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전은 북경대에 오셨을 때 崔金柱가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입니다.



2014년 12월 25일 06시 09분. 역사학자 田余庆(티엔위칭) 선생님이 서거하셨습니다. 田余庆(티엔위칭) 선생님은 위진남북조을 중심으로 중국고대사를 탐구하셨으며, 《东晋门阀政治》,《秦汉魏晋史探微》,《拓跋史探》등의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조사가 되시는 분이시군요.


얼마전에 90을 넘으셨는데...하아......애도를 표합니다.











본 만화의 원작 저작권은 Neku에게 있으며, 본인은 어디까지나 본 만화를 소개하는 목적으로 번역을 하였으며, 한국에 정식으로 출판되거나 원작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본 번역판을 비공개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번역판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번역판은 비상업적인 원칙으로 수정없이 출처(ddokbaro.com)을 명확하게 밝히고 가지고 가실 수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论语·述而》
3명이 길을 가다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이 글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은 "3명이서 길을 가다보면 어떤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이니,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이다. 여기까지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최근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이라며 트위터에 위의 글을 올리자 @bujiwibuji 님이 완전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문 번역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나, 기존의 해석각도을 완전히 반대로 해버린 이 해석을 잠시 소개해볼까 한다[각주:1].


3인이 길을 가면, 한 명은 훌륭하고, 다른 이는 쓰레기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명은 무엇일까? 공자 자신일까? 그러나 해당 고문은 "3명이서 같이"와 "3명과 같이"로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 자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각주:2].

그렇다면 잘하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bujiwibuji님은 이에 대해서 "잘한다고 뻐기기에는 민망하고, 못한다고 빠지기에는 억울한... 그러니까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 이들은 본받기엔 만만하고, 개선하기에는 큰 하자가 없어서, 투명인간으로 처리."라고 해석하였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잘하지도 못하고, 못하지도 못한 언급되지 않은 존재와도 같다. 우리네들에게는 그렇게 잘난 사람도 없고, 그렇게 못난 사람도 없고, 그 중간에 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나눌 줄 알고, 타인과 기쁨을 같이한다. 비록 거창한 "배움"이나 "가르침"은 없지만, 그런 모습이야 말로 인생이며, 배워야될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자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투명인간으로 처리했다기 보다는 그런 평범한 모습도 가능하다는 것을 후대의 해석자들이 무시한 것이 아닐까?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해석을 하자면 : "3명과 같이 길을 가다보면, 어떤 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여서,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리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지만, 그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며, 우리네 이웃이기에 나와 함께 해주는 친구와 같은 스승이다."



* 고문의 즐거움.
고문은 표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변하고, 단어 하나에도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고, 무엇보다 글자수를 최대한 압축을 해놓았기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풍부하다. 그것이 고문의 매력이자 저주이다. (저주라고 여길때 고문이 고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을 하고는 한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기존의 고문을 다르게 해석한 내용을 보면 참 재미있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 독해능력이 없음을 생각하면, 변태스러운 자위행위라고도 생각된다. 쿨럭;;;

* 트위터의 즐거움.
평소에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와 더욱 쉽게 교류를 하며 자극을 줄 수가 있다. 비록 140자의 한정된 공간이지만, 그런 제약성은 최대 압축의 고문처럼 그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자주는 못 올리지만, 생각의 단편들을 오늘도 트위터에 올리고 흘려보내어 다시 돌아온다.

* 焉 : 어조사 언을 뺴면 안돼요 -0-
가끔 마지막의 "焉"을 빼놓는 분이 있다. 고대한어에서 한자 한자는 결코 그냥 쓰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컴퓨터 타자도 없었고, 인쇄도 불가능했고, 복사도 불가능했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 없는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焉은 한국에서 어조사 언이며 별 의미가 없다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焉은 감정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혹은 "이 곳에"(此地)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위의 문장으로 예를 들면, 3명이서 길을 가는 (바로) "그곳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1.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란다. 이는 철학논문이 아니다. -_-;;; [본문으로]
  2. 또한 공자 스스로가 이미 성인에 근접한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보다 훌륭해서 배울 자가 많아야 얼마나 많을까? 이 말을 주석 처리한 이유는 감정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여^^;; [본문으로]

당(唐)조의 황제는 기존의 황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특수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하늘칸(天可汗)이라고 하늘 지배자로 불리었다. 당조의 황자는 여러가지 옥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 전문적으로 국외에 보내는 편지에 이용했던 도장에는 "하늘칸의 도장 天可汗之印" 이라고 쓰여 있다.

당조의 꿈은 바로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에게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하늘칸을 얻지 못하였다.

