점수를 가지며, 한 지역에는 반드시 한개의 유닛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는 없습니다.
4. Turn Sequence
디플로머시는 1901년부터 1년을 둘로 나누어 6개월 단위로 게임이 진행됩니다. 게임의 턴은 일반적으로 봄 턴과 가을 턴으로 부르며, 봄 턴을 진행하는 방법과 가을 턴을 진행하는 방법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봄 턴 진행 단계 :
1) 외교 단계
2) 명령서 작성 단계
3) 명령 수행 결과 판정 단계
4) 유닛 퇴각 및 제거 단계
가을 턴 진행 단계 :
1) 외교 단계
2) 명령서 작성 단계
3) 명령 수행 결과 판정 단계
4) 유닛 퇴각 및 제거 단계
5) 유닛 증강 및 축소 단계
외교 단계 :
플레이어들은 외교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자유롭게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과 접촉하여 국가 간 협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과 접촉하는 동안에는 필요한 어떠한 행동을 해도 무방합니다. 필요에 따라 조용한 장소에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벌이거나, 셋 이상의 국가가 모여 일종의 연합을 형성하는 등의 행위도 모두 허용됩니다.
--> 저희는 인터넷으로 즐기기 때문에, 더욱 비밀스럽고 은밀한 밀약들이 난무할거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MSN, 게시판, E-MAIL등. 모든 방법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이러한 외교적인 비공식 접촉은 한 턴에 대략 15분 정도 동안 진행될 것입니다. (첫 턴 때는 30분 정도가 될 수도 있음.)
--> 이 요약집은 직접 만나서 게임을 하는 경우입니다.
저희는 한턴을 1주일로 잡고 게임을 할 것입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모든 플레이어는 지정된 장소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제 명령서를 작성하기 전에, 원하는 국가에 한하여 짧게 자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할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외교단계 동안 맺어진 협정, 약속, 연설 등은 아직 실행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일 뿐이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단지 명령서에 적힌 내용만이 수행될 것이며, 플레이어들 간에 맺어진 약속들은 실제 게임 진행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 간단히 말하면, 말로 무슨 약속을 하던지 상관없다. 마음껏 배신해라!! ............입니다.-_;;;
명령서 작성 단계
모든 유닛은 한 턴에 한 개의 명령만을 수행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선 명령의 대상이 되는 유닛의 표기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A or F) (Paris or Par)
앞의 A, F는 각각 유닛의 종류를 표시하는 데, A는 Army를 의미하며 대포 모양의 유닛입니다. F는 Fleet을 의미하며 함선 모양의 유닛입니다. 뒤에 붙는 것은 지명이며, 완전히 풀어쓰거나 약어로 기입합니다. 그 뒤에 해당 유닛에 대한 지시 내용을 적게 됩니다.
사용 예 : A Paris Holds, A Par Holds
플레이어가 특정 유닛에 내릴 수 있는 명령은 총 4가지가 있습니다.
- Hold - 정지
- Move - 이동
- Support - 지원
- Convoy - 수송
* Hold
유닛이 움직이지 않고 현재 위치에서 방어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무런 명령도 내려지지 않은 유닛은 자동으로 Hold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사용 예 : F London Holds, F Lon Holds
* Move
플레이어는 Move 명령을 사용하여 자신의 유닛을 인접한 육지, 바다, 해안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Move 명령은 곧 공격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별도의 공격 명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Move 명령은 명령의 대상인 유닛을 표기한 후 대시(-)를 적고, 다시 도착지점을 표기하면 됩니다.
사용 예 : A Paris-Burgundy, A Par-Bur
주의 : Fleet 역시 바다와 인접한 육지 지역으로 이동하고, 도착한 지역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하십시오. 단, Fleet이 육지에서 육지로 이동할 경우에는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이 반드시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Fleet은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할지라도 육지를 넘어 반대편 해안으로 나갈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South Coast와 North Coast 등으로 분리된)에서는 같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들어온 해안을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반면 Army는 Convoy 명령으로 수송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경우에도 바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동 명령의 실패 :
- 같은 지역으로 둘 이상의 같은 전력을 가진(지원을 받지 않거나 똑같은 숫자의 지원을 받는) 유닛이 이동해 들어갈 경우, 양자가 모두 이동에 실패하여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 다른 유닛이 선점하고 있던 지역으로 같은 힘을 가진 유닛이 이동해 들어갔을 경우, 공격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경우, 이미 해당 지역을 선점하고 있던 유닛이 현 위치를 유지하며 공격자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 Support모든 유닛이 똑같은 전력 점수를 갖기 때문에 누군가가 선점하고 있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원이 따라 주어야만 합니다. 특정 유닛에 대한 지원 명령은 그 대상이 되는 국가의 허가 없이 자유롭게 주어질 수 있으며, 일단 주어진 지원 명령은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게임 도중 이 규정때문에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Support 명령 기입 방법
a. 명령의 대상이 되는 유닛의 종류를 기입하십시오. (A 혹은 F)
b. 대상 유닛이 존재하는 지역명을 기입하십시오.
c. "S" 명령어를 기입하십시오. (Support의 약자)
d. 지원의 대상이 되는 유닛의 초기 위치와 이동 위치를 기입하고 그 사이에 대시(-) 기호를 넣어 주십시오.
사용 예 :
1. A Mar-Bur
2. A Par S A Mar-Bur
1. "Marseilles에 주둔 중인 Army가 Burgundy로 이동한다."
2. "Paris에 주둔 중인 Army가 Marseilles에서 Burgundy로 이동하는 Army를 지원한다."
* Convoy
수송 명령은 마레 노스트럼에서 해군에 의한 육군 수송 혹은 A&A의 소위 "브리징" (Bridging)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도 잘 모르시겠다면 그냥 바다에 함선으로 다리를 만들어 놓고 육군이 그 위를 지나간다고 생각하십시오. 서로 인접한 바다 지역을 통해 두 개 이상의 함선이 연결되었다면 마치 하나의 긴 다리를 통해 이동하는 것처럼 함선을 통한 릴레이 수송이 가능합니다.
Convoy 명령의 기입법은 Support 명령과 거의 똑같습니다. S만 C로 바꾸어 기입하여 주십시오. C는 Convoy를 의미합니다.
사용 예 :
1. A Ank-Sev
2. F Bla C A Ank-Sev
명령 수행 결과 판정 단계
명령서가 모두 제출되고 나면 모든 명령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판정합니다. 모든 명령은 동시에 수행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유닛 퇴각 및 제거 단계
모든 명령에 대한 결과 판정이 끝나고 나면, 방어 작전에 실패하여 현재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유닛들은 인접한 지역으로 퇴각해야 합니다. 퇴각 명령 역시 명령서를 작성함으로써 수행되며, 이 기간 동안에는 어떠한 외교적 활동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는 퇴각할 수 없습니다.
- 다른 유닛이 존재하는 지역.
- 공격자의 이전 위치. 즉, 공격자가 공격 직전에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
- 이번 턴 중에 교착상태(Standoff)가 발생하여 아무도 주둔하지 못하게 된 지역.
* 유닛 퇴각
퇴각에 대한 명령은 Move 명령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퇴각하는 유닛은 수송되거나 지원받을 수 없습니다.
* 유닛 제거
만약 둘 이상의 유닛이 동시에 같은 지역으로 퇴각했을 경우, 두 유닛 모두 퇴각에 실패하여 제거됩니다. 퇴각할 수 있는 지역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에 패한 유닛 역시 게임 상에서 제거됩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특정 유닛을 퇴각시키는 대신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단, 아무런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거나 전투에서 승리한 멀쩡한 유닛을 임의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유닛 증강 및 축소 단계 (가을 턴에만)
- 가을 턴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신이 확보한 보급지(Supply Center)가 몇 개인지 파악하십시오. 플레이어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보급지의 숫자만큼 유닛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일단 확보한 보급지는 봄 턴 동안 그냥 공백 상태로 비워두거나 다른 국가에 의해 점령되더라도 현재 소유자가 그대로 통제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중요)다른 국가의 보급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가을 턴이 끝나는 시점에서" 해당 보급지에 자신의 유닛이 주둔해 있어야 합니다. 퇴각하는 부대에 의해 일어난 보급지 점령 역시 유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자신이 운용 중인 유닛의 숫자보다 보급지가 더 많다면 그 차이만큼 새로운 유닛을 생산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기존의 유닛을 제거하여 그 숫자를 맞추어 주면 됩니다.