수(隋)나라말기 고구려 공략으로 인하여 민심히 흉흉해지고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원은 그러한 수나라의 고위관리였을 뿐만이 아니라, 황제와 긴밀한 혈연관계을 맺고 있었다. 당시 아무도 당이 수나라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이원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이연의 어머지는 수양제(隋炀帝)의 어머니와 친자매였다. 이연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자, 수양제의 어머니인 독고황후(独孤皇后)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연은 아버지의 작위인 당국공(唐国公)을 어린나이게 이어받게 되었고, 그의 출세도 수문제(隋文帝)와 황후의 후광 속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수양제와 이연은 아마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자주 같이 뛰어놀면서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반란을 잃으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을 했을 것이다.

대체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일까? 이연은 제왕 운명을 타고 나서? 이씨가 양씨를 대체한다는 유언비어때문에? 주위의 심복들이 부추겨서?


614년 태원으로 돌아가보자.

수나라는 몇 백년동안 분리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더욱 강대하기를 바랬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략하였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거대 제국의 꿈은 날로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617년의 중국은 수나라 붕괴의 전야였다. 전 국토의 산천이 불타고 민중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역사의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누가 역사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1. 꿈과 현실 - 이원

617년, 이연은 태원으로 파견을 나가서 잠시 머물렀었다. 당시의 관직은 태원지방의 제독(最高军政长官)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방실력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이연이 속으로 가장 기뻐했던 것은 실제 권력이 아닌 어둠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미묘한 생각이었다. 태원은 고대 전설 속 당요(唐尧)가 관장했던 지역이었다. 요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시르게 되었다. 천상천아 유아독존. 이연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위도 당국공(唐国公)이었다. 당국공이 당요의 옛땅으로 온 것이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사람이 이연의 관상을 본적이 있다. 그는 이연의 골상이 부귀하니 스스로를 아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연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연이 태원에 도착한 뒤,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는 꿈만이 아닌 현실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꿈만으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업구년(大业九年) 바로 수양제가 고구려로 친정을 나갔을 때, 예부상서(礼部尚书) 양현감(杨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연은 양현감이 친지들을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전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장 전선에 있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이연의 충성에 감사하며, 전방주력부대를 돌리고, 다른쪽으로는 이원에게 홍화군(弘化郡)의 군사를 맡게 하고, 지관우주군사(知关右诸军事)에 임명한다. 이는 장안(长安)의 북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연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중에 이연이 보여준 충성은 매우 깊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두항(窦抗)은 이연 부인의 당형이었다. 또한 이연 본인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두항은 이연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손에 넣으라고 조언을 한다. 그때 이연은 "문제를 일으킬 발언을 하지 마세요(无为祸始,何言之妄也。)"라고 대답한다. 당시의 법률을 생각하였을 때, 두항의 발언은 모반의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연은 이 사실을 보고해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비록 두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정작 두항을 고발하지는 않는다.

이연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연이 태원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정세력의 대표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각지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그는 심지어 70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해서 70명을 죽인 기록이 있었고, 조직적이지 않은 군중들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의 야심과 꿈이 합쳐졌을까? 그가 진정 꿈을 위해서 노력을 시작했을까? 그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아직 웅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의 반란과 침입을 막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됩니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람을 말하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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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님께서 죽은 과거보다 살아있는 현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짐작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연대기 작가가 되시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지 못하신 것도 압니다. 예. 언어는 말해진 순간부터 고정되겠지요. 어떻게든 이 아름다운 지금을 표현해 보려 해도, 그것은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겠지요."
남작은 졸음에 취하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어쩌면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스발의 목소리는 이제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작님은 훌륭한 연대기 작가이십니다."
"어째서-?"
"지금을 사랑하시니까요."

--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중에서...


요즘 자주 생각나는 문장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관찰하고 해석할 뿐 과거에는 내가 참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는 "지금"을 너무나 사랑하나보다.  그렇다고 나는 행동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아련하다.


관찰하자.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의 조그마한 관찰로 현실에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겠지.
관찰하는 능력부터 제대로 기르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까! 괜히 공부가 안된다면서 이렇게 떠들지 말고 책이나 더 보자고!!!


北京大学历史学系2008年硕士生拟录取名单公示

一、内地考生(共计19人)

丁 浩、邓 阳、刘玉群、刘乳滨、刘崇锤、何存金、余奕珠、张 寒、张曜光、李华程、罗 志、郑启芬、胡 宁、栗河冰、袁 鹏、高俊杰、韩 飞、韩 澍、韩基奭

二、推免生(共计21人,其中含学工选留1人,不占招生计划):

于  娜、丹筱彤、王  月、王  倩、王梦婕、冯  佳、冯立冰、吕  超、张心远、张宁芳、张成晗、李坤睿、李怡文、李梦岚、杜  乐、陈  捷、陈冠华、陈博翼、胡  珂、胡晓丽、聂溦萌

三、留学生(2 人)

马  硕、王  林


北京大学历史学系

    2008年4月9日


없다. 없다. 없다. 유학생은 2명인데, 이름으로 보아서는 화교이거나 서양애들이다.