- 새로 생산하는 유닛은 반드시 게임 시작 시 원래 자신의 보급지였던 지역에 배치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고향 땅을 모두 잃은 플레이어가 있다면 해당 플레이어는 자신의 고향 지역을 회복하기 전까지 새로운 유닛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새로운 유닛을 배치할 보급지는 반드시 비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유닛이 주둔 중인 곳에서는 유닛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 자신의 유닛 숫자보다 많은 보급지를 갖고 있을지라도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새로운 유닛을 생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외교적 협약 등에 의해)
단! 이 프로젝트를 반드시 진행해야기에-_-
필수참가해야 되는 사람을 발표하겠습니다.
1.섭승현 : 자네의 욕심플레이가 딱 들어맞는 게임이로다!
2.조동현 : 국제정치감각을 보겠어.
3.오방혁 : 국정과. 알아서 잘 하리라 본다.
4.이지헌 : 청화대일파를 잘 모아보게나...
5.이택인 : 후훗-- 자네 게임 실력을 믿네...
6.이경선 : 유일한 여자지만-_ 남자같은 자네..-_-;;
7.최정원 : 북경 보드게임계?! 에서 언제나 저의 최고보유량을 위협하시는 분....^^::
이렇게 7명은 반드시 참가해야되는 인원임을 발표합니다. 이 맴버는 실력으로 인하여 뽑혔으며, 이 배신이 기본매너인 게임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정도로 싸가지 없다고 보장하는 바입니다.
7명을 뽑은 이유는 이 게임의 최소인원이 7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각자 7개 국가 중 하나의 최고지도자가 되어서 게임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각료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맴버를 더 모을 수 있습니다. 대신 각 팀의 인원수는 3명으로 제한하겠습니다. 그 이상이면 게임이 많이 혼란스러워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위의 7명은 알아서 맴버를 모아주십시오.
그리고 바로는 뭘 할까요?!
...게임에 참가.....하고 싶습니다.ㅠㅠ 이 말은 곧 참가 못하고 진행자만 된다는 소리죠. 젠장할!! 제가 참가하는 순간, 게임 상의 모든 나라가 제 나라를 공격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제가 참가하고 싶을 마음이 들겠습니까? ㅠㅠ
게임을 잘 하는 것도.....아..너무 잘난것도.......이럴때는 정말 슬프군요....ㅠㅠ
게임 방법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외교게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배신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 규칙은 엄청나게 간단합니다.-_- 한번 보시면 즉시 아실 겁니다. 특히 제가 뽑은 필수맴버의 경우, 제가 혹독한 게임들로-_;; 솔직히 리코정도는 혹독하지는 않단 말이다!! 단련을 시켰으니 알아서 잘 따라올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설명을 한 것입니다. 중국가서 정비하고 뭐하고 하면
게임 시작일자는 9월 중순정도일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1. 어느 누구나 방명록에 참가신청을 하면 게임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단! 북경에 계신 분으로 제한하겠습니다^^)
2. 위의 7명은 강제적으로 본 게임에 참가해야됩니다.
3. 위의 맴버는 각자 본인포함 3명이내의 인원으로 팀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홀로 하는 것보다 이게 더 재미있으므로 추천합니다.)
4. 바로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단지 운영자 역할만 하겠습니다.ㅠㅠ
5. 게임 시작은 9월 중순에 하겠습니다.
6. 게임 시작전에 사전에 위의 6명이 한자리에 만날 것입니다.
7. 게임은 어디까지나 인.터.넷.으로 진행됩니다.
8. 어떠한 잔소리도 무시할 겁니다.-_- 무조건 할 겁니다!!
----> 아래글에 간단한 게임설명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게임참가자 혹은 참가할까 고민하시는 분들은, 아래 설명서를 참고해 주십시오. 참고로 대부분의 내용은 운영자인 저만 알아도 되는 사항이고, 실제로 여러분이 할일은 외교와 명령서 제출밖에 없습니다.-_-;;
근데, 계획에 없던 유럽여행을 하는 바람에 만나야 될 넘들을 만나야 되는데, 문제는 중국에 돌아가야되는 리턴비자가 3일까지 라는 것이지요^^;;;
덕분에 초릴레이 인간 만남을 해야된다는 것이지요...크흑...
결과적으로 3일 1시 40분 아시아나가 되는거 같습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참~ 많은 삽질을 했더군요. 고구려는 한두번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당사국인 맥시코도 태클 안 거는 것을 중국의 위대한 사상으로 삽질을 하고^^;;;
최고라고나 할까요? 여행의 피로를 풀고-_ 하나하나 태클 걸기 시작해야겠네요.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중국의 위대한 사상이여~
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
4.등록은 어학연수신청시 같이 하시면 되리라 생각이듭니다!
고로 내년3월 편입예정이신분들은 올 11월부터 학교측에 연락해보시
는게 좋을듯....
5.북경외 타지역에서 편입해오시는거라면 그지역 공안국에서
전이(qian1 yi2)수속을 밟으신후 거류증에 전이도장을 찍어오셔야
합니다!그후 북경에서 다시 새로 거류증을 만들게 됩니다
이수속을 하지않으시게 되면 귀국하셔서 새로 x비자를 받아오셔야
합니다.그러리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지금 대략 푸다오반 시작하기 한달 정도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과목별 준비 요령입니다.
어문:지금쯤이면 대략 hsk7급정도의 실력을 요합니다.
푸다오반에서 설명해주는 내용을 이해하고
시험준비 하기에 필요한 기본 실력이라고 해야되나,
나름대로 작문 주제를 정해 써보고 교정을 받아야 되고,
제 1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어느정도 숙지 하고 있어야 됩니다.
반의어,동의어,동음어 같은것들은 어느정도 정리나 암기가 되있어야 하고,
아직 시조 같은 것들은 암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독해 문제 같은것들은 꾸준히 풀어서 문제 푸는 요령같은것들을
몸에 익히는 편이 좋습니다.
푸다오 반이 시작 하면 그때 찍어주는 암기내용은 거희 그림그리듯
외우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때 독해 작문 같은 것들을 꾸준히 해서
감각을 유지 하는 편이 좋습니다.
학원을 다니는 것,개인 과외를 받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학원을 다니게 되면 학원 자체의 모의고사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볼수 있고, 아무래도 열심히 하는 학생을 보면서
긴장감을 유지시킬수 있으니깐요.또 학원에서 주는 푸다오반 수업 정리 자료도
꽤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 지금쯤이면 어느정도 역사의 전반에 대해서
숙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푸다오 반이 시작 하게 되면, 선생님이 설명해 주는 내용은 어떤 내용을 외워라
그정도를 설명해주지, 학교 수업시간 처럼 설명해 주진 않습니다.
역사 같은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토요일날 역사 푸다오가 있으면,
토요일날 저녁에 그날 푸다오 반에서 공부 했던것을 다~외우는것이 좋습니다.
특히 시험때 괄호 채워 넣기 같은 경우,굉장히 햇갈립니다.
만약에 학원에서 푸다오반에서 한 내용을 자체적으로 이건 나올수 없다,
이건 나온다...라고 범윌르 축소 시켜줄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만, 학원이 결과를 책임질수 없습니다.
푸다오 반에서 찍어주는 내용, 굉장히 많습니다.하지만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모두 외우십시오.
서술형 문제 같은 경우에도 찍어주는 경우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방법 없습니다. 일단 그 내용을 파악한 후,외우 십시오.
이건 나올거 같다, 저건 안나올거 같다... 그런거 없습니다.
작년 푸다오반에서도 5가지 서술형을 찍어주고 거기서 한문제가 나왔는데,
저 아는 사람들 나름대로 이 문제는 안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나와서 피 봤습니다...