최소한 한국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없다. 없다. 없다.

(2차 시험에서 떨어지신 한국분이라고 추측되는 한 분. 애도를 표한다. 후....)


기대했었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후배 한명 안 들어오나 말이다. 사실 현재 본과에 다니는 한녀석이 들어왔어야 되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역사 공부에 어울리는 녀석인데 말이다. 결국 본과 출신의 석사인생 2명의 모습을 보고 살포시 포기해주시더라. 좋은 모습 보여주러 그리 노력했는데 말이다. 큭....

내년을 기대해 보리라. 한 녀석 있다. 그나마 살아있을 한명의 생존자가...

그녀석 이름에는 아예 석사의 석자도 있다!! 자!! 와라!! "원래 석사여!"


왜 굳이 한국인이냐고? 외국에 있으면서 중국애들하고 안 노냐고? ...지도교수님이 소수정예(본인 빼고) 주의라서 현재 박사생 2명에 석사생 1명(이게 본인)만 있다. 맨날 3명이서 노는데도 지쳤다. 좀 데리고 놀?! 후배가 있어야되는데 말이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없다. 아...새로 한명이 들어오긴 한다. 본과에서 박사로 점프해서 말이다. 후....


없다. 없다. 없다. 그래서...

외롭다....이것이 소위 인문학의 위기인가? (........)




자기 얼굴에 침 뱉기 : 올해 전공과목 시험이 생겼더라.작년에는 연구생 시험 개혁한다고 딸랑 면접만 보았는데 말이다. 으음...지금까지 시험운이라고는 개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험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역사가 나를 부른다라는 폼나는 말도 있겠지만...안 불렀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자치통감. 사마광님아~ 조금 짦게 쓰지 그러셨어요? ㅠㅠ


김용덕 :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동양사 교수, 하버드대학교 석박사, 일본근현대사 전공.

 

김용덕 교수님은 한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몇가지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조의 사대주의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울대 교수가 북경대에서 강의를 한다는 특수상황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가 보는 현재 한국의 4대 문제는 한중, 한일, 그리고 남북한 관계가 있다. 더욱이 중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중간에서 어떻게 처리하는냐도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기에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기준으로 상대방의 국가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인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타자가 되어서 바라보아야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을 예로 들어서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관의 정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소중화의식은 민족의 독립성을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기본은 사대주의가 아니던가? 흐음...

 

전근대에서는 동북아의 기본적인 가치가 유교(성리학)였지만, 근대부터는 서양의 가치가 중심적인 기준이 된다.

 

교수님은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점을 사람들이 잘 알것이라는 이유로 건너 뛰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강의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될 부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한국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교수님은 조공책봉제(朝贡册封体制)을 현재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현재 역사전쟁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1)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으로는 무조건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교수님도 분명히 알지 않은가? 그래서 본인이 고대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동북공정과 같은 몇가지 문제는 있지만 사실상 모든 문제가 정치와 연결되는 근대사보다는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다.

 

2) 서로의 "역사주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마치 영토와 같이 역사도 그 나라 범위안에서 보호되어야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이상하다. 그렇다면 국제적인 학술교류는 왜 하며, 국제적인 주류 역사해석은 어떻게 해야되는것인가? 무엇보다 이것 역시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는 현실의 한 모습에 불과하지 않은가?

 

** 열린 민족주의 开放的民族主义(Internationalized Nationalism)

재미있는 개념이다.

 

3) 동아시아 공동체

교수님는 중국의 파워가 홀로 너무 강하여서 이런 공동체의 실현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사력으로보아도 일본은 중국에 그리 떨어지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한국이 충분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수님은 공동체의 실현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매우 모호한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런 내용은 나도 예전부터 주구장창 이야기해놓았던 이유다. 구체적인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동아시아안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공통의 가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가치(East Asian Value)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로 만들면, 이런 가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세계를 평화적으로 모두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야 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간의 문화를 존중한다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다라니...;;

 

 

** 유럽공동체가 생겨난 이유는 그동안 죽어라 서로 전쟁을 해서 이제 합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공동체가 생겨날려면 동아시아도 죽어라 전쟁해야 된다!!! 당연히 교수님도 농담으로 한말이다.

 

 

문답 :

역사 주권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학술상에서는 기본적인 주권중에서는 하나로 포함된다. 전통적인 주권에서는 국토, 국민, 지배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역사라는 것은 빠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일제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주권을 모두 상실한 가운데, 역사주권만은 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Q :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뒤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 역사를 이용해야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순 아닌가요?

그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위해서 먼저 역사전쟁을 해결해야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동북아시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동북아시아 역사연구센터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영향력을 보면 한국은 영향을 행사하기보다는 받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너무 치열한 역사 전쟁상태를 생각하면 한국이 그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없을까?

 

 

그 외 잡상 :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같은 민족에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중국의 지배자는 다른 민족에서도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런 다른 민족지배자들도 중화사상에 빠져들지만 말이다. ---> 일단 한국과 일본은 단일민족도 아니고 한나라나 몽고와 같은 외부세력도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전의 민족관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람 모두가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 ....솔직히 반대파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지지 않았나?

 

 

통역자에 대해서 :

북경대학교 한국어과 연구생이라고 한다. 중국인이다. 이번에 역사과 박사시험을 보고 면접만 남았다고 한다. 그럼 머...들어오겠지. 현재까지는 한->중 번역만 하고 있음으로 정확한 실력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래 말에서 어려운 말들을 조금씩 빼놓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 구체적인 사실이나 속담같은 말은 번역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빨간옷을 입은 한국분. 박사생으로 알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듯 하다. 더 열심히 하셔야 될듯...

 

 

牛大勇

동북아시아의 통합

 

1) 강력한 초거대국가

내부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합쳐야겠다는 인식 -- 적대할 국가

 

2) 현재 복작한 정치외교 상황 - 분리주의문제

조선, 한국, 타이완, 중국, 일본이 서로 너무 얽혀 있다. 일단 조선과 한국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간의 문제가 해결되야지 동북아의 통합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쟁책임과 역사책임

일본과 반일본간의 일제시대의 전쟁 책임과 역사책임을 포함한 문제. 다시 말해서 일본을 믿을 수 있으냐는 점.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과 서술에서 반박할 것이 몇개 있었음.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어떤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는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한다.

-- "The Peoples of Asia" - Science and Politics in the Classification of Ethnic Groups in Thailand, China, and Vietnam By CHARLES KEYES 중의 문장을 살짝 패러디한 것.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곰곰히 씹어보면 너무나 씁쓸한 문장.


 CHARLES KEYES는 민족이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민족의 개념과 범위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서 너무 쉽게도 변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한민족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틀은 과거 정신문화연구원이 피나게 만들어낸 역사관의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누군가에 의해서 세뇌된 하나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곰곰하게 되돌아보자. 그리고 "한민족 짱!" "한민족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짱깨는 드러워"나 "쪽발이는 키작은 병신"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민족이나 국가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단지" 인간으로서 세계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없다.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본인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는 순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적인 가치는 0%에 가까운 쓰레기이다. 물론 한가지의 가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해당 가설의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영토 표시가 지 마음대로다. 해당 영토 표기는 태왕사신기에서 봤던 그 영토 표기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 드라마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건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올려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보는 지도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대충의 문제만 말해도...

 

1) 백제의 산동반도설 통치설은 한마디로 증거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한마디로 학문적으로 인정 못 받는다.

2) 거란의 위치도 훨신 아래쪽이어야 한다. 아니 고구려의 위대함?!을 말하려면 차라리 거란이 고구려에 통합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방랑을 하며, 한때는 고구려에 통치를 받았고, 다른 때에는 중국대륙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해당 위치도 요서쯤에 배치하는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대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3) 후연은 아무리 약해졌어도 최소한 요서정도까지는 지배했었다. 그런데 해당 지도에는 베이징(북경)도 점령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홍보를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어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당장 위대한 고구려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중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는 단지 타국의 역사일뿐이다. 우리가 로마의 문화가 유렵의 여러 국가에 내려온다고 간략하게 말하는 것처럼, 타국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명망한 뒤 현재 한중일 모두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이게 누구 역사란 말이 왜 나오는 것인가?

헛소리다. 민족주의에 사로 잡힌 오만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일 뿐이다.

 

 

더 황당한 건 독도다. 대체 저 시기에 "독도"라는 지명이 어디있었냐?

기본적인 역사 지도의 역할도 못하는 쓰.레.기. 일 뿐이다.

야생의 사고을 구하는 방법의 역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인터넷에서의 검색원리를 야생의 사고의 역이라고 가정하면, 역에서 원래의 야생의 사고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예로 구글의 검색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서로간의 링크관계를 개념화 한 것이다. 그 외에 다양한 검색방법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검색법에 대해서 분석함으로 인하여 야생의 사고를 분석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레비는 야생의 사고라는 제목으로 기존의 것을 부정한 것이고, 지금의 용어로 하면, 인류 공통의 사유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며 떠오른 잡상.