저같은 경우 작년 시험에서 세계사 부분의 많은 사람이름을 영어로
써 넣었습니다. 거기서 생각보다 많은 점수 를 땃는데 시험을 치르기 전에
만약을 위해 역사 선생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세계사 부분의 인물이름을 영어로 써도 되는지.
참고로 영어식 이름을 중국어로 외우기.....저는 토하는 줄 알았습니다.^^;
역사 시험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먼저 내용을 파악하십시오.
그 당시 시대 배경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암기하면 한결 수월해집니다.
그리고 문제집에 나오는 문제들 풀어 보십시오. 가끔씩 출제 됩니다.
영어: 영어 기본 실력들 어느 정도 있으시죠?^^;;;;
만약 영어 실력이 안된다고,영어를 잘한다고 놓지 마십시오.
작문도 가끔씩 써보는게 좋습니다. 어법부분도 계속적으로 준비하십시오.
독해부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솔직히 영어 푸다오.....시험에는 크게 도움안됩니다.
(이건 개인적 견해이기도 하지만.)
꾸준히 문제를 풀고,감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수학: 제 개인적 생각에는 수학못하시는분들, 미리 겁먹고 포기하는 경우 많은데
"절대"그러지 마십시오.
아마 지금쯤이면 수학 범위의 반정도의 개념을 이해 하시리라고 봅니다.
(아니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지금부터라도 시작해서 데미지를 줄이십시오.)
수학 푸다오 시간에 푸는 내용들, 미리 예습을 해 놓는 편이 편하실 것입니다.
일단 시험 2주전 까지 푸다오 시간에 준 프린트 내용을 다 이해하고
암기 하시는게 다른 과목 공부에도 좋습니다.
-푸다오 반에 수업을 들을때, 적어도 2명정도가 같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난후, 서로 필기한 내용을 비교해 보는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듣다 보면 놓칠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의고사를 자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알수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영어,수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꾸준히 공부해서 감을 살리십시오.
나중에 시험 2주전 부터 어문과 역사의 엄청나게 외워야되는 양 때문에
수학,영어를 손 놓는 경우 있습니다.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미리 계획을 세워 놓고(자기 능력에 맞는) 그리고 공부하십시오.
시험앞두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란 참 어려운 일 입니다.
-만약 자신의 실력이 뒤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낙담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마십시오. 시험을 치루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열심히 준비하십시오. 공부도 안하면서 쟤는 붙을거 같다. 쟤는 떨어질것 같다.
그런짓들도 하지 마시구요. 자기보다 잘하면,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고
분발하십시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저같은 경우 올해 몇과목을 시험 치루는지 어떤 내용을 보는지
잘 모릅니다. 심지어 시험을 언제 보는지도 모릅니다.;;;
일단 작년과 재 작년에 준비한 경험을 개인적인 바탕으로 글을 써봤습니다.
시험 보시는 분들 모두 최선을 다하시기를 빌면서...
--Uguyz님을 대신해서 제가 올렸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인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참고해주십시오^^
신청자격 (1) 만 18세~30세, 고졸이상 학력, 고등학교 성적우수자이며, 품행단정
하고 신체건강한자
(2) 초보적인 중국어 기초가 있어야 함. 중국어를 1년이상 공부한 적이
있거나 초등HSK C급이상 증명서를 가진자
====== 실제로 예과반의 연령층은 다양합니다. 작년같은경우 저희반에 84년동생부터 77년형님까지 같이 공부를 했었죠.
HSK성적없이도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그에 상응하는 1년정도의 학습과정을 증명할수 있는 서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볼수있겠죠. 물론 유학원에 배분된 할당량이나 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것은 적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사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나날이 치열해지는 예과반의 경쟁률을 생각해봤을때 그래도기본적인HSK급수정도는 따놓는게 유리하겠죠.