실제 연구 방법
1) 인터넷 검색 원리 수집
1. 구글
2. 네이버
3. 기타 등등

2) 검색 원리 간의 공통점 분석
3) 검색원리의 공통점을 통한 인간의 사유체계 구성
중국어와 한국어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6~70%의 한국어 어휘가 한자에서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어휘들이 주로 고대 한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더 많은 어휘는 지금도 그대로 혹은 약간의 변화만을 거친 채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홍콩영화를

보 다 보면 한국어와 발음과 의미가 똑같은 어휘들이 자주 등장해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이는 북방유목민족의 남하와 관계가 있다고 하네요. 유목민족의 남하 전에 중원을 차지하고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을 벌였던 한족 왕조에서 쓰이던 언어가 현재의 남쪽에서 통용되던 언어인 거죠. 허나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원을 상실하고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레 한반도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끊기고 그 후로 북방계통의 중국어가 표준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어는 현 남방계열의 중국어와 더 비슷한 점이 많게 된 거죠. ( 중국역사 전공하신 바로님이 확실하게 알려주시겠죠...ㅋㅋ  )

아직 하얀눈님이 글에서 맘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_
http://www.oh-bang.com/11?TSSESSION=3550d39959032ac9108c6dab3ed2d15b


적으라고 적고 있는 나도 문제이긴 하다.후....-_-
그런데 본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중국 고대사라는 말이다!!
이건 언어학적 문제인데!!! 잘 몰라! -_-!
그냥 여기 저기서 들을 이야기를 종합해 놓은거니까 알아서!!! -_-


일단 한글과 한국어의 언어체계는 기본적으로 알타이어족의 기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어족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 한국어와 일본어 속에서는 많은 "한자"요소가 포함되어있기 떄문이죠. 그래서 혹자는 알타이 어족에서 몽고계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분류하지 않고, 독립적인 한국-일본어 계열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북방 이민족의 유입과 한국과의 교역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전부터 황해는 강력한 교역수단이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유명한 것은 신라방, 고려방, 표해록등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더 궁금한 내용은 윤명철 교수님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황해를 환지중해로 설정하는 재미있는 책들이랍니다. 어찌 되었든, 한반도와 중국 남부는 지속적인 교류를 해 왔고, 현재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이 중국 남부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방계열이 한국어와 비슷하다기 보다는, 예전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활용해오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고대 한어의 단어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인데, 어법은 중국어와는 완벽하게 다른 알타이 어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의 교류대상은 중국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방 민족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하여왔고, 고대 한국어와 현대 한국에서도 이런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아직하얀눈님은 북방민족들은 낙후되고, 덜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교류의 가능성을 조금 무시하지만, 사실상 북방 민족들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 유산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곳에 전해주었던 전달사의 역할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물론 그 방법이 가끔은 약탈과 침입이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문화 전파의 한 모습이죠) 이러한 예시로는 한국어에서 "강"이라고 말하는 단어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강의 고대 한국어는 "가람"으로서(한가람 서점이 이것이죠^^ 한가람은 한강이라는 뜻이랍니다.), 표기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가람을 빨리 여러번 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강이나 가람이나-_-; 그게 그 발음입니다. 그리고 이 가람은 알타이어 계열에서 강을 의미하는 보편적인 발음으로 통용됩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어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북방계열 언어체계입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의 중국과의 교류로 인하여 많은 단어들이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지금 현재의 한국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교류를 무시하고, 가장 순수한 한국어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이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교류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이기 떄문입니다. 물론 단순히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하나의 문화가 사멸되는 것이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긴 합니다만...이건-_ 별로 이야기 안해도 될 말이라서.....패스~

역사과 3학년 이상 선택 필수

출석 필수!

레포트 1개 :중화민국이전 시기에 대한 자유 주제 레포트

기말 오픈북 : 난이도 낮음 (논술문제 3문제 중 2문제 선택)

  1. 중화민국시기의 대일외교
  2.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3차례 수교 열풍
  3.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미국과 소련관계 변화

主要

颜声毅《代中外交》旦大出版社:按主题来

《中国当代外交史(1949-2001)》中国青年出版社 :按

위의 두 책이면 끝! 특히 당대 중국외교는 사건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서 특히 유용!

주요 사건 정리:

1949- 1955

抗美援朝

会议 – 印度支那停战协议

和平共

会议

1965-1972 "反帝比反修"和反对两

支持越老柬三人民的抗美救国战争

莫斯科"三月会议"

"珍宝岛事件"

文化大革命 –

尼克松访华 《上海公

1972-1979 三世界的分和美反

越南行自卫还击

正式止"中同盟"

1979-1989 都不盟的政策

售台武器事件

中美"八·一七公"

勃列日涅夫的塔什干讲话

戈尔巴夫的海讲话

戈尔巴访华

"中导条约"

"一国两制"

钓鱼岛问题

南沙群岛争

만든 이유는? -_-

글세다. 인터넷 되는 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짜증나서!

이 넘의 몽고사 완전 짜증~!! 대체 몽고의 형성까지 100년 사이에 큰 전쟁만 몇 개냐!!

머-_- 처음부터 만만히 보았던 중국근현대외교사. 정말 딸랑 30분의 독서와 정리로 끝!

유목사회의 구조 - 서울대학교동양학강의총서 10
하자노프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지식 산업사

출간일 : 1990-03-01 | ISBN : 8942329446
양장본 | 484쪽 | 210*148mm (A5)
정   가 : 15,000원


1. 서론:유목, 그 신화의 문제점
2. 식량생산 경제의 독특한 형태로서의 유목
3. 유목의 기원
4. 유목민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의 사회적 전제조건들
5. 외부세계에 대한 유목민의 적응양식
6. 유목민과 국가
7. 외부세계와 유목민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인류학자가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연구방법을 빌려서 만든 인류학책이다. 많은 부분에서 사료의 인용과 적용의 흔적이 보이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인류학에 기인하였다. 또한 이 책은 다양한 역대 유목에 대한 저작들을 망라하고 그 주요 논점들을 설명 비교 해 주어서 유목에 대한 입문서로는 최고라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에반스 프릿차드가 말했다 싶이. "결국 인류학은 역사학이 되느냐 아니면 무가 되느냐는 선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명언이 새삼 생각이 난다. 인류학은 종합적인 학문이라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이 되는 연구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숨겨져 있다. 현지 조사라는 것 자체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그럼 역사학자는 현지 조사를 아예 안한다는 말인가?!

또한 역사학-인류학-민속학-사회학은 각기 너무나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다. 그 뿌리가 과거에 대한 분석를 통한 미래 제시라는 점이 이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듯하다. 이미 이 학문은 서로간의 연구 대상, 연구 방법, 연구 목표등에서 매우 유사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서로 모두 흡수하였다. 이제 앞으로 이 학문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것인가는......나와는 상관없다. ㅋㅋㅋ -_-;;

그리고 이 책의 번역자인 김호동씨는 머랄까...한국 중앙아시아학에서 거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유목사회에 대한 책을 구하고 싶다면 다 필요 없이 김호동이라고만 검색을 하여도 양질의 책들이 있다. 대단한 분+_+;;





책에 밑줄긋기

과거는 낯선 나라다.
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1985)

데이비드 로웬덜 지음
김종원, 한명숙 옮김 
개마고원

출간일 : 2006-06-20 | ISBN : 8957690441
양장본 | 877쪽 | 223*152mm (A5신)

정   가 : 38,000원





역사는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해석일 뿐이다. 역사라는 것을 공부하면 공부 할수록 마치 "오언절구"와 같이 일정한 규격속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는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해 질 수도 없다. 마치 지금의 우리 현재도 완전히 구현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로웬덜은 완벽한 역사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런것은 환상이며 오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되도록 완벽한 역사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제시한다. 신이 죽고, 더이상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시대에 영원히 닿지 않을 지평선을 향해서 나아가나는 것이 옮은 것일까?

또한 일반인이 역사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서, 역사에 대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인 존재가치를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하는 로웬덜 자신도 말했던 역사학의 치명적인 단점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야 된다는 말인가? 역사가 역사 이상의 것이 되었을 때, 민중을 선동하는 도구가 될 뿐인데 말이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서 접근을 금지하고 있는 듯한 책. 그러나 역사학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우리의 애국적인 국민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환단고기를 즐겨 보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으나, 역사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하고 다시 한번 환단고기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진실이라는것은 있긴 있는건가?




책에 밑줄 긋기

이 글은 칼리안님의 어째서 사학史學이 사회과학이 아닌 문과대학 소속이지? 라는 글을 읽고 답글을 달다가 너무 길어져서 트랙백으로 대신합니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전 지금 중국땅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선후가 반대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논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학이 사회학의 닮은 꼴이기 보다는 사회학이 역사학의 닮은 꼴이라고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론적인 부분을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사철
이른바 "문사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각 문학, 사학, 철학을 나타내며, 위의 3가지 학문의 문과의 기본이며 기초라는 것을 강조할 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며, 언어자체가 없으면 어떠한 학문도 존재할 수 없음으로 기초중에 기초이겠군요. 어떠한 학문도 발전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경과가 되죠. 그럼 시간의 경과와 함께, 현재가 과거가 되며, 모든 과거는 역사학의 대상입니다. 역사학이 없으면 학문은 발생한 상태로 고정이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는 철학이 없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없으면 단지 생존을 할 뿐,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역사학이 문과에 있는 이유도 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문과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응용문과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의 범주에 넣는 다는 것 자체가 어불 성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류체계가 어지러워집니다.