하지만 이때 제출하는 HSK성적이 본과진학의 당락을 결정하는것은 아닙니다. 입학후에도 최고 3회의 HSK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입학시에 이미 8급이 있다면.... 당신은 예외입니다^^======
신청시간 : 2004년 3월 1일부터 31일까지
신청장소 : 북경대학 유학생사무실 예과부(샤오위엔 3호루)
신청방법 1.신청시에 고등학교졸업증명서 혹은 상응하는 학력증명서, 고등학교 3년
간 성적표, HSK초급한어수준인 C급 펴준증서 또는 일년 이상의 중국어
학습 성적증명서를 제출
2.제 1항의 성적표를 검토한 후에 모집조건에 부합하는 학생에게 '북경대
학예과유학생입학신청표','외국인신체검사서'를 발송한다
3.신청인은 2004년 5월 20일까지 '예과유학생입학신청표','외국인신체검
사서'등서류를 직접 제출하거나 등록우편으로 예과사무실에 송부해야
한다.
신청서류 1.예과유학생입학신청표(사진첨부)
2.고등학교졸업증명서, 성적표(영어/프랑스어/일어/중국원본 혹은 공증본)
3.외국인신체검사서(사진첨부), 공증한 복사본 1부
4.추천서 1부
5.경제담보인의 증명서류(담보인의 성명, 직업, 직장, 전화번호, 주소를
정확히 기재하여야 함
6.재중국사무담보인의 보증서(내용:성명, 직장, 전화번호, 연락주소포함)
신청비 : 인민폐 400원 혹은 50달러 (여행자수표 가능). 이 비용은 환불되지 않음
입학사정 : 신청서류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하며, 합격자에게는 2004년 6월 30일
전에 학교에서 '외국유학인원 비자신청서(JW202)와 '북경대학합격통지
서'를 발송하며 임학요강에 부합되지 않으면 입학을 허용하지 않고 입
학서류는 돌려주지 않는다
등록시간 : 2004년 9월(구체적인 시간은 합격통지서에 준함)
학비 기숙사비 1.학비 : 1인당 매년 21,600원 인민폐 혹은 US$2,600(교과서값포함
하지 않음). 개학시 일시불로 납부해야 함
2.기숙사비 : 학교 책임하에 외국유학생들을 위한 아파트를 제공함
(북경대 서문밖 500미터 거리, 우전회의중심의 아파트)
2인1실 6.5달러/일, 1인1실 11달러/일
======많은 분들께서 예과반숙소에 대해 여쭤보시곤 하시는데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이 숙소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우전회의중심에 들어오시면 보이시는 썩 괜찮아보이는건물..... 이 아닌 그뒤로 돌아가시면 5층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겉에 보시고 혼동하지 마세요^^ 이 기숙사는 다시 4개로 구분되는데 이중 규정상 1문이 남자기숙사 2문이 여자기숙사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꽉찬경우는 3,4문에서도 거주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거주환경은 꽤나 괜찮습니다. 가격이 상당히 비싸지만 청소도 이정도면 깔끔하게 잘 해주는 편이고 주변분위기도 조용한게 공부하기도 괜찮죠..(저녁에는 음산하기도...) 그리고 꽤 많은 분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기숙사를 벗어나 외부에서 집을 빌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규정상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편법을 쓰게 됩니다. 보통은 2인실을 혼자쓰는 (가격은 물론 2인치를 혼자 지불합니다)친구의 명의를 빌려 그방의 룸메이트로 등록을 하죠. 이렇게 되면 사무실에서 직접 순찰을 나오지 않는 이상 들킬일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래서 방을 혼자쓰는 사람은 꽤나 인기가 있습니다^^
기숙사의 열약한 환경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으실텐데요(특히 학부모님들^^) 개인적으로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으며 사는데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걸어서 5분거리에 큰 슈퍼마켓과 야채,과일을 파는 점포들이 있고 바로 위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교통상으로도 만족할만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것은 본인이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겠죠. 기타 자세한 사항은 메일을 통해 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이 서류상에 있는 내용들이죠. 그럼 다음은 합격한후에 반배치에서 본과 입학까지의 과정들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반배치 : 반배치는 반배치고사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론 중국어학습시간이나 국적등의 다른 요소들도 완전배제할수는 없겠지만 순수하게 시험성적에 따라 분반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게 좋을듯합니다. 반배치고사는 HSK와 상당히 유사한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한어이외의 과목은 시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반은 1반에서 8반까지 나뉘게 됩니다(1급이 가장 기초반 8반이 제일 우수한반입니다) 2학기때에 다시 한번 반배치고사를 보지만 1학기때와 반이 달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보게되는 반배치고사가 실질적으로 당락의 큰 기준이 되는거죠(당연히 윗반학생일수록 입학하기가, 자기가 희망하는 학과에 진학하기가 훨씬 용이합니다) 그러니 예과반 입학을 희망하시는 여러분들!! 분반고사를 잘보셔야합니다