님이 제시하신 국어국문학이나 중어중문학과 같이 말씀하시면 마치 역사와 국어 국문학이 따로 놀고 있는 듯 하지만, 한국어를 연구해야 한국 근대사를 알 수 있고, 중어중문학을 해야 중국 역사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 역사를 알아야 중어중문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또 철학이 여기에 추가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회학이 없어도 중어중문학을 연구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사회학에서 방법론을 빌려올 수 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2. 사회학은 없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사회학-인류학-민속학-문화지리학등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대체 역사학과 위의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학문간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과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 같은 고민들 대충 2년넘게 했군요. 그러던 중 폴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동안 고민하던 많은 문제가 풀려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회학에 대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1. 사회학에는 대상이 없다.
모든 과학은 대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회학의 대상은 무엇인가요? 사회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모든 것들이 그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나 역사의 한 단면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나름대로의 특수한 설명을 요구하는 무수한 사건들이 존재하는데 그 요소들의 집합의 설명을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표면 위에서 임의의 지역내에 매순간 일어나는 모든 장르의 엄청나게 많은 물리-화학적 사실들의 총체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2. 사회학은 여러 학문의 집대성?! 혹은 쓰래기 처리장...
사회학에서는 온갖 학문을 이용합니다. 경제, 역사, 문학, 심리학등등.. 그 방법론의 확장에는 한표를 던져주고 싶지만, 사회학만의 연구 방법은 무엇인가요? 이런 온갖 학문의 방법을 이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말장난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은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이 정도로 하죠. 괜히 사회학과 친구한테 뭇매를 맞겠습니다.-0-;;



3. 중국에서는 역사학은 사회과학입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을 사회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공산주의이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를 사회학에서는 사회학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마르크스는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등등.. 수많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또한 마르크스는 역사학에 대해서 그 당시 과학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했으며, 그 영향으로 지금 중국에서는 역사학이 사회과학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문과계열로 포함되어있습니다.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일뿐, 기본 속성은 문과계열로 만들어 놓았죠.



결론적으로 역사학은 문과계열임이 너무나 당연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문과계열이니, 응용문과라느니, 사회과학이라니, 그런 구분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때문에 이런 구분이 생겼을 뿐. 그것에 얾매이는 것은 별로 좋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2003-2004学年第二学期《世界中古史》期末考试
考试形式:闭卷 命题人:黄春高
姓名: 学号: 班级:

一 名词解释(任选5,每个6分,共计30分)

赎罪券 《神曲》 贞德 蒂玛尔 《大宪章》
什叶派 黑死病


二 简答题(任选2,每题10分,共计20分)

1、简述罗斯国家的形成
2、简述日本幕府政治的形成
3、简述中古西欧大学的基本特征


三 论述题(任选2,每题25分,共计50分)

1、试论述西农奴制度。
2、试论述宗教改革对西欧各国政治的影响。
3、试论述阿拉伯帝国的解体。


세계중고사 기말고사시험문제였습니다. 예상한것이 나와서 행복하게 풀었던?! 기억이 있군요^^::
《世界中古史》期中考试试卷

姓名 学号 分数


一 名词解释(30分)

毁坏圣像运动 《末日审判书》
查理曼《古兰经》大化革新

二 简答题(20分)
1、封君封臣制度对西欧社会的影响
2、主教任职权之争

三 论述题(50分)
1、试论述中世纪早期日耳曼诸王国的基督教教化。
2、试论述法国卡佩王朝王权的发展。


조금 많이 어이없는 문제가 나왔던 중간고사였습니다. 어이없던 이유는 예상했던 문제가 하나도 안 나왔다는 것이죠. 그나마 이슬람과 기독교관련문제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거지같은 성적이었을듯...
2003~2004学年第二学期历史学系“中国古代史(下)”期末试卷

命题人:邓小南 张帆 分数(满分60分):
姓名: 学号:


一 名词解(任选6题,每题5分):
1.大索貌阅 2.律令格式 3.四时捺钵 4.濂洛关闽
5.诸色户计6.皇明祖训7.松山之战8.经营地主

二、问答题(每题15分):
1、请简要说明唐宋时期社会经济的发展有哪些主要表现。
2、试比较元朝和清朝民族政策的异同。


과락을 각오하고 시험에 임하였는데 예상외로 쉬워서 (그렇다고 성적이 좋은건 아니지만) 행복했던 기말고사였습니다.
사학개론이라는 과목의 유명한 싸이코선생님이 이상야리꾸리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주제도 자유. 쓰는 방법도 자유. 그렇다고 레포트도 아니고, 숙제 마감 기간까지 매 번 말이 변하는지라, 중국애들도 과연 이것을 어찌 해야되냐고 서로 물어보게 만들어 버리는 숙제입니다.

한루님이 낙랑에 대해서 자료를 찾으시길래, 저도 어차피 주제는 잡아야되니까 일단 도서관 가서 쓸어모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업은 저녁 9시까지 있었는지라 지금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군요.

일단 마주잡이로 관련 자료 다 복사해서 뭉그러진 낙랑관련 논문들만 올리겠습니다. 낙랑만을 연구한 연구논문은 거의 없군요. 그냥 낙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을 일단 다 끌어모아버렸습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정리해야겠군요.(정말 쓰러질 것 같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는 삽질...ㅠㅠ)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어차피 자유주제라고 했겠다!!
그냥 막가파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였던가? 그것을 주제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뭐... 중국에서는 이런 이야기자체가 없으니까 이런 설화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을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일단 자자...ㅠㅠ

일어나서 다시 목록을 보니까...아무거나 마구잡이로 긁어오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ㅠㅠ

그나마 건질만한 건 이정도인가.ㅠㅠ
이우혁씨의 소설을 즐겨보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우혁씨의 글 중에서 간과하고 있는 몇가지를 적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일단 읽고 제 글을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중국은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퇴마록저자 씀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이우혁님은 이 관념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엉터리일뿐이다라고 일축하셨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단정을 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것을 일방적으로 허황된 개념이라고 말하였다면, 현재 한국이 주장하고 있는, "현재 한국민족을 형성케 한 성분들은 모두 한국사의 주체이며 그들이 활동한 공간은 모두 한국사의 무대, 즉 한국"이라는 개념도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념은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으로서 그것을 인정해주어야합니다. 논리가 아닌 가설이 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큼 바보짓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역사론의 한국도 똑같은 이유로 비판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그렇다면 한국의 논리는 "한국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땅에서 어떤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의 우리 한국에 섞여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인을 이루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모두 한국사이다." 이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한국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일단 한국이 단일민족이라는 가설부터가 논리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지금 한국인과 같은 공동체성격을 갖기 전의 역사까지 한국사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그런 교수라는 사람은 김한규교수님인거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우혁씨가 김한규교수님의 논문이나 책을 정말 읽어보았나라는 것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을 신문기사에서 저렇게 왜곡한 것을 가지고 그 모든 논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요논지를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은 요동지방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시키는 가설아래에서 모든 논지를 설파합니다. 요동 지방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한다는 의미는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로 볼 수 없다"라는 가설과 동시에 "고구려는 또 중국사도 아니다."입니다. 고구려는 다만 "요동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합니다만, 그 부분은 직접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 1,2> 대우학술총서와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장은, 본인도 인정했다싶이, 민족사학이 날립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무시당하고, 국립사학이 날뛰는 중국에서도 소외받는 어찌 보면 불우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을 보면서 그 논리에서 상당한 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반박을 당해야지, 단지 민족감정으로 인하여 박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학자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한중관계사를 한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가 요동이라는 제3의 역사공동체를 환절로 하여 서로 교섭하고 관계한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한중관계사를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 필자 나름의 시각과 관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과 중국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가을에 중국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로부터 해남도에서 열리는 중국학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논문 한편의 발표를 준비하였다가, 회의참석 직전에 갑자기 해남도행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사전에 우송받은 발표 요약문을 검토한 주최측이 발표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 떄 주최측이 밝힌 요청의 이유는 <그 논문이 회의장에서 발표되면 한중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의 머리말중...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며 국가적으로 대응해야된다는 것에서는 찬성을 하지만, 이우혁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의 학문적 양심을 무시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학자에게 학문적 양심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욕하고 계시는 동북공정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몇몇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린다고, 한국의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리고 정치를 위하여 진실을 왜곡해야 되는 것입니까?

학자가 학자이고,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놈의 학문적 양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적으로 당장 밥줄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말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자이고, 학문이 학문인 이유입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민적인 지지가 없다면, 상대의 정치적 역사공세인 동북공정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해야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우혁님은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라고 하셨지만, 그 정보를 나누기 전에 본인이 어느정도 기본이 되어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 매번 고구려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시고, 짱깨짱꺠 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은 고구려에 관한 논문 단!한편이라도 읽어보셨나요? 전 중국에 있어서 동북공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인들에게 직접 몸으로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번 화를 내더군요. 그런데 그들이 중국인과 하는 이야기의 한계는 뉴스보도에서 나오는 정도입니다. 사료적 이야기나 논증적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단지 감정적이 될 뿐이죠.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이라면 괜히 거부감이 드시나요? 사실 논문이라는 것이야 말로 제일 읽기가 쉽습니다.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잘 못 쓴 논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도 보통은 10p정도 밖에 안 합니다. 일단 공부하는것이 어떨까요?


바로의 중얼중얼
이 외에도 저 글에서 몇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이미 너무 길어져서 더 길어졌다가는 돌 날라올거 같습니다.^^::

논문을 따로 구하기 힘드시다면, 제 블로그 왼쪽에 메뉴를 보시면 역사비웃기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중국과 한국 논문이 있는데, 한국논문을 읽어보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중국논문은 그 요점만 제가 번역해 놓아서 본문의 논증부분은 중국어를 모르면 보시기가 애매해서 말이죠^^:: )
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원문 출처: http://www.snweb.com/gb/gnd/2004/07/02/0702p014d001.php




장기간 잘못 읽어진 역사, 오늘날에 와서 중시되는 유산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



사진 :


벽화&lt;진식도&gt; 고구려 귀족의 생활을 표현

장군총



호태왕비(20세기초 촬영)

호태왕비 탁본&lt;br /&gt;




  <환구시보> (2004-07-02 제14반)


<출처 : 지누 북경유학생의 모임 http://cafe.daum.net/studentinbej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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