반의 이동 : 반배치가 끝나고 나서 자신의 희망에 따라 반을 옮길수도 있습니다
반을 내릴수도 있고 올릴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반등급을 올리려고 하겠죠?? 하지만 각반당 적합한 인원수가 15인인지라 희망한다고 다 반을 바꿀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실력이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시다면 한번 시도해보세요
예과반내에서의 내신성적 : 8반을 기준으로 설명을 드리면 1학기때는 북대출판사의 고급한어(상)과 고급구어(상), 열독, 서작등을 배웁니다 하지만 이는 대략적인 틀일뿐 한어와 구어등을 제외한 과목들은 바뀔가능성도 있습니다. 시험은 한학기당 두번을 보며 내신성적에는 시험성적뿐만 아니라 출결상황도 한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출결상황이 좋지않은 사람들은 경고를 받게 되며 심하면 시험자격박탈, 더 나아가서는 퇴학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출결상황이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그리고 2학기에는 법학이나 역사등의 전문지식에 대한 선결학습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7,8반을 위주로 하는게 사실이며 그렇게 깊은 지식을 습득할수는 없습니다. 단지 기초적인 관련지식과 단어들을 접하는게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나중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니 기회가 있을때 다 배워두는게 좋겠죠??
HSK성적관리 : 북대입학시험을 통해 들어오는 경우는 당락의 모든것이 시험성적 하나로 좌우가 됩니다만 예과반의 경우는 HSK가 당락에 큰 영향력을 점유하기 때문에그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게 되죠. 학기동안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돌겠지만 HSK는 입학전에 가지고 있던 급수와 입학후10월 달,12월달, 그리고 5월달의성적까지를 반영합니다. 8급은 안정권이라고 볼 수 있고 7급은 비교적안정권(입학은 가능하겠지만 1지망이 인기학과일 경우에는 밀리는 경우도 있어 비교적안정권이라 쓰겠습니다)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 이하의 경우에는 선택한 과나 내신성적등의 요소로 선택되게 됩니다.일반적으로 국제관계학원과 법학과,그리고 광화관리학원등을 인기학과로 칩니다.
하지만 제가 꼭 해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북경대에 온 목적이 HSK성적이 아니라는거죠. HSK는 대학입시와 중국어 능력향상을 위한 과정일뿐 그 목적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십시오. 개인적으로 HSK보다는 학교수업에 더욱 치중하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HSK성적도 아주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당연히 출결상황과 내신성적도 좋아지니 같은 급수라도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할수가 있겠죠.
수학시험에 관해서 : 만약에 자신의 희망하는 과가 경제학과나 광화관리학원일 경우에는 수학시험에서의 합격은 필수조건입니다. 북대입학시험때 응시생들과 같이 입실을 하며 동일한 시험지를 풀게 됩니다. 합격점수는 60점이상이며 이때쯤 되면 북대에서 이에 관한 푸다오과정을 열게 되니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괜찮을듯 싶습니다
이 두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학과의 경우에는 수학시험을 반영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고 수학시험을 제외한 나머지과목들은 보지 않는다고 담당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 착오없으시길 바라며 이후에 혹시라고 이에관한 변경사항이 있다면 정정해 올리겠습니다.
제가 우선 말씀드릴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기타설명이 필요하다거나 궁금하신점은 게시판에 올려주시거나 개인적으로 메일을 주십시오. 만약에 필요하다면 다시 정리를 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북경대를 희망하시는 분들 공부 열심히 하시고 꼭 자신이 희망하는 학과에 합격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하얀눈은 녹아들어갑니다^^
( p.s :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질문하나하나에 항상 성의껏 답변해주시는 다른 운영자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바로형은 빼구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